다저스타디움 첫 방문 (2013.08.26)
박찬호로, 다저스로 MLB를 배우고 야구를 배웠다. 그런 내게는 다저스타디움이 에펠탑이었고 자유의 여신상이자 누 캄프였다. 누구나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버킷 플레이스'가 하나씩은 있다. 나에게는 다저스타디움이 그런 공간이었다.
2013년 여름 처음 방문했던 다저스타디움은 1990년대의 향수를 물씬 자극하는 곳이었다. 몇 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친 탓에 90년대 말과 비교하면 외형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 시절 쌓았던 추억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 속에 피어올랐다.
금방이라도 박찬호가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전담포수인 채드 크루터가 그 공을 받을 것만 같았다. 션 그린이 외야에서 강견을 뽐내며, 에릭 캐롤스는 든든히 1루를 지킨다. 게리 셰필드는 배트를 흔드는 특유의 타격폼으로 눈길을 끌고, 경기 후반에는 마이크 페터스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마운드에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손에 땀을 쥐고 박찬호의 공 하나하나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때, 불같은 강속구로 위기를 모면했을 때 손을 불끈 쥐며 환호하던 그때 말이다. LA 다저스는 한국에서 수많은 MLB 구단 중 하나라는 의미 이상이었다. 당시에는 박찬호뿐만 아니라 그의 팀메이트들까지 모두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야말로 다저스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구단이었다.
'박찬호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기였다. 박찬호 선발경기 중계가 시작되면 집, 학교, 식당, 터미널 등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경기에 집중했다. 특히 학교 교실에서는 수업시간에 박찬호 선발경기를 보여달라고 아우성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선생님들의 실랑이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나도 그 철없던 학생들 중 한 명이었고, 선생님이 못 이긴 척 넘어가는 날에는 박찬호 선발경기를 친구들과 같이 응원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90년대 말 한국에서 박찬호가 단순한 인기를 넘어 신드롬으로까지 번진 건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이었다. 그 타이틀은 현재도 유효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다. 최초, 선구자가 주는 의미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 등판, 메이저리그에서 승리투수가 된 첫 한국인 투수, 심지어는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친 첫 한국인도 박찬호의 차지다.
또 하나는 'IMF'라는 초유의 시대적 상황이다. 당시 골프의 박세리, 야구의 박찬호는 IMF 위기극복의 메타포 같은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기에 감정이입을 하며 지켜본 건 단순히 그들의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경기가 우리도 그들처럼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매개체였기 때문이었다.
박찬호의 경우 특유의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도 인기에 한몫했다. 전성기의 박찬호는 커맨드를 바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투수는 아니었다. 경기 중간중간 제구 난조로 흔들리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는 투수였는데, 본인이 좌초한 위기를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모습에서 엄청난 짜릿함과 통쾌함을 준 것도 사실이다.
어린 시절 TV로만 보았던 다저스타디움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노라니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선명해졌다. 90년대 박찬호가 뛰던 시절의 다저스는 지금의 다저스처럼 지구 우승을 밥먹듯이 하고 내셔널리그를 대표하여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 그런 팀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때가 그리운 건 아마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