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필리스 vs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9.08.20)
메이저리그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한 데 모여 각축전을 펼치는 무대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다른 스타일과 매력으로 팬들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은다. 투수들도 마찬가지다. 불같은 강속구와 공의 힘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스타일의 투수가 있는가 하면, 공은 빠르지 않지만 칼 같은 제구력으로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찔러 타자들을 요리하는 스타일의 투수도 있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렉 매덕스는 두 유형의 투수들 중 후자의 대명사격 투수였다. 'Master'라는 칭호가 그에게 따라붙을 만큼 그의 투구는 단순한 투구 이상의 예술작품이었다. '제구형 투수', '완투형 투수' 그렉 매덕스의 계보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투수가 로이 할러데이와 클리프 리였다. 두 투수는 국내 팬들 사이에서 각각 할교수, 리선생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두 투수가 명강의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투구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2009년 필라델피아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운 좋게도 클리프 리 선생의 명강의를 들어볼 수 있었다. 200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22승 3패, 2.54의 평균 자책점으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쥐었던 클리프 리는 2009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어 내셔널리그로 무대를 옮겼다. 벤 프란시스코, 카를로스 카라스코 등이 포함된 2:4 대형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 이후 클리프 리의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트레이드 이후 첫 경기였던 샌프란시스코 원정에서 9이닝 1실점의 완투승을 거둔 클리프 리는 홈팬들 앞에 첫 선을 보인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서도 7이닝 1실점 승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음 경기에서도 클리프 리의 기세는 식을 줄을 몰랐다. 리글리필드 원정에서 투구수 122개의 역투를 펼치며 8이닝 1실점 승리를 거둔 것. 트레이드 이후 3연승이자 트레이드 전까지 포함하면 6연승의 신바람이었다.
그리고 직관했던 8월 20일(한국시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홈경기. 일찌감치 경기장의 모든 표가 매진된 그날 경기에서 클리프 리는 또 한 번 만원 관중 앞에서 명강의를 펼쳤다. 듣던 대로 특유의 커맨드를 바탕으로 안정감이 넘치는 투구였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공략하는 공격적인 투구 앞에 애리조나 타선은 맥을 추리지 못했다.
그날 경기에서 클리프 리는 볼넷 없이 안타만 2개 허용하며 경기를 끝까지 책임졌다. 9이닝 1실점의 완투승. 1실점도 3루수 실책으로 비롯된 비자책점이었는데, 그 실점이 아니었다면 완봉승도 바라볼 수 있었다. 투구수는 이닝당 12개가 채 되지 않은 106개였고, 그중 스트라이크가 81개(76.4%) 일정도로 공격적인 투구의 진수였다. 삼진은 무려 11개. 홈팬들을 열광케 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꺾일 줄 모르고 치솟던 클리프 리의 기세는 다음 등판이었던 뉴욕 메츠와의 원정경기에서 7이닝 2실점의 승리로 8연승을 기록하고 나서야 한 풀 꺾였다. 8월 말부터는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생애 처음으로 나선 그해 포스트시즌 무대에서는 월드시리즈 1차전 완투승 포함 두 번의 완투승을 거두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비록 소속팀 필리스를 월드시리즈 정상으로는 이끌지 못했지만, 2승 4패로 끝난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2승을 홀로 거두며 고군분투했다. 데뷔 이후 첫 포스트시즌 무대에 나선 클리프 리에게는 월드시리즈 준우승도 충분히 값진 성과.
지금은 은퇴한 클리프 리 선생의 투구를 아직도 가끔씩 찾아보곤 한다. 선발과 불펜의 분업이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현대 야구에서 완투형 투수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트렌드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지만 다시 예전처럼 완투형 투수가 득세하는 시절이 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다소 올드스쿨인 성향인 내게는 더욱 클리프 리 선생의 명강의를 수강하던 시절이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