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 vs 시카고 컵스 (2013.08.27)
인생을 살아가면서 타이밍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야구 역시 1회부터 9회까지 서로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스포츠다. 타자의 입장에서 같은 공이라 하더라도 기다리던 타이밍이냐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진다. 기다리던 공이었다면 담장 밖을 넘겼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허를 찔렸다면 삼진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우승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시즌이 있는 반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리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꼬이는 시즌도 있다. 전자의 팀을 흔히 우승의 적기를 맞이했다고 표현하는데, 그 타이밍에 우승을 놓치면 한동안 암흑기를 겪기도 한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201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후 아직까지 창단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LA 다저스도 2017, 2018 2년 연속 월드시리즈 패배 이후 지난 2019시즌에는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의 쓴맛을 봤다. 물론 2014년 월드시리즈 패배를 딛고 바로 다음 해인 2015년에 정상에 오른 캔자스시티 로열스 같은 팀도 있다.
다저스 팬 입장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치팅 논란으로 얼룩진 2017시즌만큼이나 아쉬운 시즌이 2013시즌이다. 시즌 초반 지구 최하위에 위치하는 등 위기를 극복하고 엄청난 반전 스토리를 쓰며 지구 우승까지 차지했던 바로 그 시즌이다. 그 과정에서 50경기 42승 8패라는 프로스포츠에서 말도 안 되는 승리 기록을 쌓기도 했다. 커쇼-그레인키-류현진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선발진이 가동된 첫 해였으며 타선에서는 푸이그가 혜성처럼 등장해 힘을 보탰다.
2013시즌이 더욱 아쉬웠던 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NLCS 1차전 어느 한 장면 때문이다. 바로 1회 초 첫 타석에 나선 헨리 라미레즈가 카디널스 선발 조 켈리의 공에 맞아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 몸에 맞는 공 하나가 시리즈의 향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NLDS에서 16타수 8안타로 맹활약하며 팀을 NLCS로 견인했던 라미레즈는 부상에도 출전을 강행했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라미레즈가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자 다저스 타선 전체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결국 다저스는 2승 4패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푸이그의 화려한 데뷔에 가려지긴 했지만 헨리 라미레즈 역시 엄청난 타격감으로 2013년 다저스의 반전 스토리를 이끌었다. 그가 출전한 경기의 팀 승패만 보더라도 확연하게 그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라미레즈가 출전한 86경기에서 다저스는 55승 31패를 거뒀는데, 부상 등으로 라미레즈가 출전하지 못한 경기에서는 37승 39패로 5할 승률도 올리지 못했다.
라미레즈는 부상으로 5월까지 제대로 뛰지 못했지만 6월에 타율 .375, 7월에는 3할6푼5리의 월간 타율을 기록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8월에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8월 마지막 주에만 2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다시 한번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8월 말에 터뜨린 2개의 홈런을 모두 직관했는데 특히나 8월 27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홈런이 인상 깊었다.
팀이 4:0으로 앞선 7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컵스 두 번째 투수 카를로스 비야누에바를 상대한 라미레즈는 특유의 빠른 배트 스피드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까마득한 타구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라미레즈가 잔뜩 노리고 있던 타이밍에 기다리던 공이 들어왔던 상황이라 짐작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완벽한 스윙과 총알 같은 타구가 나올 수가 없다.
타구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옆에 앉아서 경기를 보고 있던 현지 다저스 팬이 '방금 홈런 친 게 누구야?'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승부에 결정적인, 극적인 홈런은 아니었지만 홈런 스윙과 빠른 타구 속도 자체에 감탄했던 라미레즈의 타석이었다.
2013년, 라미레즈는 시즌 절반 가까이를 결장했음에도 타율 .345, 20홈런 57타점의 훌륭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6년 NL 신인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한 라미레즈의 천부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뽐낸 시즌이었다. 만약 2013 NLCS 1차전에서 라미레즈가 몸에 공을 맞지 않았다면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무대로 이끌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