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텔 조식 먹다가 만난 메이저리거

2014 NLDS 4차전 (2014.10.08)

by clayton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2014년, 당시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경기를 위해 세인트루이스 원정 중이었던 다저스 선수단과 같은 호텔에 묵은 까닭으로 평생 해보지 못할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웃통을 벗고 나온 야시엘 푸이그와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가 하면, 2003년 월드시리즈 MVP에 빛나는 조시 베켓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한술 더 떠 다저스의 상징 클레이튼 커쇼와 그의 아내 앨런 커쇼와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했다.


신혼여행지였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생애 첫 MLB 포스트시즌 경기를 직관한 다음 날 아침에도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은 계속 이어졌다. 응원팀인 다저스 패배의 아픔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자 아침 일찍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와이프와 함께 방을 나섰다. 먹을거리를 접시에 잔뜩 담은 후 자리에 돌아와 와이프와 도란도란 조식을 즐기고 있던 찰나. 매우 익숙한 얼굴이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풍채만 보아도 운동선수임을 짐작케 할 만큼 우람한 체격에 푸근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겸비한 그 사람. 분명 다저스 선수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시 다저스의 주전 포수였던 AJ 앨리스였다.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키워드는 바로 클레이튼 커쇼의 '단짝'이다. 커쇼가 생애 첫 사이영상을 수상한 바로 다음 해인 2012년부터 앨리스가 다저스의 주전 포수로 자리매김한 까닭에 커쇼의 전성기를 오롯이 같이 보내며 궤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앨리스의 안정감 있는 투수 리드와 수비로 인해 커쇼의 투구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커쇼의 통산 성적이 이를 증명한다. 그 어떤 포수 보다도 많은 경기(118경기)를 앨리스와 함께 했으며, 함께 배터리 호흡을 맞춘 경기에서 거둔 1.97의 평균자책점 또한 압도적이다. 2014년 커쇼의 노히트 경기 또한 커쇼와 앨리스가 함께 만든 작품이었다.


나머지 하나의 키워드는 '대기만성'이다. 2003년 드래프트 18라운드에 다저스에 지명될 정도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던 앨리스는 2008년에서야 스물일곱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난 2012년에 늦깎이 주전 포수로 도약했다. 비슷한 시기에 다저스에는 러셀 마틴이라는 훌륭한 포수가 있었기에 쉽사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렵사리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앨리스는 2012년, 안정감 있는 수비와 함께 타율 .270, 13홈런 52타점이라는 기대 이상의 타격까지 선보이며 기나긴 마이너리그 생활의 한풀이를 제대로 했다.


비록 2014 정규시즌에서의 타격 성적은 볼품없었지만, 세인트루이스와의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경기에서만큼은 정규시즌과 다른 모습이었다. 1차전에서만 홈런 1개 포함 안타 4개를 몰아쳤고, 나머지 3경기에서도 모두 두 번 이상 출루하며 상위타선에 기회를 제공했다. 다저스의 시리즈 패배로 빛이 바래긴 했으나, 승패가 뒤바뀌었다면 디비전시리즈 MVP도 충분히 노려볼만한 빼어난 성적이었다.


워낙 MLB 데뷔가 늦었던 탓에 앨리스의 전성기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다저스가 2015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주전 포수로 야스마니 그랜달을 영입한 이후 앨리스의 팀 내 입지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윽고 2016시즌 중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며 단짝 커쇼와도 눈물겨운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는 이듬해 마이애미 말린스, 그다음 해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적을 옮겨 한 시즌을 소화한 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길지 않은 메이저리그 경력에도 아직까지 앨리스를 기억하는 건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그 날의 경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담금질 끝에 마침내 짧지만 빛나는 시절을 맞이했던 앨리스의 대기만성 스토리 때문에 오랫동안 그를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듯 주어진 자리에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오지 않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