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찬 공허의 종합
인간은 살아가며 가치관을 세우고 신념을 가지며 수많은 생각을 한다. 세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며 나와 대상의 의미, 그리고 가치를 정립해 나간다. 이는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름난 철학자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전부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허무주의로 살다 가는 인간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은 향후의 예측 불가능성 등으로 인간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유발하므로 자신의 의미와 사물의 의미, 그리고 가치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런 무수한 시도들이 전부 성공한 것은 아니다. 각자가 각자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또 역사적인 철학자들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과 답을 제시하였지만 이것들은 과연 본질적인 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플라톤이 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이데아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실체라고 주장한 것이나 아퀴나스의 영원법, 데카르트의 합리론 등은 이미 과하게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기에 현대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경험적인 것만이 진리일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경험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상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이때 이 경험은 그 자체로 실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어떤 식으로든 추상적으로 변환된다. 우리의 기억이나 언어와 같은 것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인 진리를 현상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경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관찰한 결과를 그대로 우리의 감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므로 이 역시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딸기는 빨간색이다라는 문장에서 빨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 이상 이 문장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딸기는 현상 그 자체로는 여전히 빨간색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는 경험적이지 않은 사실 역시 같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같은 단어를 두고도 각 철학자가 자신의 정의를 사용하거나 우리 현실상에서도 서로의 생각이 충돌할 뿐 서로를 반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단어와 정의의 연결이 필연적이지 않고 정의 자체 역시 당연하지 않기에 각자가 선언과 전제를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마땅한 도리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에서 수많은 답이 나올 수는 있으나 각각의 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대의 답보다 자신의 답이 더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굉장히 힘들 것이다. 도리의 정의가 각자 다르지만 각 정의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으며 도리라고 하는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가는 추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에 대해 논의하고자 할 때는 반박이 불가능해 평행선만 달리게 하는 알 수 없는 것들은 배제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것들을 논쟁의 장으로 들여오면 끝나지 않는 의미 없는 싸움만 계속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통해 모르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부분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말한 뒤 이 정의에 따라 현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현상을 관찰하고 이 현상을 정의해야 한다.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을 언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엄밀히 자각한 뒤 원래 모르고 있던 것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속성이나 부분을 논리를 사용해 도출할 수 있다. 빨간색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색들을 관찰한 후 특정 빛의 파장이 나타내는 색을 빨간색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것이 없이 보았을 때 눈이 아픈 것이 빨간색이다, 정열을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 빨간색이다 등으로 논의를 시작하면 순서가 바뀐 것이다. 물론 여전히 빨간색의 본질 자체는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사회적인 약속 또는 개인의 생각일 뿐 불변하고 절대적인 진리로써 빨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지를 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를 이와 같은 것으로 한다면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아래에서도 보았을 때 다시 끝나지 않는 영원한 논쟁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념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관점은 근거가 없으며 본유한다는 관점 역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본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도 이미 알 수 있는 지식이라는 말인데 이는 앞서 말한 현상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는 방법론에 배치되는 것이다. 또 이러한 관념이 진실로 본유하는 것이라면 별다른 교육 없이도 이러한 관념을 인간이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이 가지는 수많은 관념들을 볼 때 무엇이 이성이 당연히 알 수 있는 지식인지에 대한 메타적 기준이 없으며 인간으로부터 교육을 받지 못한 특수한 사례들을 볼 때 그러한 관념이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본유관념에 대한 주장은 그것을 반박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이성이 제대로 된 지식을 찾지 못한 것이라던지 특정 문화가 이성의 빛을 가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반박 자체를 차단하므로 반증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이는 본유 관념이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폐쇄적인 개념임을 드러낸다. 또한 그렇게 나타난 지식은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지식이므로 그 지식을 현상적인 것으로 해석해 정의를 한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그 정의의 자의성으로 인해 지식의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울 것이다. 본유관념이라고 생각된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보편적인 이성의 지식이 아닌 각자만의 개인적 생각일 수 있으므로 그 지식을 정당화할 합당한 근거가 있다고도 볼 수 없다. 결국 어떠한 관념이 우리의 이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본유한다는 주장은 증명할 수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외부적인 것에서 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 인간에게 받아들여진 경험적인 것은 이미 추상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었으므로 순수한 형태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순수 경험, 즉 현상이지 추상된 지식이 아니므로 — 이때 현상은 인간이 추상으로 변환된 경험적 지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 인간이 본질적 지식을 이야기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이다. 즉 어떠한 경험이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언어인데, 이때 현상인 기의와 이를 나타내는 기표 간의 필연적 연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발화할 수 있는 것은 기표뿐이므로 만일 인간이 기표에 매몰되어 독단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이 실제 현상의 존재를 담보하지 못하므로 결국 연결되는 기의가 존재하지 않아 공허하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기표에 기의를 종속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하며 현상, 즉 기의가 될 것에 기표를 종속시킨다. 그리고 이 기표가 자의적일 수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하여 그 너머의 기의와 현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현상밖에는 얻을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해되 이것의 정의가 기의를 넘어서지 않게 현상 그 자체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상의 공허함
현상이란 존재하는 실재, 즉 세계 자체를 통칭한다.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사물과 우리 자신, 그리고 수학적 공리나 과학 법칙, 논리적 인과와 같이 언뜻 추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이때 현상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정의 역시 독단적인가, 기표와 기의의 연결이 자의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그렇다. 임의적인 것에 정의라는 결정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 독단이 아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슨 모든 언어는 독단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는 문제 되지 않는다. 언어의 사용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필자가 경계하는 독단은 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드시 지양해야 할 독단은 순수 경험에 대응되지 못하는 공허한 정의와 사유이다. 필자는 현상을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순수 경험에 존재한다. 이때 어떠한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은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현상, 즉 순수 경험을 관찰하여 그것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는 독단일지라도 그 과정은 독단적이지 않은, 이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필자가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독자가 이를 필자의 독단적 현상 정의에 의하여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현상이 의미하는 순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궁극적 언어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상을 관찰하여 존재하는 것을 알고, 이 존재하는 것에 현상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모순이고 순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현상은 순수 경험을 뒤의 현상은 정의된 의미를 뜻하지만 현상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점에서 이미 순수 경험을 의미하고자 하는 의도는 실패하고 뒤의 현상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순수 경험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순수 경험 자체를 현상으로 정의한 뒤 이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우리가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에만 정의된 현상의 이름을 붙여줘야만 한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 너머에 어떠한 의미나 가치가 존재하는가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대상을 보더라도 그 이상의 경험적 지식은 들어오지 않으며 이것이 현상을 관찰한 결과이고, 이에 사물의 의미나 가치, 본질을 생각한다면 이는 온전히 인간이 스스로 기표를 떠올린 결과이다. 즉 사물의 본질적 존재 이우나 가치, 의미, 용도 등은 우리가 관찰하여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칼을 보자. 칼의 가치는 그것을 만든 대장장이에게는 소중한 것으로 정의되지만 그것을 사는 사람에게는 그저 수많은 칼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도, 살리는 것으로도, 심지어 찌르는 용도가 아닌 장식이나 화폐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그것의 용도를 생각하며 제작하더라도 결국 현상은 탄소가 적절히 섞인 철의 형태가 변하여 나무 막대기와 결합한 것이며 다만 사용할 때 베거나 찌르기 좋아 보일 뿐 그것이 만들어진 물체의 본질이나 내재된 의미라고는 볼 수 없다. 즉 우리가 관찰한 현상은 그저 날카로운 철과 나무가 결합한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의 현상적 지식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으므로 만약 칼을 보고 이외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때 나타난 기표는 현상을 대신하지 못하므로 본질적 지식이 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사물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관찰되는 것은 원자의 집합체 하나하나이지 본질적인 칼이 아니다. 그 어떠한 관찰된 결과도 칼이라는 보편자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즉 무수한 개별자가 관찰되고 이것이 현상 그 자체이며 순수 경험이다. 그러나 이 개별자 하나하나에 기표를 대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간은 적당히 비슷한 성질의 것들을 묶어 종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현실적 어려움에 기인한 임의적 정의이므로 본질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같은 종류로 구분된 사물끼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물, 심지어 생물에게도 적용된다. 물체와 물체를 종류로써 구분하는 것 역시 인간의 임의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구분으로 나누어진 결과를 볼 때 두 물체는 확실히 달라 구분할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가치, 용도, 의미와 같이 전적으로 인간이 부여하는 특징은 이미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특성이 아니므로 궁극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과학적 특징같이 현상적으로 관찰되는 차이가 있더라도 이 차이들 중 어느 것을 취사선택하여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를 판단해 구분하는지는 역시 인간의 몫이므로 여전히 수많은 개별자가 존재할 뿐 이를 기준을 세워 구분 짓는 것이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책상과 칼이 있을 때 우리가 관찰 가능한 것은 나무로 된 물체와 철로 된 물체가 각각 저기 놓여있다는 것일 뿐 책상과 칼이라는 보편자를 상정하는 것은 현상에 그대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일 뿐 그것의 궁극적 표상이나 가치가 아니므로 구분하는 것, 종류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편리하지만 임의적인 도구이다. 또한 이는 생물의 구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물 역시 자손의 번식 가능성, 유전자 등을 통해 구분하며 이는 과학적임 것이지만 여전히 종류로써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실체적인 이데아의 모방으로써 개별 개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기준으로 개별 개체의 집합을 정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나 학자에 따른 구분의 자의성이 결국 이는 본질적인 것이나 현상 자체가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즉 현상은 우리에게 개별 개체와 개별 속성을 보여줄 뿐 어떤 같음과 다름을 묶고 분류할지의 기준은 제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실제로 우리의 감관으로 알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하는 현상에는 이러한 물리적 현상이 아닌 그 질서에 대한 구조적 현상 역시 포함한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수학, 논리, 과학 법칙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물체가 같은 위치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나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것, 지구에서 물체가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 등은 분명히 관찰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닌 인간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현상의 구조적 질서를 구성하는 원리이므로 이 역시 현상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형이상학적 실체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라는 연산자나 모순율이라는 법칙이 추상적 이데아와 같이 실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형식적 관계과 구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1이라는 추상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상이라는 상태에 인간이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백지상태의 인간이 수학과 논리를 귀납적이고 경험적 관찰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먼저 백지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은 자연 상태의 인간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상상의 산물이며 이는 인간이 반드시 지식을 경험적으로만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있는 독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 현상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수학적, 논리적 직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 역시 순수 경험으로써 현상의 일부이므로 이름을 붙이기 이전 현상의 표상이 인간의 정신 안에 나타날 때 이미 이러한 법칙들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의 정신이 재연하는 현상은 현상 그 자체가 아니지만 인간의 정신 자체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현상의 법칙과 다른 표상이 정신에 나타날 수는 없다. 즉 정신 안에 지식이 선험적으로 들어가 있거나 정신이 지식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정신이 이미 그 자체로 현상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이므로 그 안에 나타나는 표상 역시 현상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만 이후에 우리가 기호를 붙인 것은 경험의 산물이다. 이 직관과 표상은 순수 경험이 인간 정신 안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므로 이 자체를 인간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하다. 이에 언어를 만들고 기호와 논리학을 만들어 현상을 우리가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비록 1+1이 2라는 지식이 이미 들어있지는 않기에 태어나자마자 이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표상이 우리 정신 자체에 나타나고 이 표상에 1과 +, 2라는 기호를 붙여 정제해 주면 비로소 이해하기 쉬운 식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나아가 복소수나 비유클리드 기하학,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학 법칙 역시, 정신은 이미 현상을 따르고 있으나 이 표상을 우리가 언어적으로 최대한 표현하거나 아직 표현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와 같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현상이 존재한다 그 이상이 되지 못하며 모든 의미와 구분, 가치는 전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임의적으로 내린 우연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물의 용도나 가치는 반드시 그러할 필요가 없으며 구분 역시 인간에 선행하는 것이 아닌 후행되는 것이고, 언뜻 추상적으로 보이며 이성의 산물이라고 여겨졌던 지식들 역시 '산물'이 아닌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물은 이성이 선행하여 만들어낸 결과가 지식이라는 뜻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들이 관찰의 결과가 아닌 상상의 '산물'인 이유는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은 인간 안에 내재된 것이며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오감각적 자극인에 반해, 그러한 구분과 의미, 가치는 사물에 내재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듯 인지된 존재 이외의 추상적 개념이 오감에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 모든 한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인간 자체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가 외부 대상의 상태를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적 지각 작용의 선험성에 대하여는 알 수 있으므로 — 경험을 받아들이려면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기에 — 결국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이 감관으로 받아들인 감각정보를 바탕으로 구상한 관념뿐인 것이다. 다만 극단적 관념론 및 유아론과 구분해야 할 것은 내적 지각 작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이 변화가 의미를 갖기 위하여 차이로써 불변의 외부 현상이 필요하다. 또한 이 내적 지각 작용은 타인이 관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것이므로, 타인이 보았을 때 나는 또한 불변하는 타자가 된다. 나아가 이렇게 보았을 때 인간의 정신이 한 것은 관찰한 순수 경험의 표상에 관념과 구분, 가치 등을 덧씌운 것일 뿐이므로 더욱더 이와 구분된다.
우리가 인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탄소와 산소 등의 원자로 이루어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포유류 종이 진화를 통해 지구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인지되는 전부이다. 이 이상의 인간의 권리나 존엄성 등의 가치가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은 찾을 수 없으며 인간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 인간에게 그러한 가치가 있어야만 하는 당위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로부터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실천적 당위 명제가 나올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세울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자유롭다. 또한 인간은 존재할 뿐인 어떠한 사물에 자신의 소유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현상적으로는 존재할 뿐인 대상을 귀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자유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의지를 갖는 것이 아닌 의지를 갖는 것을 보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소유는 인간의 또 다른 임의적 의미부여이지 현상이 아니므로 이 역시 당위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로부터 그것의 존엄성이나 생명의 소중함, 소명과 삶의 이유 등을 이끌어낼 인과를 찾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것들을 현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즉 위에서 사물과 구분, 수학과 논리에서 의미와 가치의 부여는 현상적인 것이 아닌 실재적 현상에 대한 인간의 임의적 의미부여라는 점을 인간에게는 예외로 할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현상적 도덕론
이러한 이유로 추상적인 개념을 정의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인지, 현상 안의 존재자인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 역시 물질적 실체가 아닌 추상적 개념이므로, 현상적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이 인간과 무관하게 실재하는 현상적 구조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즉 현상에 이미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를 원리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에 인간이 도덕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면 도덕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실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도덕이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 의지로 규정된 가변적인 성질의 것이라면 이는 객관적 사실로써 현상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인간이 창조해 낸 개념이므로 현상적으로 공허해진다. 이때 인간의 이성이 도덕을 현상 안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을 정의하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의지로 어떠한 것이 옳은가를 직접 규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도덕이라는 단어를 직접 정의하며 여러 속성을 귀속시킨 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명제들을 도덕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언뜻 보면 단순히 독단적이며 우리가 지양해야 할 태도로 보이지만 실상 이미 역사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러한 도덕은 항상 이를 보좌해 주는 단어가 있다. 바로 마땅히, 당위적으로, 인간이라면…이라는, 그러나 도덕은 호위해 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지켜내지 못한 수식어들이다. 의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기력한 욕망적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어떠한 것을 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때 발현된 것은 현상의 구조 아래에서의 귀납적 사례들 중 하나나 스스로의 정의를 현상적으로 보편타당하게 만들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아니다. 오직 의지를 사용해 자기 안의 추상적 도덕관념의 정의를 세운 것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타인이 관찰하지 못하며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해 전달하더라도 도덕법칙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상대의 의지가 이를 받아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 중 하나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아닌 이상 자기 내면의 추상적 관념을 우주적 법칙으로 창조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의 방식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개인과 문화에서 실제로 도덕이 이러한 방식으로 정해졌든 아니든, 그 도덕을 향유하는 개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도덕을 받아들이고 있다. 단지 이는 현상적인 이유가 아니며 설사 옳더라도 이는 우연히 참이고, 영원히 타인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가치판단이 아닌 사실판단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적절해 보이는 현상의 구조에 도덕을 명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이 하는 보편적인 것인 것이 되었을 때 나의 행동은 정당화되는가를 검증하여 도출된 명제를 도덕으로 정의한다. 또한 개별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감정을 도덕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그 철학자가 현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목적론 적 삶,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을 보아 이성에 따른 행복이나 자연법 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물론 이들은 첫 번째 방식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으나, 요지는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 도덕을 정의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보편화 가능성 테스트에서 보편성과 당위성을 전제하는 것은 첫 번째 방식의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아 보편화 가능성 테스트에서 도출된 명제를 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두 번째 방식의 것이다. 이는 신발은 오른쪽부터 신어야 한다는 명제가 과연 도덕적인가 도덕적이지 아는가 — 그러한 명제가 논리적으로 도출되므로 현상의 구조에 입각한 것은 맞기에 첫 번째 방식의 것은 아니다. — 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두 번째 방식의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나아가 여러 많은 도덕론은 이 두 가지 방식이 혼재되어있기는 하지만 감정과 주관을 도덕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 두 번째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도덕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아 현상적인 것에 도덕을 명명하고자 하면서도 그 명명의 행위 자체는 여전히 의지를 사용한 자의적인 것이기에 명명되어 언어화된 도덕은 정신 안에서의 명명된 도덕이라는 추상의 외적 발현이 되어 또다시 타인에게는 현상적 구조로써의 법칙이 아닌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가 된다. 즉 이렇게 보았을 때 도덕을 현상적 구조에 명명하는 두 번째 방식은 그 자체로 추상화된 기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의지의 개입을 면할 수 없다. 이때 도덕은 비록 현상의 외피를 입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의지가 덧씌운 명칭일 뿐이며 이 명칭은 타인에게 공통된 현상 구조로 인식되지 않는다. 의지를 사용해 형성된 기의이자 관념은 인간 정신 안에 있으므로 타인에게 이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며 전달된 기표는 타인은 영원히 볼 수 없는 이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이는 또 하나의 가능성일 뿐 필연성이나 실체성을 지니는 도덕 명제가 되지 못한다.
*정신의 존재와 그 행위의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 현상적인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생물의 사고 구조로써 뇌과학과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충분히 검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형성된 관념은 전적으로 개인 안에 있으며 개인이 발화한 기표의 기의는 청자가 아닌 화자에게 있으므로 청자에게 이 기표는 청자가 스스로 관념을 만들지 않는 이상 관찰된 현상에 기반하지 않아 공허하다. 그리고 청자가 스스로 관념을 만들어 이를 해결하더라도 이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때 잠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필자는 위의 두 방식을 비판할 의도가 전혀 없다. 두 방식 자체에 어떠한 모순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현상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으며 이로부터 어떠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 애초에 인간 역시 현상의 일부이므로 인간의 행위 역시 현상적인 것이기 때문이기에 이는 가치판단이 아닌 사실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러한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은 개인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은 보장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도덕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적 답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유념하길 바란다고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의지의 층위에서 보편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한다. 인간이 메타 기준을 세워 자신과 타인의 의지를 질적으로 비교하고자 하더라도 이 메타 기준이 자신의 의지로 세운 기준인지 객관적 기준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직접 의지로 규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상을 명명하는 것 역시 자의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현상이 도덕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여전히 이미 정해져 있는 현상 안의 내재된 의미를 갈구하여 인간이 이를 발견할 수 있으리란 희망에서 비롯된 강박이다. 앞서 바라본 두 방식에서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겨지고 현실 안에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현상적으로 보편적이고 당위적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관점은 현실 상의 사실과 괴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정말로 모든 도덕이 단순한 의지의 선택으로 환원된다면 당장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보편 윤리나 인권과 같은 개념은 어떤 연유로 탄생하였으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이러한 개념을 실제로 잘 시행하든 그렇지 않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개개인 역시 이에 동의한다. 이러한 개념은 실제로 세계에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역시 의지로 환원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도덕은 개별 원자적 개인의 자의적 선택이라기보다 거대한 사회적, 윤리적 담론과 같이 환원보다는 거시적이고 집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느냐, 개별 개인의 자의적 선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보편적이고 너무 거대하므로 모든 것을 해체한 앞서 바라본 관점에서 조망하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겠느냐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개별 인간 개체의 기저에는 잠재적이며 단지 존재할 뿐인 욕망적 상태가 있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은 정적이며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이 욕망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행동이 발현될 때 인간은 의지를 사용하지만 의지는 단순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아니며 욕망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때 욕망은 수많은 잠재태로써 존재하고, 그중 일부를 인간의 의지로 선택하여 외부로 이행되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지는 이성적으로 사고한 결과를 행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힘까지 포함한다. 욕망은 ’하고 싶다’로 표현되는데 이는 이후의 실현에 대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으므로 외부로 나타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동은 의지이며 의지는 욕망이나 이성 등, 단순히 정신 안에 존재할 뿐이었던 상태의 외적 발현을 뜻한다. 이때 의지와 욕망을 구분하였다고 하여 의지를 단순히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필자가 ‘할 수는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때 이는 대개 언어의 자의성에 의하여 불가한 것은 아니나 이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의지를 이성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형이상학적인 정의이자 사변으로, 교조적인 정의이다. 바깥으로 드러난 의지의 기저에 욕망이 있는지, 이성이 있는지, 또는 동기나 의식 아래의 무의식 등, 다른 무엇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단지 그가 자신 내면세계에 있던 가능성을 외부로 발현하는 의지를 시행하였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인간의 행동을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직접적인 의지의 발현과 행동규칙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의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1차적 힘이다. 이때 의지는 내면세계에서 단지 존재하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욕망과는 현실 상에서 관찰가능한 현상이므로 이로부터 행동 규칙이 파생된다. 인간이 한 번에 서로 다른 행동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 논리적 규칙에 따라 당위적인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즉 하나를 선택하면 반드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기회비용의 원리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과 폭식하고자 하는 욕망이 단순히 내면 안에 존재할 때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그러한 욕망의 경향성으로 언젠가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굉장히 불확실하고 가능성이 열려있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 두 욕망이 의지로 발현된다면 이 의지들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식을 한다면 건강 상의 문제로 인해 결국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실패하며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당위성은 어떠한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닌 지극히 당연한 현상의 논리적 필연성이 당위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며 의지는 현실 상에서 구체화되는 힘임에도 이것이 실패하게 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행동이 의지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볼 수 있으나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지임과 동시에 행동규칙인 행동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각각의 의지에서 수많은 행동 규칙들이 파생되며 이 행동 규칙들은 서로 각자의 주인인 의지에 제약을 가한다. 이와 같이 의지와 행동규칙이 유기적으로 엮여 나타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예를 들어 먹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먹을 때 이는 의지의 발현 자체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 또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 등의 행동규칙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더 깊이 보아 이 행위를 반드시 해야 하는 성질의 당위로 볼 수도 있지만 제약을 설정해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성질의 당위로 볼 수도 있다. 먹지 않으면 죽을 것이며 너무 많이 먹으면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앞 문단처럼 인간의 행동을 두 의지의 격돌과 이분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의지를 가질 때마다, 그 수많은 의지들의 행동규칙을 준수해 적절히 어떤 의지는 선택하고 어떤 의지는 포기하며 그 강도를 조절한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 양식의 기본 구조를 나타낸 것이며 만약 자연 상태의 인간을 상정한다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관점이 어떻게 그 거시적인 사회와 담론들을 설명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나의 반박을 이렇게 미리 예상할 것이다. 그렇게 거대해 보이는 것 역시 결국 개인들이 모인 것으로, 또는 개인 간의 합의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여전히 개인으로 환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자율성은 보존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는 지나친 환원주의이며 개인은 무제한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언어나 사회의 구조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는 순수한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하지 못하며 수천 년간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 발견과 합의 역시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어떠한 인간이 나는 존엄하다고 선언한다면 이는 독자적으로 창조해 낸 의미가 아닌 역사 속에서 창발 된 인류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실존주의적 관점은 이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반박되며, 또한 의지와 행동규칙이라는 구조주의적 설명 역시 역사적 투쟁과 철학적 담론을 거세한 너무 기능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정태적이다. 나아가 진화학적인 관점으로도 인간은 사회를 이루려는 습성이 있으며 이로부터 필자의 관점 역시 칸트적 자유와 같이 이성중심적이라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
이러한 비판들의 내용은 전부 타당하다. 글의 목적이 현실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텅 빈 뼈대와 같은 규칙만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현상적 도덕론에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보았다면 실천적 도덕론에서는 그 주목해야 할 점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상의 구조를 벗어나지 않으며 앞서 본 비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상적 도덕론이 이 목적에서 지나친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타당함과 동시에 환원이 ‘지나친’이라는 수식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실천적 도덕론
비판에서 언급하는 역사, 철학, 담론과 같은 것들은 전부 경험적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으로 선험적인 지식이 발견되거나 후험적인 지식이 구성되는데, 전자가 현상, 후자가 의미이다. 이때 표면 상에 떠오른 경험적 지식은 근본적인 법칙이 되지 못한다. 하나하나의 사건에는 전부 개별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며 이렇게 가변적이고 무수한 변수들을 전부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 각각의 사건 하나에 대한 정보만 알려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 원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인간이 안고 가야 할 필연적인 한계로 마무리될 뿐이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경험 이전의 구조와 법칙은 존재한다. 즉 현상적 도덕론은 실천적 도덕론의 골격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즉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삼단 논법은 현상과 실천이 전부 들어맞는 예시이다. 그리고 만약 실천의 비판이 제기한 대로 현상만을 고집한다면 매개념을 고양이로 바꾸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엄연히 틀린 것이므로 명제는 의미를 잃는다. 이 안에는 분명 논리의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세 명제가 아무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대전제와 소전제, 결론이라는 관계로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는 경험 이전에 주어진 구조일 뿐, 경험에 대한 지식은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실재하나 공허하다. 반면 이러한 구조를 무시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실들은 전부 독립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경험론자가 아닌 이상 그리 많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러므로 다시 돌아와 의지와 행동 규칙의 구조는 그것이 너무 미시적이며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수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왜냐하면 그 목표는 사변적인 논리 구조를 구경시켜 주는 것이 아닌 현실 안에서 인간의 행동 양식과 도덕에 대한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는 아무런 의미와 현실의 설명을 담지 못하기에 그 내용은 경험으로 채워져야만 하고, 이에 그것의 역할은 도덕의 근본을 불변하는 현상적 논리로 고정시켜 주는 것에 한정된다. 어떠한 의지를 갖는지는 현실 안에서 인간이 의지를 가지기로 결심했을 때 결정되며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행동 규칙은 무엇인지는 그 의지가 전제된 후 주변 환경과 이미 만들어진 본인의 성격, 가치관 등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논리적인 도덕을 찾고자 한다면 모든 경험 이전에 내재되어 있는 이 구조를 찾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실재하는 구조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도덕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논쟁 가능한 도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도덕에 대한 확실한 답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나 통용되는 법칙이지, 항상 반증 가능성이 남아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한 구조는 인류 역사에서 항상 존재했을 테지만, 그 경험은 끊임없이 달라졌다는 점을 통해 의지와 행동규칙이 계속해서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이러한 도덕을 허무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험에 대한 과한 불신이다. 이는 도덕의 포기가 아닌 도덕이 경험적 지식에 귀속됨에 따라 나타나는 경험적 지식의 특성에 기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틀을 이용해 주장과 반박이 가능한 장을 만들고 여기에 경험적이고 사후적인 근거를 가져와 그 시대나 상황에 알맞은 도덕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개인의 가치관을 탐색하고자 한다면 개인을 관찰해 드러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인생과 성격, 현재 처한 상황을 고려하고, 사회의 도덕을 찾고자 한다면 사회를 관찰하여 드러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그 사회 상태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현상과 그 안에 내재된 의지의 법칙을 상기하며 경험적 지식을 고려할 때 인간은 비로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