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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분열된 자아, 무의식의 꿈의 발현

- 데이비드 린치 영화세계Ⅱ.

분열된 자아, 무의식 속 꿈의 발현- 데이비드 린치 영화세계Ⅱ. 


분열된 자아, 무의식의 꿈의 발현

-데이비드 린치 Ⅲ.


 기술한 바대로 최근 영화『인 랜드 엠파이어』로 돌아온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일상의 표피적인 정상성에 가려진 자아의 정체 즉, 모든 이에게 내재된 악마성과 광기를 드러내는 플롯을 작품전반의 기본테마로 삼고 있다.

 하여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 그 속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게 좌절된 욕망과 상처로 절절 매거나(『엘리펀트 맨』,『광란의 사랑』,『트윈픽스』) 은밀한 비밀집단의 어둠에 시험 당하거나 추적하고(『사구』,『블루벨벳』,『이레이저 헤드』,『인 랜드 엠파이어』) 현실의 논리적 산술을 훌쩍 뛰어넘는 혼란스런 미스터리 퍼즐의 미로에 갇혀있다. 더욱이 이곳이 현실인지, 나는 무엇인지 분간해볼 수 없는 혼미한 상태에 빠져있다(『트윈픽스』,『로스트하이웨이』,『멀홀랜드 드라이브』,『인 랜드 엠파이어』).  이례적이라 할 만큼 절제미 가득한 담백한 화면으로 가족애라는 주제를 펼치고 있는 돌연변이 개체 같은 건전한 필모그래피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를 예외적 경우로 친다면 말이다. 이 영화는 때로는 린치를 ‘감각의 충격만을 유도하는 계산된 사기꾼’으로 매도하고 싶어지다가도 머뭇거리게 하는 휴머니즘적인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었던 까닭이다.  그의 영화들은 일종의 로드무비처럼 악몽의 탈출과 해답의 열쇠를 찾기 위해 끝없는 길 위에 놓여있는 이들의 도피행적을 보여주고는 한다(『광란의 사랑』, 『로스트 하이웨이』,『인 랜드 엠파이어』 ). 그런데 이처럼 도주의 영화 속 등장인문들이 도피하며 떠도는 공간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억압되어왔던 가장 내밀하고 낯선 의식의 진피 안의 4차원의 영화시공이다. 영화 속 등장 배경이란 곧 현실과 환상이 혼재되었기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공이 비비 꼬여있는 무의식 영역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분과 엔딩 씬이 동일한 경우가 많으며 영화의 종점은 늘 다시 원점으로 회귀돼 있는 것이다(『멀홀랜드 드라이브』, 『블루벨벳』, 『인 랜드 엠파이어』). 하여 ‘뫼비우스 띠를 돌고 있는’ 이들 영화 속 인물들에게 탈출에의 전망이나 해답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중자아, 다중시공. 가없이 분열하는 초자아

 이러한 전망의 부재라는 경향성은 린치의 후기 필모그래피로 갈수록 공고해졌다. 예를 들어 이 같은 '발진 직전의 염증 난 욕망으로 분열된 자아의 자멸’이라는 주제를, 가장 하드코어적인 어법으로 연출한 문제작은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Special Edition)(1997)일 것이다. 감독 필모그래피의 기본적인 양상과 색채는 유사하게 묶이지만 환각상태에서의 (상상)살인, 카메오로 출현하는 마를린 맨슨의 엽기적인 이미지, 거대 아메리카 포르노산업계의 어두운 이면 따위 음울한 소재에 'B급 컬트' 색채를 기본채도로 하는 『로스트 하이웨이』는 위험수위까지 다다랐다 할 섹슈얼리티와 최면성으로 B급 전위의 극단을 실험한다. 

 권태로운 일상을 살던 색소포니스트 프레디가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아내는 토막시체가 되어있다. 살인죄로 감방에 수감되어 해명되지 않는 진상에 골몰하며 지독한 두통을 호소하던 그는 어느 날 돌연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별개의 인물, 정비사 피트로 변신된다. 이제 영화의 새 주인공이 되어버린 피트는 출소 후 아내의 분신인 듯 아내와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으나 포르노업계 큰 손의 정부로 설정된 여인을 만나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양식으로 정열적인 연애를 하고 살인사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던 그는 영화 종반부에는 결국 다시 프레디로 돌아와 경찰의 추적에 쫓기고 있다.  영화의 이러한 비논리적인 서사는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너의 초대로 왔다'고 되뇌면서 프레디에게 찾아온 소름 끼치도록 묘묘한 저승사자 형상의 한 남자의 사주에 의해 진행된다. '프레디는 진정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던 것인지, 또 다른 자아였던 피트는 종국엔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인지?' 영화는 이러한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한 채 이 끔직한 악몽에서 탈출하려는 듯 끝없이 뻗어있는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첫 장면이 재연되는 미결의 순환구조로 그저 멈춰버렸다. 하지만 이런 투의 미해결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앞서의 상징적인 검은 존재란 실은 심약한 프레디의 의처증에 의한 강박적 환상 곧 무의식적 일탈과 폭력의 욕구로 발현된 내부의 악마, 죽음을 욕망하는 타나토스의 사신쯤이었던 것이리라는 뉘앙스를 던져둔다. 하여 적이란 내부에 있기에 이 세상 고해란 끝이 없는 것이라는 예언 또한 자연스레 주지시킨다. 

 이제 개봉된 『인 랜드 엠파이어』와는 근작이라는 시기상으로, 자아가 분열되어 정체가 역전된다는 『(2001)멀홀랜드 드라이브』설정과 영문을 알 수 없는 수난기를 통해 인생은 꿈과 같고 진실은 저 너머에 혹은 내부에 있다라고 하는 초연실적인 주제와 분위기 상에서 는『로스트 하이웨이』가 연상된다.『인 랜드 엠파이어』와 모든 면에서 가장 친밀한 접점을 공유하는 『(2001)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서는 두 여인이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한 기억상실의 상황에서 서로 이름이 뒤바뀐 채 동성애에 빠지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기묘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 경우도 결국 이러한 서사는 죄의식과 배신감에 상처받은 베티가 절망에 빠진 채 꾼 ‘욕망의 꿈’의 내용이었기에 빚어진 미스터리였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난해한 미스터리 미궁퍼즐이라 할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도 반복 변주되고 있는 ‘내부의 욕망에 의한 자아전도'라는 이 황당하고도 초현실적인 설정은 무료한 일상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병적인 불안을 정당화하고 증명해내고 싶은 심리적 방어기제가 창조해낸 또 다른 대리자아의 환상일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컬트의 신성’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지극히 정형화되어 있는 건전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의외의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감독의 이러한 모순된 삶의 양태와 영화 속 인물들의 자아역전이라는 설정은 낮에는 박봉의 보험회사의 성실한 법률고문관으로 밤에는 존재의 극단을 사유하던 독일 문호 프란츠 카프카의 실존주의 사상과 불안하고 위태한 삶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일면이 있다. 더불어 불가항력의 정체불명 힘에 의해 존재의 기저 자체가 전복되고 '원죄'를 처벌받는다는『변신』과『심판』의 테마 또한 연상된다. 이처럼 육체와 사유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듯 한 조용 일상 속의 감독(창조자)은 오랫동안 아메리칸 명상집단의 일파인 ‘초월명상’에 심취해 정통해 있다고 전해진다. 이미지의 극단을 물처럼 쫓아가는 ‘초월명상’의 현란한 스펙트럼을 통해서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며 명상 속 난무하는 이미지들로 굴절되고 증폭되어 재창조된 현실 즉, ‘만화경 속’ 혹은 '프리즘' 속 무의식 세계를 상상하는 데 천착하며 이를 스크린에 투영해놓고 있다. 

‘내 존재의 존재 이유와 본질에 관해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자각은 그 어떤 상황보다 두려운 최악의 완벽한 공포인자라 할 것이다(『엘리펀트 맨』,『사구』,『트윈픽스』,『멀홀랜드 드라이브』,『인 랜드 엠파이어』). 결국에는 이 고기토(gogito)의 화두로 수렴되는 간접적인 공포체험은 ‘진정한 나 자신은 무엇이며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원점부터 되묻도록 회유하며 데카르트 식의 존재론적 회의를 재고해보도록 한다. 

 붉은 커튼 너머 금기의 세계 -데이비드 린치 랜드를 비추는 환각영상 

잭슨 폴록, 플란 클라인, 프란시스 베이컨, 특히 에드워드 하퍼! 의 현대미술에 경도되어 한 때 화가 되기를 열망했고 표현주의 화풍의 회화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던 린치. 그의 미적 감각은 영화 속에서 각각 환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의 원색적 색채감과, 이 모든 비극을 흐드러진 노래로써 은유 하는 재즈 바의 신화적인 여인들에게서 최적으로 발휘된다. 원색의 현란하고 상징적인 색감을 기본으로 라디오 트랜지스터와 라지에이터 안의 환상공간을 들여다보고 전매특허 격인 붉은 커튼(『블루벨벳』,『트윈픽스』,『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의 변주)의 장막을 걷어내 감춰있던 또 다른 세계를 헤쳐 보이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인 이 붉은 방의 커튼이 젖혀지는 순간 관객들은 비로소 영화 서사의 그 모든 기막힌 비극의 근원지였던 신화적 금기의 공간, 그 곳의 충격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으로 표상되는 우울한 표정의 화상 입은 남자, 잘려진 귀, 난쟁이, 토끼가면, 괴기스러운 립싱크 무대, 동성애코드, 근친상간, 촌충처럼 꿈틀대는 기형아,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피부병에 걸려서는 토사물 위에서 루비구두 뒷굽을 치며 춤추는, 범죄의 나날 중 하늘 위로 떠오른 키치하면서도 순결한 오즈마법사 천사 따위의 엽기버전이 되어버린 뒤틀린 동화들……. 그 곳은 광기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다다른 뒤틀린 욕망의 용광로이자 허무에의 공포가 입을 벌리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라 할 만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영화는 평온한 일상에 잠재돼있는 광기를 현현시키며 그의 영화보기는 눈도 감지 않은 채 칼라 꿈을 꾸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표현주의 연극의 무대세트가 연상되는 린치 영화 속 커튼 뒤 추상적이고 상징성 가득한 초현실적인 영상이미지들은 색채심리, 범죄 심리, 바슐라르, 프로이드가 동원된 심리기제이자 환영으로 ‘해몽’ 가능한 텍스트가 된다. 영화 속 기이하고 느닷없는 모든 상황들이 결국 이와 같이 ‘꿈(夢)’이 그려낸 욕망, 무의식의 환영이라 한다면, 영화의 극단적인 비현실도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억눌린 욕망의 신경증으로 이입해볼 때 그 전말이 구조화된 상징체계로 하나하나 납득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린치의 영화들은 엽기적으로 변형된 동화코드 및 이드와 슈퍼에고의 다층적인 심리상징, 색의 이미지들을 활용한 미스터리와 직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그 직감의 에너지는 악몽의 주술로 작용하여 악몽으로 초대된 관람객들을 이름 그대로 강하게 ‘린치’한다. 

 정상성과 근대성, 휴머니즘에 반하는 비정상이라는 문제를 천착하며 탐구해온 데이비드 린치 감독. 그를 떠올리려면 영화사에 오래도록 기억될만한 작가주의를 선보인 데이비드‘들’이 자연스럽게 상기된다. 우선 전 세대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의 감독 데이비드 린, 자기분열의 파멸과 음울한 묵시록을 주테마로 삼는 『세븐』, 『파이트 클럽』과 최근 미국 최악의 연쇄살인범을 그린 미스터리 『조디악』과 토론토 국제영화제의 극찬작 『폭력의 역사』로 돌아온 데이비드 핀처, 『플라이』, 『크래쉬』 등으로 알려진 전위적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그리고 이단아 린치. 이중 낭만적인 고전주의자 린을 제외한 ‘데이비드’ 형제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환상이 발현되는 캔버스 매개로 활용하는 경향과 악취미라 할 만한 그로테스크한 신경증적 기질,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영상으로 사실주의나 블록버스터에 집착하는 할리우드 영화풍토에 숨통을 트여놓은 이성 중심의 근대의 대척점에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감독으로 평단의 인정과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데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영화들은 앞서 기술했듯 활동시기 또한 유사했으나 불운했던 천재, 신비주의자의 노선을 가며 인간의 심연을 종교적인 극단으로 실험하고자 했던 『무지개도둑』,『킹 숏』의 진정한 컬트의 신성 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Alejandro Jodorowsky, 1929~, 칠레) 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일면이 있다. 그의 영화들이 종교적 히피니즘의 신비주의 색채를 띠고 있다면 린치의 영화들은 포스트모던의 극단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데서 변별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자엔 종말론을 다룬 『도니 다코』(2001)의 천재 신예감독 리차드 켈리(Richard Kelly). 근작으로 『6월의 뱀』,『악몽탐정』을 선보인 바 있는 일본의 영화악동 츠카모토 신야(塚本晋也)가 변종 린치로 불리며 린치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 기괴한 영상미와 악마적 상상력을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굳이 문학텍스트에 대입해보자면 미국의 에드가 앨런 포우나 장르문학의 괴짜 러브 크래프트와 하란 앨리슨, 국내작가로는 백민석(『목화밭 엽기전』)이나 김도언(『악취미들』), 편혜영(『아오이 가든』) 따위의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부각시키는 엽기코드의 소설들 쯤이 유사한 맥락으로 연상된다고 할까? 시단에서는 김언희와 김참, 이연주, 이장욱, 기형도, 김형술, 김혜순, 황병승의 시 정도를 들 수 있을 테고.  

데이비드 린치's 악몽의 제국, 욕망의 ‘인 랜드 엠파이어’에서 의 메시지

 그렇다면, 린치의 영화에 난립되고 있는 엽기적으로 뒤틀린 것, 타오르는 욕망- 그 뜨거움에 데여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상처들에 많은 영화 팬들이 매혹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린치의 영화들이 관객들에 남겨놓는 화두는 이것일 것이다. 이 불온한 상상력의 반골 아티스트는 항시 부조리한 세상에서 낙오된 비정상들과 상처 입은 영혼들의 눈물에 주목하고 있다. 하여 그로테스크함과 유치한 모습들은 최면을 거는 듯 한 아련하고 여린 느낌의 서정적인 상황과 멜로디와 결합되곤 한다. 사실, 꿈으로 들이댄 카메라 뷰파인더가 비춰내는 뒤틀린 무의식의 실체. 이들은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비애의 정서를 담고 있는 ‘묘묘한 이중성을 지닌 그 것’이다. 그렇다면 린치의 메시지를 그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음악에서 찾아보자. 환각적 이미지와 여러 상징구조들 외에 또 하나의 강력한 최면기제로 기능하고 있는, 린치의 영화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주요한 코드는 사실 음악인 것이다. <블루벨벳>, <광란의 사랑>,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엠파이어> O. S. T에서 풀려 나오는 음표들이 극장을, 방안을 채우고 의식의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나른히 적셔오는 열기를 느끼며 이스트 효과인 듯 부풀어 오른 감정은 잠깐 동안 공황상태인 듯 약간 멍해지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선 몽롱하게 취하게 하다 종국엔 격한 고양감을 느끼기도 하며 드라마틱한 감정의 곡선을 그린다. 영화의 위악(僞惡)이 불편하더라도 린치의 음악적 페르소나인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간절한 아름다움. <로스트하이웨이>의 색소포니스트 주인공의 전위적인 색소폰 연주와 하드코어 메탈 <블루벨벳>에서의 여장 남자가수의 ‘in dream'의 강렬함.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르는 ‘Love me tender’의 달콤함. 멀홀랜드의 하이라이트 인 신비한 무대 위의 가짜 립싱크라는 테마(<블루 벨벳>, <멀홀랜드>), <로스트하이웨이>에서의 그로테스크한 하드코어 메탈사운드, 알콜기 서린 키보드의 아련한 멜로디와 한없이 여리게 들리는 줄리 크로스의 음색에 기괴한 악마적 웃음을 배합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난, <인랜드엠파이어>에서 악마성을 상징하던 한 남자의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엔딩씬에서 흐르던 '나는 죄 많은 남자이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며 흐느끼는 고전 'sinnerman'. 이들 모두 최면을 거는 듯 한 묘한 취기와 한 없이 여려진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신경증 적으로 그로테스크한 광기를 그리는 악취미에 신비하고 처연한 영상과 음악을 즐겨 교직 시키곤 하는 데이비드 린치. 

 그의 영화들에 넘쳐나는 비정상성이란 산업사회의 첨병인 공장지대에 신의 어린 양으로 내려와 고난을 받다 끝내는 살해되고야 만 기형아(『이레이저 헤드』)와 같이 일견 평범하고 순수했던 캐릭터들이 우연히 악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는 설정으로 정상의 모습으로 위장된 근대 문명사회가 배태하고 있는 균열과 두드러기의 징후를 기어이 까발려낸다. 비록 전술된 바처럼 분열된 자아가 겪는 현실과 환상의 혼재라는 린치의 극단적인 엽기코드가 구원의 가능성 자체를 포기한 듯도 보이는 '해답'과 '전망'에의 부재, 남성 판타지가 극대화된 성적인 존재로써만 의미가 강조된 여성에 관한 편향되고 왜곡된 묘사, 극적인 감각의 추구라는 딜레마적 난제로 인간의 어두운 광기와 삶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데에 멈춰져 있어 목구멍 어디 한 모금 미진한 갈증을 남길지라도 그는 인간의 신비로운 가능성을 발언한다는 것만은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또 미당이 『화사(花蛇)』로 노래한 바와 같이 역으로 시대, 혹은 신의 실패작이 내재한 존재론적 애수와 거부할 수 없는 퇴폐미의 서정성을 발광하고 있다. 엽기와 순수에 대한 감독의 이 같은 이중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음미해보려면 이러한 감각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들은 인간욕망에 내재된 원죄로 비극적인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불길한 염세주의 운명론을 설파하는 동시에 타락한 세상에 영혼을 정화할 수 있을 유일한 동력이란 ‘사랑’일 뿐임을 매우 역설적이고도 심리적인 방식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또한 체감할 수 있던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 그의 영화들은 욕망과 고통, 선과 악의 사이에서 타락과 구원을 시험 당하는 휴머니즘 갈급한 인간 군상들의 내면의 허방과 고통을 까발리는 우울하고 엽기적인 회화들의 전시장이자 성인버전의 잔혹동화다. 이는 또 결국 상처를 연민하고 이를 껴안고자 그 염증의 극단을 해부해보는 사이코드라마이자 나아가 스스로 해부 끝에 드러난 그 거대한 허무에 대항하는 ‘한판  살풀이되기를 꿈꾸는 꿈의 굿’, 그 자체가 되었다.

                                       <공연과 리뷰>  2007. 여름 호.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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