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헌문학 Oct 25. 2021

주름진 무법자의 하드보일 휴머니즘- EastwoodⅠ

--총의 도덕에서 구원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론

-총의 도덕에서 구원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Eastwood,Clint) 감독론 Ⅰ.


과거 1960년대 웨스턴 부흥기, 이름 없는 사나이의 데카당한 이미지로 컬트영웅으로 숭상 받았던 서부극의 아이콘. 냉소적인 총잡이와 무표정한 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성미의 대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Eastwood Clint, 1930~). 그랬던 그가 지난 77회 아카데미에서 휴머니즘 멜로물『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통해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및 4개 분야를 석권한 바 있다. 이로써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2회 수상이라는 전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미국적 정의구현과 삶과 존재의 이중성 및 비극성에의 깊은 통찰과 연민이라는 유사한 주제와 구조상의 패턴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을 구축한 일련의 필모그래피로 할리우드를 점령해 명실 공히 세계적인 거인감독으로 영화계 부동의 입지를 굳혀놓은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철학적 깊이는 세월에 비례해 농익어간다’는 진실 명제에 따라 그의 필모그래피들 중 최고의 작품성과 철학을 성취한 지난 봄 헐리웃 최대 이슈이자 제 존재 스스로 ‘값진 횡재’였다 할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다시 들여다본다. 아래는 이 한 감독의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는 본 작을 과거 장르영화들과 호평 받았던 후기 수작들 몇 편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그의 영화세계의 총체라 할 이『밀리언 달러 베이비』 에 담긴 ‘이스트우드 식’의 몇 가지 키워드를 찾아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자기반성과 탈 신화

떠돌이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벌채 노동자 등의 일용직을 전전해왔던 이스트우드. 그러다 그의 나이 34세, 마카로니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에게 전격 발탁돼 황량한 서부사막 지대 냉혈 총잡이들의 결투를 그린『무법자 3부작 시리즈』(-『황야의 무법자』(1964),『석양의 무법자』(65),『속 석양의 무법자』(66))에서 떠돌이 총잡이로 등장해 시가를 입에 문 채 우수에 찬 반항적 눈빛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것으로 웨스턴 영웅으로 등극한다. 그러던 그는 섹슈얼리티 한 마초형 배우로서의 연령한계효용의 마지노선에서 현명하게 회향, 1971년 여성 스토커의 사이코스릴러물『어둠 속에서 벨이 울릴 때』(1988년『위험한 정사』로 리메이크)를 선보이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감독 출사표를 던져 데뷔하게 된 것이다. 그 이래 이스트우드는 7․80년대『버드』(88)와『추악한 사낭꾼』(90)을 깐느영화제 경쟁부분에 등재시킴으로써 작가적 면모를 공인 받았고 이후 1992년『용서받지 못한 자』(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 수상)를 통해 '영화거인'의 칭호를 얻는 긍정적인 입봉의 수순을 밟아왔다. 

감독의 40년 영화인생 동안 연출해온 25여 편의 장편물- 서부극의 복습이라 할 일련의 현대판 웨스턴 무비(『페일 라이더』(85),『앱솔루트 파워』(97))를 포함한 형사 느와르(『블러드 워크』(2002)), 최루성 휴먼멜로드라마(『버드』(88),『메디슨 카운티의 다리』(95),『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범죄 미스터리스릴러(『미드나잇 가든』(97),『미스틱 리버』(2003) 등 드-에서 그는 '장르주의'의 수많은 장르영화들을 꾸준히 양산해냈다. 과거 자신이 출현했던 장르영화들의 전형적 장르공식과 캐릭터들을 답습해 변주하는 노선을 걸어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와 현대의 인물이 되어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떠돌이 주먹꾼, 직업도둑(『페일 라이더』,『앱솔루트 파워』(97)), 공군조종사, 퇴물우주비행사(『건틀릿』,『스페이스 카우보이』), 카우보이, 경찰, 형사(『홍키통크맨』,(82)『더티 해리 4』,『블러드 워크』,『미스틱 리버』) 식의 일체 황무지 무법총잡이와 한 핏줄 동생 격인 직업군의 캐릭터들이었던 것. 이들은 본능적으로 힘의 권력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자존의 욕구를 지닌 마초형 남성들이다. 그의 영화 속 이러한 인물 캐릭터에서 감지되듯 다양한 스펙트럼 안의 감독의 장르영화들은 공화당 지지파라는 감독 자신의 정치성향과도 관계된 미국사회 힘의 과시하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남성적 세계와 그 힘의 질서영역 안에 포섭되는 보수 아메리칸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그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이 같은 마초형 캐릭터들을 일관되게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로 내세우며 아버지가 부재 하는 미국사회 가장이데올로기(가장 책임주의)와 남성정체성을 탐구해왔다.『더티 해리4』(83),『무법자 조시월즈』(76),『용서받지 못한 자』,『미스틱 리버』에서 살해당한 가족(친구)에 대한 복수를 수행하는 가장들과 같이 '가장 및 리더' 정체성의 소유자들인 이들 주인공 남성들은 다소간 비약을 더해 표현하자면 가히 힘의 질서 탐구에 있어 전투현장과도 같은 결전의 상황에 처해있다. 도덕적 고뇌가 파생되는 결단과 정의와 악, 생과 사의 싸움, 누명을 쓰고 진실을 밝히고 악을 응징하고 처단해야 하는 상황들에 바로 이러한 죄에 대한 개인적 응징인 복수와 진실규명, 제도와 법이라는 반복적 테마 안에서 생사를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선과 악의 최후’와 ‘운명의 실험’이라는 생사를 건 내기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잔인하게 살해당한 보안관이 영혼으로 부활해 마을 내 비겁자들을 초인적인 힘으로 처단한다는『평원의 무법자』(72), 노동자들의 편에서 강자인 착취자들을 응징하는 『무법자 조시월즈』, 사형집행 하루 전 무죄수감자의 복권 이야기『트루 크라임』(99)등도 '죄와 정의구현'이라는 테마를 전면에서 탐구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돈 시겔 감독의 그 유명한 70년대를 풍미했던 『더티 해리 시리즈』(1971~)에서 파시스트 형 냉혈형사 해리 캘러헌이 서부 총잡이들의 쌍권총의 현대적 업그레이드인 '매그넘 44권총’으로 세상의 불의를 '총의 도덕'을 통해 문자 그대로 ‘더티’ 하게 바로잡았듯 '악행의 진압을 위해 악을 행해야 할 때도 있다' 라는 이스트우드의 한 시절 '이포역포(以暴易暴)'식 영화문법 안에서 감독은 줄기차게 공권력이 아닌 '거리의 법’을 택해 총의 처형의 심판을 집행하도록 종용해왔다. 따라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실 명백히 선을 대표하는 정의의 사도라거나 아메리칸 히어로인 것(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스트 우드 영화 속 마초 주인공들은 ‘우리들의 감사하신 위대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즘적 가치관의 무법자 이미지에 고착되어있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 내를 풀풀 풍기는 B급 향취의 안티 히어로에 더 근접해 있던 것이다. 이러한 힘의 가치관은 ‘이스트우드 식’이라는 동일개체의 속성 안에서 반복적으로 주된 테마로 미화되거나 답습되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또 한 편으론 성숙의 한 과정 중에 변태하며 진화해오는 변화의 과정도 겪어왔다. 여기서 '진화'란 바로 악한이든 선인이든 폭력의 희생자들을 향한 연민과 양심에의 심안(心眼)이 개안되었다는 얘기다. 고전 웨스턴극를 향한 예의이자 헌사였던 영화『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그는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어가던 악한은 '지옥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눈을 감는다. 늙어가는 무능한 가장이 되어버린 퇴역 총잡이는 생업을 우회해 양돈하고 있던 우리 안 돼지들이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것에 대해 사실은 자신의 학대에 복수하며 죽고 있는 것이라고, 결국은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읊조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제서 약자와 패배자 희생자들에 관한 양심과 책임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앞으로는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지점에 이르렀지만 끝내 ‘용서받지는 못했던’ 총잡이 머니를 내세워 영웅주의에 가려졌던 힘에 대한 죄의식과 반성, 죽어진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 회한과 상처로 용서를 구한다. 영화는 삶의 책임의식에 눈뜬 늙은 총잡이의 회고를 통해 과거 자신의 출연작들의 폭력의 세계를 반추하는 동시에 결국 그러한 살상의 과오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살인에 대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도덕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이제 감독은 노년에 깨어나는 양심에 의한 회개를 통해 그 동안의 ‘용서받지 못한’ 죄를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며 정화를 시도한다. 

과거의 무법자가 ‘정의’에 대해, 인과응보적 가치관으로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인간의 순리적 단계인 것일까? 웨스턴 부흥을 일으켰던 왕년의 웨스턴 히어로는 이제 피의 논리의 허실에 대해 반성적인 성찰을 시도하며 영웅시되어온 자기우상화를 자가 해체해 그 스스로 '서부극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변신에 대해 평론가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과거 페르소나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신화화되어온 서부영화의 전설에 대한 '탈 신화화작업'이라 칭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힘의 반성‘ 작업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1990년대 이후의 필모그래피들은 여전히 분명 '남성적'인데, 이는, 그의 영화들이 강자와 약자 간 냉혹한 힘의 균형을 논함에 있어 전반적으로 하드보일드(hard-boiled)(<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의 소수의 멜로물을 제외하고)소설들이 연상되는 비정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는 데에 대한 결론이다. 대기업 할리우드 공장의 영화 공정 공식이라 할 낭만적 환상성이나 뻔 한 해피엔딩을 체질적으로 경계하고 있으며 앞서 말한 복수와 결투, 부성책임주의라는 소재를 반복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점에서의 남성성지향을 이르자면 그러하다.

재즈스런 시간의 숙성과 풍화

그런 감독의 90년대 이후 후기 대표작들은 이제 오히려 삶에 의욕을 잃고 회한에 빠져있는 쇠락해 가는 중년(남성)들에 관해 이야기하길 즐긴다. 자신의 영화연출 방향에 관한 스스로의 변과 같이 감독은 마치 노년의 그 또한 인생을 정리하고 집대성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듯,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보고이자 자기고백인 듯 늙어 가는 퇴역 프로 남성들, 과거에 사로잡혀 지난 과오를 후회하는 중년을 등장시킨다, 또 혹은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의 말라깽이 복서지망생 캐릭터의 은유일 적자생존의 삶의 링 위에서 패배하거나 소외된 몽상하는 약자와 희생자들도 관심의 대상으로 이들의 일생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한 시기 생의 단면을 향해 카메라 뷰파인더를 포커스 인하려 한다. 이때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이미지란 주름을 닮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생성된 후회와 고뇌의 나이테다. 과거의 흉터는 완전히 아물어지지 못했고 죄의식은 만성화 되어있으며 잊혀져 가는 퇴물영웅들은 기실 모두, 고독하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71)에서 절정의 매력을 뿜어내던 마초와 젠틀맨의 아슬한 경계에서 이율배반적인 매력을 풍기던 젊은 날의 액션배우. 그는 이제 감정표현이 무딘 포커페이스인 것은 여전할지라도 이미 자신만만했던 혈기대신에 골진 주름에 걸맞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라’는 신중한 보호주의와 보수적, 금욕적인 ‘반성’의 힘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반송돼오는 편지를 다시 매일 새로 전송하며 주일예배 개근을 기록하고 예이츠의 시집을 탐독하는 교양주의자적 노인의 깊은 눈매, 그 것 말이다. 젊은 날의 무법자. 신출귀몰했던 ‘총잡이’는 이제 노쇠해 쇠약해져있다. 평원을 바라보는 늙은 머니의 표정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랭키와 닮아있다. 동일 선상에서『버드』의 경우에는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마약과 방랑생활. 이에 대한 회생의 일대기를 담아 당대 최고 재즈계 황제의 화려한 무대 뒤의 한 인간의 숙명의 굴레라는 테마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바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 가장 처참했던 전투의 하나로 알려진 일본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한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이오지마의 영웅들: Flags of Our Fathers』에서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지난 날 2차 대전 참전 용사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영웅으로 귀환해 호화로운 환대와 영웅대접을 누리게 되었으나 이제 늙어 회고해보니 당시 허황되고 조작된 영웅신화로 가려져 묻혀져버린 자신들 참전기간 동안의 처참한 실상과 허무를 회상하며 인생무상을 느끼며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렇듯 한 인간의 전 생을 아우르려는 이스트 우드 후기 영화의 일관된 서사구조에선 상징적인 한 시기에 생의 트라우마와 죄의식들이 집약되고 지금까지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매듭을 풀어 종결짓는 극적인 '정리-conclusion'의 시간이 마련된다. 소년 시절 유아강간 사건으로 엇갈린 운명을 사는 세 친구의 이야기『미스틱 리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결국 이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질긴 업보의 늪에 빠져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최악의 결말로 패배해버리기도 한다. 과거 냉전시대의 인 우주병기의 존재를 반성하고 전대의 과오를 책임지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우주로 나서는 퇴역비행사들(『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오랜 고독 끝에 최상의 시간을 체험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탈옥수와 권투선수(『퍼펙트 월드』.『밀리언달러베이비』)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죽음과 함께 정리하는 메니(『메디슨 카운티』) 등등 그의 후기 연출작 대부분의 서사구조들이 바로 이 ‘정리’와 완성, 혹은 파국이라는 근간의 스토리텔링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늙어버린 마초의 권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유한성을 절감하며 사랑과 이해가 그리운 늙고 병든 이들. 그러한 이들의 쓸쓸한 패배나 퇴락의 여운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후기작들은 한 인간의 실존 전체를 지배하는 오랜 운명의 그림자(원죄의 문제),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자의식(구원의 문제), 가족애의 부재에 따른 실존적 갈증(고독의 문제)을 무심한 듯 사실주의(realism)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주시한다. 말하자면 사실주의의 철학이라 할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비춰내고 있는 것이다.(영혼의 복수를 소재로 했던『평원의 무법자』는 예외의 경우로 치자)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결여에의 공감각, 진중한 형식과 회한의 정서는 영웅주의로 치장되었던 젊은 날 어설픈 캐릭터에 현실적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한다. 거구로 커져버린 그의 영화들은 일생의 업보, 소망, 숙제의 마지막 정화작업을 시도하며 보편적 인간사로 치환 가능할 생의 비밀들을 논의하는 중에 있다. 

이처럼 사실적이고 관조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카메라의 차분한 시선의 영향인지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엔 자연스레 절제와 진중성이 배어있다. 형식에의 실험은 거의 전무하다 하겠으나 답답하리만치 고전주의를 충실히 따르는 그 자체로 역설적으로 현 시대적 조류에선 튀는 그 '고전주의적 개성'이 어필해 관객들의 감흥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절제와 생략을 통해 깊이를 만들고 싶다'던 감독의 의도대로 어두컴컴한 조명하에 빛과 어두움으로 인물의 내면심리를 표현하는 모노톤의 단순구조와 비밀스런 과거를 묻어두는 생략기법이 도입된다. 그 외 순차적인 시간진행, 전체적으로 느릿느릿한 전개 속에 긴장과 느슨함을 오가는 엇 박의 전개. 자연스럽고도 시적인 대사라는 형식특성과 또 애수어린 서부극의 신화이자 신화적 존재라는 점에서도 금욕적이고 고전적인 스타일 그 면에서도 ‘90년대의 존 포드’라는 별명을 수긍케 한다. 이스트 우드 또한 과묵한 의 작가 존 포드의 절제미 발하는 미니멀리즘격의 스타일 미학을 취하고 있다. 고전적인 형식 틀 안에 담백함이라는 형식적 일관성이 포착되는 것이다. ‘진중함’ 쯤으로 표현될 이러한 이스트우드 식 테크닉 상의 특성은 재즈 광이자 영화음악감독인 감독 개인의 오랜 음악취향(1940년대 미 재즈계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비운의 생을 그린『버드』, 블루스 오마주 프로젝트 『더 블루스-「피아노 블루스」』(2003)등 재즈와 관련된 영화들을 연출한 경력이 있다)으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편식하던 잔잔한 포크기타선율과 재즈음악들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여 이러한 비약적인 표현이 용인된다면 후기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의 색채란 가히 ‘재즈적 리듬’이라 명명하고 싶은 그 것인 것이다. 감독의 후기 영화들의 주된 정조를 이루는 ‘나이든 자와 불운한 소외자의 서러움, 오랜 후회의 상처인 애환의 정서’라는 주제적 측면은 바로 결국 이 재즈음악의 태동 즉 본질과도 괘를 공유하며 일맥상통으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하여, 이스트우드 영화 속 그의 배경이 되는 진지한 선율과 음악들은 그 취향 및 정신적 측면에서 그 중첩된 의미상으로도 서로 간 시너지효과를 창출해내고 있는 비경을 펼쳐 보인다. 

난해한 삶의 이중성, 비정한 숙명론 

이 같은 카메라의 성찰적 시선은 영웅의 탈 신화와 시간과 패배자들의 내면에 대해 탐구하는 것 외에도 핑크빛 칼라렌즈라 할 이분법적 단순구도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 속 산재한 모호한 선악개념과 실체를 알 수 없는 정의의 양면적 속성과 같은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먼저 폭력의 비인간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악을 응징하는 방법론으로 동일한 이판사판 식 폭력적 힘을 채택하던 광경(『더티 해리』)부터가 모순적이었다. 감독이 자주 사용한 죄에 대한 개인적 응징인 ‘복수’라는 테마에선 ‘오랜 버릇 못 버린다’는 옛말처럼 이스트우드는 공권력이 아닌 ‘거리의 법’을 택해 (복수의) 처형을 집행해왔던 것이다. 또 이것. 영화『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 가혹한 운명의 희생자인 여복서 메기 피츠제럴드의 운명적인 마지막 타이틀전이 치러진 장소가 인생역전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인 라스베이거스였으며 그녀의 이름 또한 화려하고도 허망한 아메리카 드림에 관한 상징적 고전『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피츠제럴드’와 같다는 사실도 떠올려보자. 이들은 모두 의미심장한 모순상징을 이루는 설정이다. 

사리사욕에 눈멀어 공정한 법 집행을 포기한 비열한 보안관과, 자녀들을 양육할 금전이 바닥 나 다시 총을 들긴 했어도 결국엔 희생자인 창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어찌되었건 정의의 편에 속해있는 총잡이(『용서받지 못한 자』). 본성은 여린 탈옥수를 과잉대처로 사살해버린 정의의 수호자 늙은 경찰관이 느끼는 찹찹함(『퍼펙트 월드』(1993)), ‘아름다운’ ‘불륜’(『메디슨 카운티』)라는 설정들도 마찬가지. 각각의 영화들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과 설정들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모두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는 아이러니한 대립 항들이다. 이 외에도『앱솔루트 파워』,『미드나잇 가든』,『트루 크라임』,『블러드 워크』,『미스틱 리버』등의 일련의 범죄영화들에서 펼쳐지는 ‘선인과 악인’, '제도와 법', '양심과 속죄'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는 이스트우드 영화들에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는 모호한 선악개념의 아이러니 한 설정들이다. 

이처럼 명백한 절대윤리가 제시되지 않는 현실. 영화 속 인물들은 생의 중대 결단을 내려야하는 입장에 봉착해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있다. '총을 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를 떠나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위험한 대전에 출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생과 사','승과 패'의 진퇴양란 절대고독의 순간. 

그의 영화 속 이야기들을 정리해보자. 극단적 상황에서의 도덕적 딜레마와 그에 대한 갈등이라는 이러한 설정들은 근작『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만날 수 있던 테마다. 오랜 세월 매달려온 신부 즉 교회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치유해줄 구원의 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달은 늙은 복서트레이너 프랭키가 종교적 지침 바깥에 있는 유약하기에 더욱 인간적일 수 있는 '나름의 휴머니즘적 판단'으로 메기의 어려운 청을 수락했듯이. 그는 차라리 반 기독교주의자로 고독한 신비주의를 표방했으며 ‘게일민족’의 소외의식과 이를 항변하던 문학 태도로 사상과 환경 모두 열외자적인 세계관의 문호였다 할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들에서 위안을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트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들 앞엔 또 비극적 운명론이 끼어든다. 그 한 순간의 중대한 생의 결정은 운명의 낙인 혹은 원죄라 이름 할 일생을 죄어드는 뼈아픈 후회로 각인되곤 한다. 운명의 변수는 급작스레 찾아와 가혹하게 소용돌이친다.『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몸에 배인 피 냄새를 씻어내려 했던 머니는 알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결국 한 마을 남자들을 전부 몰살해버리는 살상의 재범을 저지르게 된다. 또 그 영화에서 총잡이 빌 대신 끔찍하게 살해당한 동료 네드로 분했던, 무고한 희생자 모건 프리먼은 이제 다시『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 프랭키가 자신의 한 순간의 오판으로 결국 실명을 초래케 되었다고 평생을 자책하게 되는 애꾸눈 동료 스크랩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타인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적 선택에 대한 깊은 회한과 후회라는 반복되는 구조는 탈옥수에게 총을 겨눈 형사의 가슴 아파하는 상황이 전개되는『퍼펙트 월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재연된다. 이 모든 비극적 시나리오들은 실로 예상하지 못한 결말들이었다. 사실 그의 영화들엔 죄 없는 자가 느닷없이 누명을 쓰게 되거나 대부분 세대 간의 교류인 외로운 영혼들 간의 짧지만 진실 된 만남 뒤 돌연한 죽음으로써 안타깝게 이별하게 된다는, 예기치 못한 파국의 테마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러한 비극적 서사에는 가히 숙명과 원죄의식이라 할 만한 감독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관통하고 있다. 냉혹한 휴머니스트라 할 이스트우스는 숙명론의 또 다른 이름일 비온정주의를 체계화하고 있다. 근작『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 주인공 메기는 운명적으로 프랭키를 만나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간절했던 목표를 달성해가지만 찰나였던 절정의 순간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설정도 종국의 이별도 사실 결코 낭만적인 결말은 아닌 것이다. 

꿈꾸었던 희망찬 미래는 사라지고 계획은 어긋났다. 이것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비온정주의’다. '불가해하고 냉혹한 숙명론', '원죄의식과 비정주의'는 이스트우드 영화를 읽어내는 '하드보일드 이스트우디즘'의 주요 코드라 할 수 있다. 

<공연과 리뷰 2005. 봄> 

작가의 이전글 분열된 자아, 무의식의 꿈의 발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