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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가을의 BGM. 스크린 뮤직 박스 안에서 길을 잃다

아름다운 선율이 녹아있는 가을영화 10선

 - 명장면마다 흐르는 섬세하고 낭만적인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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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망가지고 푹 꺼진 영혼의,

그러나 왠지, 글쎄 왠지

아주 가버리지는 않는 이 영혼의,

올이 터질 대로 터진 이 지쳐빠진 영혼의,

한구석에서 몇 가닥쯤

유년의 살기운을

또록또록 띤-어쩌면 인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맥을 몇 개 찾아낸다,

곁눈질로

릴케 씨, 또는 그때 내 투명한 살에

무참히 내려와 박히던 저

잔인한 태초의 순수, 그래서

다 망가진 이 겉옷을, (늘 언젠간,

맞게 될 거야, 라고, 내가, 늘,

내면에서 얼마나 나의 살을

밀어붙였던가, 대체로

가슴 근처에서 바람으로

볼륨을 때우는 정도로 끝나긴 하지만)

너풀대면서 내 곤한

영혼이 울음을 터뜨린다. 오 하느님.

제발.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해주소서."

그래서 릴케씨, 내 삶 위로, 그래도

오늘 한 번 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내가, 얼마나, 이 망가진 시간 속에서

삶이, '무슨 일'이기를 바라는지,

기껏, 손가락이나 물어뜯는,

자기 학대의 방편밖에 없으면서도

나는 깨닫는다, 다시 돌쳐 꿈꾼다.

삶을 나날이 저지르는 사건, 순간순간의

날선 각성으로 지니기 위하여.

가을. -또는 임박한 밤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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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가을 >: 김 정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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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바라건대, 무릇 우리네 순간순간 대기처럼 배경음악이 흐르기를....' 

1980년대 어느 날 들국화가 그들의 곡 '어떤 가을'에서 수면제를 뿌리며 나른하게 읊조렸던 것처럼, 어디론가 멀리 떠나거나 그 누군가에 전화 걸고 싶어지는 묘한 감정이 이는 늦가을 나날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만물이 열매를 맺기 위해 깊어지는 시간인 까닭에 유독 감정 선이 복잡해지는 가을이기에 독서의 계절이라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영상의 위력이 세력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오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다양한 영화들이 명멸하는 영화광의 계절이라 칭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가을, 가을 떠오르는 영화와 음악을 떠올리라 하면 내 머릿속에는 <카사블랑카>류의 흑백 클래식부터 현대음악의 거장 필립 글라스(Pillip Glass)가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디아워스>까지, 수많은 명화의 잔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애절한 사랑의 단상, 이별과 회고, 회한과 성숙 따위의 가을테마를 담고 있는 주옥같은 멜로디들이 덧칠된 영화 열편이 들려주는 영상편지에 귀 기울여보자. 




거리악사가 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득음-<바이올린 플레이어>


그닥 알려지지 않은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명성 높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속세의 지위와 허세를 벗어 던지고 지하철 역사 연주자로, 종국에는 빈민굴로까지 들어가 소외된 영혼의 절망을 음악으로 치유하고 아티스트로서 음악적인 성숙을 획득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음악을 통해 불교의 대승과 자비까지 사유하게 되는 예술의 존재가치를 깨달아가는 음악인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눈먼 노 현악연주자와 장님소년 사제의 구도적 행보를 보여주던 <패왕별희>의 거장 첸카이커 감독의 걸작 <현 위의 인생> 과도 상당부분 유사하다.

거리의 반도네온 연주가는 아스트로 피아졸라스럽다 할 명상념과 감정 풍성한 선율을 물처럼 뽑아내고 묘하게 흥분된 분위기 속에 악사들 간 즉흥적 잼 연주가 출몰하는 파리의 지하철은 이제 살아있는 음악이 흐르는 카니발 공간으로 화한다. 이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리악사 아르망의 즉흥연주와 그에게서 배어나는 묘한 품격에 매료된 매표창구 여직원 리디아는 매일같이 지하철 통로에 기대어 연주를 듣고 서로는 이내 순수한 사랑에 빠져들지만... 그녀는 왜 돌연 떠나버려야 했을까? '성숙을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하다'는 명제는 과연 진리의 화두인 것일까? 바이올린까지 분실한 뒤 리디아를 향한 그리움과 인간에의 연민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고자 고뇌하는 아르망. 

영화는 종결부에 빈민들의 집시 촌과 지하수로까지, 바이올리니스트의 환상도 교차되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심금을 울리는 바흐의 샤콘느-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 파르티타 제 2번 5번 째 곡이 장장 15분 동안 전곡 연주되고 있다. 연주의 실연은 바흐 샤콘느 역대 최고 연주로 평가되고 있는 '파가니니의 환생'이라고도 불리는 클래식계의 기인, 기돈 크레머의 연주다. 아마도 단식고행을 마치신 승려의 표정이 그러할까? 마지막 한음을 소진하고 고개 들어 감겼던 눈을 뜬 바이올리니스트의 그 경건하고 깊어진 눈빛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자의 시선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고 잊을 수 없을 깊은 화인을 새겨놓는다.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사진작가였던 샤를반 담의 처녀작으로 개봉되던 해 깐느영화제에서 많은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예술의 진정성을 사유하고 있는 걸작 음악영화다. '낮에는 막노동을 새벽에는 매일같이 바하만 듣던 추위와 외로움 속에 방랑하던 고시원 시절, 자신의 폐쇄적인 고독을 위로해주었던 영화와 음악'이라던, 어느 클래식 음악잡지 독자투고 글로도 더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파리의 지하철을 배경으로 계절의 깊이를 더하는 선율 속에서 음악인, 혹은 음악에 홀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로는 <서브웨이>와 <디바> (Promrnade Sentimentale, LaWally),<퐁네프의 연인들> 가 떠오른다. 영화만큼 그 보다 넘치게 아름다운 그 곳은 바로 여기 'here and now', 현상과 실제. 우리들의 이 공간이다.



옛날 옛적 그 시절, 잊혀져 가는 사연들 - 'Once upon a Time in America', 'Once upon a Time in West' 

회고, 황혼, 추억.... 이러한 단어들을 발음하려면 왠지 낙엽을 태우는 재의 향을 맡을 수 있을 듯 하다. 세르지오 네오네의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1920~60년대 돈. 범죄. 권력 등 미국의 부패한 악의 뿌리에 얽혀 파란 많은 삶을 살아간 한 사나이의 고백이다. 1920년대 미국 어느 동네 뒷골목에서 아름다운 발레리나 소녀 데보라를 훔쳐보던 어린 소년(eborah'sTheme).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과 유년기 친구들과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플래시백 위로 엔리오 모리꼬네의 따스하고 정적인 팬플룻선율 Cockeye's Song, 과 Childhood Poverty, Childhood Memories 이 흐르면서 다 커버린 로버트 드니로의 뼈아픈 회한을 감싸 위무하며 일대 서사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소년에게 남은 것이라곤 시든 육신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후회에서 오는 가슴시린 미련과 통증뿐이다. 

한편 <황야의 무법자> (Titoli, A Fistful Of Dollars Suite),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Main Title, The Trio) 등 일련의 레오네 감독의 일련의 마카로니 웨스턴영화 의 걸작 Once upon a Time in West 는 미국자본주의 생태를 서부라는 신화적 공간의 영웅담과 사랑이야기를 통해 조롱한다.  하모니카의 쓸쓸한 음색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The Man With The Harmonica는 무참한 살인 뒤 황야에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멀리로 떠나가는 헨리폰다의 테마였다.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으로 영화에 삽입된 메인테마이자 클라이맥스의 곡 Once upon a Time in West. 이 곡은 처연하고 드라마틱한 허밍 음으로 서부개척시대의 후일담식 서사성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내 그룹 부활은 이 곡을 록발라드의 격정적 감성으로 해석하여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을 시도했던 2집 Remember에 원곡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가슴을 후벼 파는 일렉기타 버전 'ill's theme' 선보인 바 있었다.

스크린 안에 들어온 아름다운 가을풍광 -<가을의 전설>, <천국의 나날들>, <만추>

더불어 1970년대 미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아련한 가을분위기의 영화로 떠오르는 <천국의 나날들> 또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1979년 영국아카데미 음악상 및 79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수작으로 <씬 레드 라인>의 전설적인 감독 테랜스멜릭의 연출에 의해 영화사상 최고의 영상미를 구현한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음악이 아름다운 가을영화다. 돈을 벌기 위해 남매로 서로의 관계를 가장한 사랑하는 연인과 여동생의 사랑을 열망하는 하얀 얼굴의 지주, 세 사람의 애증을 측으로 대농장에 파도치는 밀밭의 물결이 시종 스크린을 압도하고 있는 비주얼을 보여준다. 영화 절정부에는 메뚜기떼 구름이 초현실적으로 밀려오고 광활한 밀밭이 처절하게 불타오른다. 영화는 쉼 없이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인간사 희로애락과는 무관한 차라리 몽환적이라 할 만한 자연의 초연함을 통해서 인생의 무상함을 전하고 있다. 또 떠도는 방랑자들의 집시스러운 삶의 미학과 밀레의 그림에서 감화될 수 있었던 노동의 경건함과 애환을 성공적으로 체화해낸 데뷔초기 젊은 리처드기어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가을영화라 불릴만한 <가을의 전설>도 삼 형제와 한 여자를 둘러싼 애꿎은 운명의 사랑이야기다. 세계 제1차 대전과 대자연의 가을풍광, 그리고 제임스 호너의 유명한 메인테마 ‘The ludlows’를 배경으로 깔고  야생에서의 이뤄질 수 없는 엇갈린 사랑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형의 약혼녀를 사랑하지만 말을 타고 황금빛 황야를 달리는 것으로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는 채 반골기질의 청년 브래드 피트와 그의 인디언 아내의 야생적 삶이 매력적이다. 

이미 한 세기가 지나버린 1980년대 후반 한 시대의 한 계절, 하얀 겨울의 미학을 <겨울여자>에서의 청초한 성모 이브 장미희가 풍미했다고 한다면, 1981년 발표되어 반향을 일으켰던 <만추>(김수용)에서의 외로운 여자의 공허 그 자체를 연기한 김혜자가 분했던 가을여자의 인상 또한 매우 강렬한 것이었다. 이제 막 출소한 중년여인이 2년 전 이 날, 이 자리에 2년 후 반드시 다시 만나자 굳게 약속했던 한 청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청년은 지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차디찬 감옥에 수감 중일 뿐. 혹은 끝내는 알 수 없을 사연으로 부재하고 있을 뿐. 절정으로 노오랗게 물든 낙엽사체 밭에서 기다림에 지쳐버린 여인은 결국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떠나간다는 단순한 이야기에 늦가을의 짙은 애수를 담아낸 영화는 21회 대종상 및 2회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처연한 음악은 김도향이, 동시대인 1980년대의 브라운관 속의 시 한편이었던 'TV 문학관의 동명의 드라마 만추 버전은 작곡가 김수철이 담당한 바 있었다.



사막에서 울리는 고독한 선율 <동사서독>, <파리, 텍사스>

<중경산림>, <아비정전> 등의 작품으로 홍콩 뉴웨이브시네마 물결을 일으켰던 왕가위 감독의 최고의 작품 <동사서독>에서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사막으로 흘러 들어온 칼잡이들의 미련과 추억의 편린들이 모자이크로 직조되고 있다. 이성을 산란시키는 이질적인 슬로우모션 액션(에 깔리는 (Prelude (A Lonely Shadow) 은 갈증에 애증까지 삭혀둔 이의 몸부림, 그 한 편의 빼어난 접신의 경지를 이른 칼춤을 연상시킨다. 운명의 장난을 피하려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와 사막 외딴 오두막에서 청부킬러로 일하는 서독의 뼛속 깊이 스며있는 외로움을 당시에도 위태해보였던 전설의 배우 장국영은 굳어있는 안면근육으로 표현했다. 가난한 여인의 청을 대가없이 받아들여 손가락까지 잘려버린 외로운 무사 역은 양조위가 분했다. 임청하, 장국영, 장만옥, 양조위, 장학우, 양가휘, 유가령, 양채니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검객세계의 퍼렇게 멍든 시린 사랑이야기는 외로운 칼잡이들이 몸짓으로 쓰는 시가 되어서 왕가위만의 독특한 표현법에 의해 무협물도 이토록 애절하고 시적일 수도 있으리라는 무협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지표가 되었으며 그러한 성취로 무협영화의 타이틀로 베니스 영화제 예술성취상을 수상한 바도 있다. 

빔 벤더스 감독의 1984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파리텍사스>에도 아득할 만큼 짙은 고독에 찌들어 사막을 헤매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아내의 실종과 함께 인간의 상호소통의 방식인 '말'까지 망각해버렸다. 영화가 시작되면 미국 텍사스 남부에 실재하는 도시, 모래와 자갈뿐인 불모지 사막 '파리'를 헤매는 트래비스의 허망한 표정 위로 황량함과 고독의 아우라가 서린 ‘Paris, Texas, No Safety Zone’이 흐른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의 멤버로 제 3세계음악의 거장이라 할 만한 기타리스트 Ry Cooder의 연주로 거장다운 경건하게 절제된 울림을 들려준다. 행방불명된 아내 나스타샤킨스키를 찾아 헤매는 트래비스. 그가 7살 된 아들과 아버지가 각자 큰길을 마주하고 따라 걷던 장면과 끝내 재회하게 된 아내와 전화방 쇼 핀업창을 사이에 두고 일방만이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장면들은 타인과 소통하려는 인간의 몸짓과 진한 가족애가 표현된, 지금까지도 영화매니아들이 꼽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마이클 니만의 우울한 선율에 담긴 로멘티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피아노>

<걸 온 더 브릿지>, <길로틴 트래디>, <친밀한 타인들>, <사랑의 거리> 따위 남녀 간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들을 선보여온 빠트리스 르꽁트 감독의 1990년도 작품. 원제가 '이발사의 남편'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1990> 는 마치 이발관에 머리를 맡기고 졸음에 빠져드는 듯 한 가사상태스럽다 할 분위기와 프랑스영화 특유의 탐미적 화면이 관능적인 미감을 뿌려놓고 있다.

무욕한 가슴으로 서로를 위하는 완전한 사랑으로 낭만적 이상의 부부모델상을 제시하는 앙뜨완과 마틸드. 이국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아라비아풍의 음악에 맞춰 화장품을 술처럼 마시며 춤추는, 그들은 그저 오롯이 완벽하게 행복해 보인다. 절정에 이른 사랑을 영원히 지켜내기 위해 느닷없이 폭풍우 속으로 뛰쳐나간 아내가 취한 극단의 선택은 '간절한 사랑의 순간을 지켜내기 위해선 잔인한 시간의 힘에 퇴색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한다‘는 파장 깊은 침묵의 유언을 전하고 있다.

본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던 마이클 니만(Michael Nyman)은 그 유명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사운드트랙의 작곡자이기도하다. 니만의 음악은 자타공인 전체적으로 기본 멜로디 한 소절이 변화무쌍하게 율동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화 속의 The Promise는 극중 이다의 연주곡으로, 벙어리라는 신체장애와 억압된 이다가 소리 내어 부르는 노래라 할 수 있고 에이다와 베인스의 밀애장면 및 바닷가 장면에서 흐르는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 'The scent of love, To The Edge Of The Earth'는 이다의 내면에 감춰진, 물결치는 파도와 같은 꿈과 열정을 피아노 건반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즘에 또 한편으로는 민속주의에 걸쳐 있다'는 평가를 받는 마이클 니만의 음법은 이외에도 미니멀사운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Memorial과 깨어질듯 예민한 보이소프라노 솔로 Miserere가 일품인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와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등의 일련의 난해한 기호주의자 피터 그린웨이 영화들의 이지(理智)에 기댄 차가운 감성을 담아낸 OST들을 세공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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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에 더 깊게 취하게 하는 영화와 음악들. 

무심히 지나쳤던 주변의 거리도 영화 속 그 어딘가 인 듯 곱게 채색되어 한편의 그림 같은 배경으로 늦가을의 정취를 높이고 있다. 만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저녁 무렵이라도 될라 치면 고요한 가운데 저 마다의 뿌리서부터 울려나오는 어떤 소리들이 들릴 듯도 싶다. 하여 그렇게 존재들의 노래에 귀 열린 시인의 귀청을 지니게 된다면 세상은 온통 살아있는 음률로 진창 차오를 수 있으리. 스크린 속 공기인 양 흐르던 정제된 소리의 BGM처럼 내가 서 있는 이곳에도 일상의 배경인 듯 그렇게 흐르고 있어 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네 멸렬한 하루하루는 마법에라도 취한 듯 저릿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곱게 채색되어 질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일 터다. 음악이란 건 현실의 메마르고 거칠은 결을 비단처럼 부드럽게 해주는 삶의 유연제 역할도 한다기에. 

하여, 바라건대 이제 우리일상의 소중한 순간순간에도 공기처럼 자연스렇게 배경음악이 흘러주기를……. 성숙을 지나 쇠락의 표정을 내비치는 가을의 끝자락. 어떤, 가을의 한 장면을 읊조리는 조금은 퇴폐적인 느낌의 들국화의 묘한 탄식을 듣노라니 어떤 '사건'- 영화처럼 아름다운... 을 기다리는, 그리고 곧 일어나리라는 설렘이 전이되려는 듯하다. 무릇 작금의 절기는 아름다운 소멸을 이루려 동경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죽음까지 이를 만치 치명적으로 위험한, 탐미의 계절인 게다.* 


                 (2003. 10.14 『Bugs Webz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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