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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분단동병상련. 이중자아 이야기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우한코로나’,‘기생충’,‘계급’,‘지구촌’,‘국경’,‘남북, 북미 정상회담’,‘총선’…. 2020년을 맞은 전 세계의 화두다. 때아닌 이념전쟁이 재점화 된 듯도 하고 그에 예상치 못했던 바이러스 경계령이 더해졌다. 전염병 공포와 진영갈등으로 뒤숭숭한 시국, 위기와 도약을 진단하는 뉴스들을 접할 때마다, 새 십년에도 여전한 민족의 기도를 떠올릴 때도 정치적 관점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동병상련의 비감 속에 떠오르는 그러나 이국異國의 향이 나는, 외국영화 한 편이 있다. 쌍둥이 도플갱어 전설을 소재한 故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Krzysztof Kielowski, 1941. 6. 27-1996. 3. 13. 폴란드)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LA DOUBLE VIE DE VERONIQUE, 1991)이다. 장중한 음악, 단조單調톤의 갈빛 채도, 수수께끼 제시, 약간의 에로티시즘으로‘홀로 존재하지 않는 유기적 생명체의 유대’가 미스터리하게 전개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감독은 프랑스국기 이념을 색채로 영상화하는 시도로 세기말 유럽대통합의 메시지를 남겼던 기획영화 <블루(1993)>,<화이트(94)>,<레드(94)> 일명‘삼색 시리즈’로 유명하다. 그리고 여기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그 일명‘삼색 시리즈’의 프롤로그(서문)이자 일각에선 전설이 된 감독의 최고작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개봉 29년이 지난 현재에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영상과 탐미적인 음악으로 아트필름의 한 정점이자 시네필 필수 감상리스트로 회자되며 컬트영화화 된 이 영화가 지닌 매혹의 힘은 무엇이며, 도플갱어(쌍둥이) 전설을 재현한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영상거장이 전하려던 메시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10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뿌리


몇 광년 시공을 날아온 별빛이 반짝이면, 모르스 신호일까? 지상의 붙박이들에게 보내는 교신인 듯한 그 떨림을 응시하려면 먼 존재를 향한 그리움에 등불이 켜진다. 어느 날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고독감에 휩싸이거나 속수무책으로 상처 받았을 때, 혹은‘상처적 체질’ 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타자들의 세계 외로움이 천성인 사람들, 안데르센 아저씨의 판타지를 여전히 신봉하는 아이들이라면 소리없는 그 부름의 환청에 또 하나의 자신을 떠올려보곤 한다. 점점 듣기 어려워지고 있지만 소싯적 우리들은 '별은 모든 인간들의 영혼이고 별똥별은 인간의 죽음’ 이며,‘지상엔 우리 개별자와 똑같은 동일한 개체가 두 겹 혹은 세 겹으로 존재한다’ 는 출처 모를 전설을 귓등 너머 들어본 기억이 있다. 별들이 모든 생명체의 혼불이라면 무한의 은하계, 여러 명의 나’ 도 존재할 수 있다는 확률 상의 공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또 하나의 나를 향한 부재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이 고여 있다. 은하계까지도 아닌 지척咫尺이되 만날 수 없는 북녘 쌍둥이의 존재를 결코 망각할 수 없고 망각해서도 안 되기에. 백의의 샴쌍둥이로 태어났으되 운명의 장난으로 타의로 허리 잘린 남·북, 분열된 자아를 부르는 애비불비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견우직녀 또는 헤어진 쌍둥이가 서로를 무의식적으로 그리우듯이. 


운명의 여신이 조정하는 하나의 줄에 함께 매어있는 2개의 마리오네트 인형 같은 두 여인. 베로니카와 베로니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전인격성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재현해내는‘도플갱어’ 기담으로 두 쌍둥이 여인의 그리움, 미묘한 교감과 합일의 과정을 담아낸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연출의 변에서‘한 사람의 언행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자는 의도를 담고 11 


싶었으며, 그러하기에 사람은 아무쪼록 공생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전하려 했다’ 라는 논조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만물은 상호의존해 인과因果를 공유하며 존재한다고 설법하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맥이 닿아 있는 발언이다. 감독은 그렇게 미처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연결돼있는 동시대인의 아이러니한 인연들을 인류 보편의 문제로 보고 일관되게 탐구해왔다.


폴란드 여인, 베로니카


“1966년 11월 23일 두 곳에서 동시에 태어난 그들은 모두 검은 머리와 고동색 눈빛을 지녔다. 2살 때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었고 며칠 후 또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델 뻔했다.”-<느나의 두 개의 삶>- 인형술사 알렉산드로의 소설


쏟아지는 소나기. 광장에서 노래하던 합창단 소녀들이 급히 해산한다. 깃을 치는 종달새 무리처럼. 홀로 남아 빗줄기 속에서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마지막 여음을 붙들고 있는 아름다운 베로니카. OST에 적힌 노래의 제목은‘You Will Come’ 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노래 속의‘You-너’ 란 순간의 꿈의 성취, 피할 수 없는 이중자아와의 조우, 예정된 운명, 죽음 따위를 예고한 상징이었던 것으로 베로니카가 노래하며 떨던 것은 다가올 변화와 종말을 부지불식 예지했던 반응였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다. 소박하고 고전적인 폴란드 가정, 화가 아버지의 딸인 베로니카는 성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아가씨다. 고향을 떠나오는 기차 안에서 중세풍경화 풍의 고향 전원마을을 고무공에 비춰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고무공 구슬에 담긴 차창 밖 굴절된 이 폴란드 풍경이란 이어지는 장면에 등장하는 베로니카와 같은 얼굴을 한 프랑스 여인 베로니끄가 무의식중에 떠올려 조우하던 이미지와 데칼코마니처럼 같다.(전편 에피소드의 베로니카와 후편의 베로니끄 역은 이렌느 야곱(본 영화로 1991칸영화제12 


여우주연상 수상)이 일인이역을 담당했다.) 꿈으로 반복되는 이미지, 낯선 대상에 대한 익숙한 느낌은 영혼의 이중거취, 혹은 전생의 증거라 했던가. 쌍생아, 두 개의 삶의 부름을 들려주어‘또 하나의 나’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는 기시감을 표현한 미장센 구성이리라.


우연히 노래를 따라 부른 것으로 베로니카는 오케스트라 콘서트의 솔리스트로 발탁되어 연말 큰 데뷔공연을 앞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고 구호 울려 퍼지는 거리시위가 한창인 폴란드의 광장에서, 프랑스 관광객 버스에 오르는 자신과 꼭닮은 베로니끄를 발견하고 놀란다. 그런데 여기서, 도플갱어 전설을 약간은 서글프고 공포스레 들리게 하던 절대금기 룰을 기억하실지.‘또 다른 나를 만나면 그를 인식한 한 쪽은 죽고 만다’ 라던. 그 금기에 따른다면 이제 두 여인의 운명은 엇갈리게 될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닮은 여인을 홀로 목격한 그날부터 베로니카의 시점으로 비춰지는 거리는 일그러져선,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쓰레기를 버리는 허리 꺾인 노파의 애처로운 이미지나 또, 사신死神의 현현이었다 할 노년의 바바리맨 등,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성악가 데뷔라는 성공에 대한 설렘에도 숨은 가빠오고 육체는 흐느적 거린다. 그 와중 그녀를 찾아온 연인은 사랑을 고백하면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만남을 약속하는데…


콘서트에서 절대미에 가닿으려는 듯 절창을 부르던 베로니카는 돌연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이내 사망하고 만다. 연인의 고백은 결국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폴란드 베로니카는, 과연? 왜…?… 


프랑스 여인, 베로니끄 


여인이 가던 길을 멈춰 숨을 고르고 나무에 기대어본다. 길거리 노파의 뒷모습에 오래 눈길을 주고 있다. 베로니카가 요절해 무덤에 묻히는 씬 이후로 13 


카메라는 프랑스 여인 베로니끄에게로 옮겨졌다. 그녀는 홀로이신 연로한 아버지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지낸다.‘반 덴부덴 마이어’ 를 듣는다. 투명 고무공, 가죽 끈 악보집을 지니고 다니며 간혹 심장을 움켜잡는다. 이는 모두 이전 에피소드 속 베로니카 특유의 행동습성들로 비춰지던 모습이다. 이는 서로 다른 공간을 살아가던 프랑스 베로니끄가 폴란드 베로니카와 일생에 걸쳐 경험과 의식, 버릇, 본성까지 공유하며 선험적 인식을 획득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다. 애수에 젖은 베로니끄의 표정과 베로니카를 상기시키는 유사한 몸짓이 자주 클로즈 업 되는 것은, 그녀가 도플갱어였던 베로니카의 사망 이후 영혼의 쌍생아를 잃어버린 데에 직관적 애상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의 폐·심장으로 호흡핏줄을 공유한 여인의 사망 이후,자신의 삶에서 무언가가 사라졌다’ 는 생소한 상실감에 빠진다. 유장한 역사를 공유했으나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민족의 한처럼. 


생의 기점에 선 음악교사인 그녀는 학교로 찾아온 인형극단의 <상자 속의 발레리나> 관람케 되고 홀린 듯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렇게 그녀의 삶에 떠돌이 인형연출가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로가 다가왔다. 알렉산드로가 전달한 폴란드 베로니카의 성악 녹음테입을 들을 때 손거울에 반사되어 쏘아진 빛살이 부유하며 베로니끄를 감싸던 장면은 돌연 찾아온 허무감과 사랑으로 혼란에 빠진 흥분된 감성을 영롱한 빛의 이미지로 섬세하게 드러낸 탁월한 연출이었다. 비록 그가 쓰는 소설 모델로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던 반전이 깔려 있었다 해도 전령사로서의 존재 알렉산드로의 절묘한 등장과 홀린 듯 시작된 사랑은 참자아와 참예술을 찾는 여정 중 누군가를 부르던 존재들이 기어이 서로를 찾아낸, 우연의 외피를 쓴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 이 또한 불가해한 12지 연기륜緣起輪 회전 중의 인연법 이치며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도록 이끄는 예술의 힘일 테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베로니카와 연인이 만나기로 했던 주소와‘같은 번호’인 호텔 방. 그 엇갈린 명운의 장소에서 베로니끄는 알렉산드로와 사랑을 확14 


인하고 소설 <느나의 두 개의 삶>의 테마를 듣는다. 그리고 동유럽을 여행하다 찍은 사진 중에 자신과 외양이 같은 베로니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로써 베로니끄는 도플갱어의 존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분신에게 닥쳤을 죽음과 부재를 예감하고 근래 엄습해오던 정체모를 상실감의 연유를 자각해, 통곡하고 만다. 


스스로의 뿌리를 되짚고 싶었단 걸까. 유년의 집으로 달려간 그녀는 마당가 나뭇결을 매만져 보고, 이내 파도처럼 밀려드는 음악! 생의 한 비의悲意를 감지한 그 어떤 충만한 영감 속에서-. 영화의 이러한 종결은 본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어린 베로니카에게 엄마가 말한다.“크리스마스야. 기다리던 별이 왔단다.”어린 베로니끄에게 엄마가 말한다.“첫 잎이야. 봄이 왔나 보구나.”


말하자면 여기서의 나무란 생의 비밀이자 목격자 그 모두였을 터. 결국 이 영화는 영혼의 분신,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비밀이라는 상징태로서의 별과, 흐르는 생 속에서 모두가 공존하며 스쳐 지나고 있다는 진리- 물아일체(외물과 자아, 객관 주관, 또는 물질계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된다), 제행무상(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 제법무아(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진실한 자아의 실체가 없다)를, 그 인연법으로 심오해지는 섭리를 계절의 메타포로 설해하는, 예지와 영감으로 가득 찬 영화였던 셈이다.


이중자아·이중존재 


동갑내기 여인 둘. 동시에 심장병을 앓고 있고, 비슷한 시기 사랑을 했으며‘반 덴 부덴 마이어’의 같은 곡을 사랑한다. 허나 베로니카는 사랑을 포기하고 성공을 찾아 고향을 떠나 성악가란 꿈을 택해 도전했고, 그녀(도플갱15 


어)의 죽음 때문일지 베로니끄는 갑자기, 오케스트라단원 캐스팅제의를 포기하고 음악교사가 되어 인형사와의 사랑과 그가 건넨 의식의 실험에 자신을 내걸어본다. 아날로그적인 화가 아버지의 딸 사회주의진영 폴란드 여인과 엔지니어의 딸 자유주의진영의 프랑스 여인. 이 영화가 유럽통합을 기원한 삼색 시리즈의 프롤로그였음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두 여인에게 내재된 애틋한 자매애의 감정 선은 몰락해가는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서구유럽 자유진영 측의 쓸쓸한 감상과 상실감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해봄도 가능하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화자처럼 선택하지 않은 삶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삶, 그 회한과 동경을 어딘가 있을 또 하나의 나에게 기대를 걸고 몽상해 보는 것은 생의 유한성에 관한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정치적 관점으로 보자면 이는 전체와 개인으로서의 차별적 삶의 방식, 다른 체제를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자는 제안으로 수용해볼 수 있겠다. 그렇게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화양연화에서 곧 소멸-사망-할 꽃봉오리라는 상징 외에도, 평등한 공동체라는 완벽한 이상실현을 시험했으나 퇴장하게 된 폴란드 사회주의의 안녕을 은유하는 존재였기에, 절정의 노래를 부르고 쓰러지는 그리 찬란하고 위태하며 처연한 이미지로 묘사되었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렇다면 도플갱어의 금기법칙의 함의는? 그 전설대로라면 결국 한 개체(유럽) 안에서 다른 성질의 체제가 공존하기란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뜻일까.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러면 이는 북한이 핵을 지녔기에 연방제 형태로서의 이상단계는 위험할 수도 있다 예견하는, 고려연방제 시기상조현실론자들의 시각에 가까운 결론일 수도 있겠다. 


둘이면서 하나인


사실 감독은 폴란드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공산주의 영향권이 점점 커지자 국적의 한계를 뛰어넘어 작업해보기를 바랐다고 전해16 


진다. 폴란드 베로니끄 향한 자매애의 상실감으로 아파하는 프랑스의 베로니끄에게서나, 불·폴 공동작업‘세 가지 색’ 시리즈에 감독 자신의 예술관을 투사, 예술적 만개를 꿈꾸며 평등, 박애, 자유의 결국 희망적인‘유럽통합’을 메시지를 남긴 건 그러한 행보의 일환이다. 


그러면서도, 해당 시리즈 매 편에 반 덴부덴 마이어라는 가상의 폴란드 음악신성을 언급하고 음악을 삽입하면서 그가 폴란드 국적임을 드러낸다.(실제로는 키에슬로브스키의 음악적 페르소나였던 폴란드 거장음악인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곡들이다.) 프랑스국기 삼색이 의미하는 이상관념 중‘평등’ 에 해당하는 <화이트>도 폴란드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부인의 폴란드 남편 이야기이다. 이처럼 고국을 떠나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자국 폴란드에의 애정과 색채는 항시 잊지 않았다. 하여 체제의 공존 가능성에 관한 도플갱어 금기법칙대입은 조금 씁쓸하지만, 그 전제가 내포하는 바를 획일적으로 단정하리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보다 큰‘휴머니즘’ 이라는 영화의 진짜 대주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세 가지 색’ 시리즈의 서문 격이었던 본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이어 이렌느 야곱이 재출연했던 감독의 유작 <레드>와 마지막 톱니를 맞추면서 시리즈는 기어이 유럽통합과 세계평화를 위한 영상 대송가(Song For The Unification Of Europe(영화 <블루>의 주제곡)를 완성해내는데, 이 작품은 어쩌면 그 대서사의 완성에 키포인트가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념이 일지만 거시적으로 바라보매 결국은 서로의 다름을 결국 휴머니즘으로 연대하고 화합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성가로의 동양의 불교적 사유와 괘를 같이 하는 박애라는 주제의식으로 이란성理亂性 체제와 이념의 역사 문제를 품어보려 한, 이‘통합의 노래’ 는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은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통합되는 세계17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는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들 속 몇 가지 일관된 코드와 상징이 눈에 띤다. 그의 유작이 된 영화 <레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난파된 여객선을 구조하는 엔딩 씬에서 삼색 시리즈 각각의 등장인물을 차례로 비추어 이들이 한 배를 타고 있었다는 설정을 드러냈다. 이처럼 개개인이 실은 운명의 공동체였다는 코드를 즐겨 변주해온 키에슬로프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도 몇 번 베로니끄를 마주치며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 묘령의 여인을 등장시키는 데 그녀는 베로니카가 성악오디션을 보던 때 옆자리 있던 여인이었다.‘우리시대의 윤리란 무엇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 '죄에 빠진 나약한 인간들', '구원’ 이라는 종교적 관심에도 천착했던 감독이 즐겨 사용한‘재판’ 이라는 코드도 베로니끄가 친구를 위해 위증僞證을 자원한다는 설정(본 영화의 내러티브 상 뜬금없는 면이 없쟎은 짧은 에피소드였으나)에서 재생되고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연민에 찬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지 연로한 가족 구성원들도 자주 등장하는데, 배경의 국적 불문, 힘겨운 몸짓으로 분리수거를 시도하는 노인들의 이미지는 감독의 시그니처(서명)인듯 반복되던 테마였다. 격동의 역사 뒤안길로 떠나는 생명들. 폴·불 스산한 노인들의 모습이 같았듯 해후 못한 채 이승의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남북 이산가족 실향노인들 역시 같은 지친 모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인형술사이자 소설가 알렉산드로의 매개자로서의 역할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는 베로니끄에게 부상당한 발레리나가 죽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재생의 이야기를 보여주어‘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 새로운 존재태로의 비상 가능성’ 에의 인식을 돕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또 베로니카의 유품을 전달하는 것으로‘이중자아’ 의 실존을 자각하도록 이끌었다. 영화를 현실의 반영물이라 볼 때 상징이미지와 서사라는 거울장치에 현상을 투영, 매혹시키고 현실을 재구성 해보도록 하여,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 이는 곧 영화라는 예술매체의 본질이다. 동일 선상에서, 오랜 이별로 북을 점18 


점 더 타자화한 젊은 세대들에게 망각해가는 민족동질성, 참정체성을 줄기차게 상기시키는 것은 여기 작가 분들의 소명일 것이다. 강대국들 세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강제로 헤어졌지만 북녁 동포들은 한 핏줄이라는 족보 말이다. 나아가 통일된 내일, 새 대홍익大弘益의 역사를 써나갈 자랑스런 한민족, 참우리의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을 짖는 작가 의 사명을 되새김해보게도 되는 것이다.


한 배의 공동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스크린에 펼쳐놓은‘우연들이 기적으로 통합되는 마술’ . 이를 그 인드라망 그물도圖를 그저 영화적 몽상이라 치부해버리기엔 실제 삼라만상은 오묘한 신비 속에 운행한다. 도플갱어라는 영화적 설정이 아니더라도, 만유인력, 상대성이론, 분자론, 과학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연쇄 인과의 흐름 속에 명운을 공유하고 있다. 일례로 사주명리나 점성술에 의하면, 같은 날 태어난 이들은 출생년일시 타고난 네 간지와 오행의 기운조화나 우주에 펼쳐졌던 행성들의 배치, 궤도에 함의된 유사한 운력의 영향권 아래에서 예견 가능한 방향으로 흐르는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 본다. 거대하고 촘촘하게 직조된 연기, 인드라망의 그물 속에 부대껴 살아가는 유기체. 그럴진데 하물며 반만년보다 긴 도저한 역사를 공유한 한민족이 한 배를 탄 운명의 공동체임은 더 말할 나위 없으리. 


내 옆을 지나는 그대여. 영화의 두 여인처럼,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고, 당신이 없으면 완성된 내가 아니다. 하 어수선한 시절일지라도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에너지 법칙에 의해 에너지는 상호호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필히 손 맞잡아야만 한다. 한민족의 무궁한 가능성을 밝혀 성스러운 한반도가 주변국들 역학의 게임 판이 되는 역사의 시련을 극복하도록. 19 


박애의 연기론과 탐미주의로 빚어진 영감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예술의 진정한 가치와 고독한 존재의 기원을 사유케 하여 우리 내면의 근원적 고독을 위무해준다. 


문득, 그리운 날, 기묘한 떨림, 지상의 모든 장벽 너머의 그대… 오랜 그리움의 주파수를 읽어내는 그 누군가. 별의 이름을 호명하며 교신을 시도해본다-.




**<민족작가>(2020. vol.2. 4월)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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