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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뜨겁게 각인된 눈의 풍경 끝없는 순례의 술래잡기

-  테오 앙겔로풀로스(Thedoros Angelopoulos) 감독론


낮게 깔리는 단조음률처럼 쌀쌀하고 몽롱한 겨울의 나날들, 해마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영화, 아니 영상이 있다. 


 혹여 눈발이라도 흩날리면 반사조건처럼 떠오르는 데인 듯 뜨겁게 각인된 그리스 영화 <안개 속의 풍경>에서 순결한 첫 눈이 초현실적으로 강림하는 장면이 그 것이다. 유난히 눈이 적어 눈에 고파 갈망하는 이번 겨울, 영화사에 길이 남을 눈 내리는 장면을 남긴, ‘눈의 감독’이란 별명을 붙여주고픈 거장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이 그리워진다.

 99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타계 이후 매니아들은 일제히 “이제 20세기와 함께 위대한 거장들의 시대는 끝났다!”며 탄식했다. 이에 영화마다 제 2의 타르코프스키적 영상이라는 애칭으로 인류의 구원을 화두로 한 시적 형이상학과 사색을 담아내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우리 시대 마지막 영화거장', '영상시인’ 테오 앙겔로풀로스를 떠올리게 된다.   
 테오도르 앙겔로풀로스, 자신의 영화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들 사이의 사멸한 공간의 영화'로 규정하는 그리스 영화신성. 젊은 시절 아테네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했으나 이내 문학에 매료되어 문학을 수학, 다시 방향을 선회해 영화학교(IDHEC)에 입학함으로써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 와중에 좌파성향의 신문에 영화평론을 쓰고 그리스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독재에 항거하는 정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찍어왔다. 
 국내에는 부산 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후기작 <안개 속의 풍경>이 상영된 바 있고 호메로스의 고전 <오딧세이>을 패러디한 <율리시스의 시선> 또한 극장개봉 및 비디오배급을 통해 매니아들 사이에서 전파되어온 바 있다. 이 중 심금을 울리는 오보예의 배경음악으로 더욱 유명해진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겨울과 눈의 테마의 시적 영상 <안개 속의 풍경>. 그의 영화적 특성이 모두 용해되어 있는 본 작품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영화세계를 만나본다. 

유랑, 구원, 형이상학적 알레고리
 89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최우수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은 상징주의 시를 읽는 듯 몽환적이며 미국 고백파 시인들의 시처럼 순결하고 고통스런 어린 오누이의 여정이 담겨진 절망적인 감성의 로드무비다. 어린 두 남매는 아버지가 돈벌러 갔다는 독일을 향해 기차를 타고 막연히 떠나가지만 사실 남매는 사생아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부(父)는 그 곳에 없을 것이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시작된 이들의 여행은,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이 막막하고 두려우며 하나 둘 실체를 드러내는 삶의 여러 양태들은 결코 닿지 못할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불투명한 실존적 상황의 오누이는 무의식중에 세상에 대한 ‘빛과 어두움’이라는 종교적 화두를 안고 있다. 테오의 영화들은 모두 병든 사회사를 보듬으며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교 신화적, 형이상학적인 알레고리다. 두 남매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눈 내리는 결혼 축제의 들뜬 전경, 그 옆에서 죽어가는 말의 터져 나오는 헐떡임에 힘없이 울기만 하는 소년, 동물적으로 소녀를 강간하는 트럭 운전사는 절망적이다. 자신이 새라고 믿으며 날아가길 꿈꾸는 몽상가 갈매기 아저씨,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은 순수 예술을 고집하며 공연장조차 얻지 못해 헤매는 유랑극단, 그 노인들의 쓸쓸한 퇴장, 몰락과 소외, 좌절, 유아 강간, 성매매, 무책임한 성과 부, 어른으로서의 책임 회피, 힘겨운 미혼모 문제, 열차와 음식점에서의 금전 중심의 몰인정, 국경에서의 총성, 거리의 획일적인 군대 이미지 등의 어른들의 가련한 치부들이 차갑고 음울하게 비춰진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은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우울한 풍경은 그리스 현대사와 세기말을 보내는 인류의 공허한 심리에 관한 은유장치의 독해가 가능하며 또 현명하다 할 것이다. 이는 그의 영화작업들이 당시 독재정치 하에 있었던 ‘그리스’ 정권의 탄압과 비극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작업(‘그리스 3부작'- (36년의 나날들 72), (유랑극단 75), (사냥꾼들 77) 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러하다. 비밀리에 깐느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한 <유랑극단>은 유랑극단 배우들의 혁명상황을 체험을 표현했다. <그. 구세주 알렉산더>는 터키가 지배하던 시대부터 수세기에 걸쳐 구전되어온 전설 속의 해방자, 구세주인 알렉산더 이야기가 되살아나 민중해방을 외치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파시스트 독재자가 되어간다는 내용의 우화적 작품이다. 감독은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그리스 신화 속에서 따오는 등 현실을 고전?신화적 차원으로 확대, 알레고리 화한다. 

현대인들의 슬픔에 바치는 영상시 
 다시 영화 <안개..>로 돌아가, 고된 겨울 방랑 길에서 오누이는 소녀에게 첫사랑을 주는 따스함을 지닌 청년과의 잊을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그는 몰락해 가는 유랑극단의 단원이며 (테오는 유랑극단의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다. (<유랑극단> 등) 이는 실제 마임니스트로 영화에 마임이미지, 마임공연을 즐겨 차용한 <성스러운 피>의 컬트영화감독 조도로프스키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입대를 며칠 앞두고 불안 속에 삶의 의미를 회의하는 선한 청년이다. 청년과 함께 도착한 바다. 그 고요한 새벽바다에선 거대한 손 조각상이 이끌려 떠오른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의 명상적인 낯섦과도 닮아있는 이 유명한 장면은 무언가 희망을 쥐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고독, 빈손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운명, 그 그림자를 투영한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좌초해 버린 신, 구원의 손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삶에 상처받은 고독한 영혼이 어느 새벽, 그 비밀스런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처럼 꿈 같은 일련의 영상이미지들로 테오의 영화들은 때론 ‘초현실적’이라고 평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겉으로 드러난 두 남매의 방랑의 명분은 분명 아버지 찾기였지만 사실 그들은 세기말 부재하는 구원의 이미지를 줍는 술래잡기게임을 수행하는 순례객이다. 춥고 지친 여행길 안에서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짝 감춰진 상징은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갈망인 것이다. 감독은 이에 대해 결국 국경의 강을 건너고 안개 속의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나며 ‘태초에 빛이 있으라'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에 제시되는 ‘절대절명'한 동일명제의 테마.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영화들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작품들을 연상시킨다.)란 남매가 즐겨 뇌이던 옛 이야기처럼 점점 빛으로 싸이는 종교적 결말을 보여준다. 

유랑과 방랑은 감독의 천형
 앙겔로풀로스는 영화역사 100년을 맞이하던 해 <율리시즈의 시선>을 만들었고 이 영화는 제 48회 칸느대상 수상 및 타임지 선정 95년 세계 10대 영화로 선정된 명작으로 기록된다. 
 영화엔 신비 속에 남아있는 백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발칸반도에서 영화의 첫 새벽을 촬영하기 위해, 그리스 최초의 영화를 찾아다니는 영화감독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세기초의 시각은 세기말의 시각과 만나야 한다’(<율리시스의 시선>)는 믿음을 화두로 율리시스가 된 주인공 또한 명확한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긴 겨울의 표류하는 술래잡기 여정을 떠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순례를 통해 앙겔로풀로스는 다시 한번 ‘오래 전에 잃어버린 순수와 영원의 시간'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랑과 구원자 콤플렉스’는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천형이다. 위의 두 작품 속의 길 떠남은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순례과정이며 필연적으로 고독한 것이라는 전 인류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전매특허 격인 모노톤의 안개 뿌옇고 처연한 풍경들과 전망 없는 결말에는 감독의 세상에의 환멸을 엿보게도 하지만 동시에 넘치는 시정을 통해 환멸을 넘어선 꿈꾸는 이가 지니게 되는 마술적 힘 또한 느낄 수 있다. 세기말적 감성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공허와 절망감에 지친 인류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잠언 시적인 영상아포리즘으로 풀어내며 '세계를 찍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영화화'하는 시네아티스트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 
 어쩌면 강을 건네다 다른 차원, 장엄한 마지막 장면의 빛의 공간에서 빛과 함께 내세로 흡입되었을지도 모르는 길 잃은 두 천사. <안개 속의 풍경>의 두 남매는 감독의 영원한 테마인 ‘외로운 유랑과 술래잡기’의 명제로 지금 이 순간도 지구 어딘가를 끝없이 방랑하며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하여 그 어느 날 삶의 의미를 묻던 당신과 우연히 마주쳐 조용히 말을 걸어올 지도 모르겠다....
 


 필로모그라피
. <영원과 하루 1998>  . <안개 속의 풍경 1988>  . <뤼미에르와 친구들 1995> 
. <율리시즈의 시선  1995>  . <황새의 정지된 비상 1991> . <양봉업자 1986>   . <그. 구세주 알렉산더 1980> 
. <사냥꾼들 1977>    . <유랑극단 1975>   . <범죄의 재구성 1970>   . <1936년의 나날 1972>  

  (2003 월간 ROUND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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