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국이 싫어서>
여름만 되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삼면이 바다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 보고 싶어. 나는 한국의 여름이 지긋지긋하게 싫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여름이 되면 무조건 더위를 먹는 아이였다. 여름 중 하루 이틀은 반드시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앓아누웠다. 정도가 심하면 설사도 달고 살았다. 유독 몸이 찬 체질이라고 했다. 그래서 찬 음식은 어지간하면 피하라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름만 되면 얼음물을 찾았다. 내 나름대로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얼음물마저 없으면 무더운 여름, 정말 어느 날엔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나 더위에 취약하지만, 우리 집에는 작년까지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을 두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한여름은 힘들지만 여름은 원래 덥고, 그럭저럭 어떻게 어떻게 날들이 흘러가다 보면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족들은 여름의 더위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름의 더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여름이 여름인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만 되면 독립을 꿈꿨다.
그러다 드디어 올해 에어컨이 집에 들어왔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올해의 여름도 내겐 힘들었고 설사를 달고 살다가 며칠간 식사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밤에도 너무 덥고 습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새 잠에 들지 못하다 새벽녘쯤 찬 기운이 느껴지면 그제야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 그런 날들이 한 달쯤 이어졌던 어느 날 밤, 집을 박차고 나갔다. 어차피 잘 수 없다면 그 시간에 밀려있는 일이라도 해야 했다. 밤에는 집 앞 편의점에서 밀린 할 일을 해결했다. 당연히 그만큼 낮에 피곤했지만, 어차피 집에 있어도 잠들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느라 낮에 피곤한 건 똑같았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밤이면 집을 뛰쳐나가는 나를 보며 가족들은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이젠 사자. 엄마는 당장 다음 날 에어컨을 구매했고, 이틀 후 에어컨이 집에 들어왔다. 에어컨이 처음 집에 들어오던 날, 생각했다. 이제 난 살았다. 우리 가족에게 에어컨은 선택의 문제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에어컨은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 계나가 누구보다 이해됐다. 영화 내내 계나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춥지 않은 것. 그녀에게 한국의 겨울은 너무 춥다. 왕복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근길, 퇴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추운 보일러가 고장 난 집, 애인의 가족 앞에서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하는 게 신뢰를 잃는 일이라 설명하는 직장의 사수. 안 그래도 추운 한국의 겨울이 유독 더 시리게 느껴지는 여러 가지 이유들. 아마 계나에게 한국의 겨울을 등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계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 겨울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한국에서도 만족하지 못한 삶이 과연 해외에서는 만족스러울 것 같으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그녀는 그곳이 결코 낙원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떠났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망망대해 같은 영화다. 애써 외면하려 노력해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을 살아가는 각자 다른 청춘의 형태, 그들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모두 담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망망대해 그 어딘가를 표류하듯 주인공을 지켜봐야만 한다. 주인공이 한국을 떠날 때에도,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할 때에도,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결국 다시 떠나는 순간에도. 영화는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다 망라할 뿐, 무언가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한국의 침낭 신세를 벗어나고 싶어 따뜻한 나라로 향했지만, 결국 침낭 신세를 면치 못한 뉴질랜드 입국 첫날밤이라던지. 애인의 가족 앞에 서면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을 벗어던지고 떠나왔지만 뉴질랜드에도 인종차별주의자는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 같은 것들. 그녀가 원하던 따뜻한 나라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여전히 쓸쓸하다. 새로 정착한 땅에서 엄습해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한국을 떠나왔지만 버리지 못한 장녀의 책임감. 그 모든 것은 여전히 그녀의 품 안에 있다.
영화는 인물들에게 자꾸만 질문한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들은 답한다. 성공하는 것, 춥지 않은 것, 미세먼지 없는 대기, 가족이 건강한 것, 어쩌면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과대평가된 건 아닐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까지. 인물들이 답하는 행복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돌아보며 나는 자꾸만 먹먹해진다.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너무나도 소박한 계나의 행복론은 그녀가 돌아온 거리에 비해 한없이 작아 보이기 때문에.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본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기본적인 것들이 기본적이지 않은 것들과 차별당하지 않는 곳에서만 허락되는 조건부 사실이라는 것을. 결국 계나는 저마다의 행복이 가지는 조건의 간극이 크지 않은 땅을 선택했을 뿐이다. 리스크가 큰 대신 규모가 큰 행복보다 규모가 조금 작더라도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행복을 선택하고 싶었다는 건, 한국에서 그녀의 삶이 작은 행복도 보장하지 못했다는 반증인 것 같아 마음 한켠이 무겁다.
한 여행 에세이 작가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어릴 때는 그의 말이 모순 투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끝내 나는 아픈 청춘이 되어버렸고, 모든 여정은 결국 나에서 시작해 나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해 주는 재인의 연락을 받으며 계나가 애써 눈물을 참을 때 그녀가 결정한 선택의 무게가 내게도 느껴진다. 그녀의 선택이 도망치기 위함이었는지,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목적이었든 그저 기도한다. 그녀가 도착할 그곳이 그녀에게 조금 더 다정한 곳이기를. 그녀의 날씨가 내내 안온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