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년시절의 너>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반성문 같은 거다. 결국 나 역시도 과거를 잊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에 대한.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생각했다. 뻔하고 가볍다. 연기와 음악이 살린 영화네. 그러다 글을 쓰려고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학교 폭력이 가벼운 소재였나.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 폭력에 대해 꽤나 열변을 토했던 기억도 나는데 어쩌다 나는 이런 어른이 되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과거 학교 폭력을 어쩌지 못했던 학교가 생각났다. 매 학기 학교 폭력과 관련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현재 학교 폭력을 겪고 있나요. 학교 폭력을 목격한 적이 있나요. 빼곡한 질문 끝에 설문지는 항상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어떻게 하면 학교 폭력이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주관식으로 작성해야 하는 그 답안란은 유독 넓었다. 나는 그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약한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하는 설문지에 너네만큼이나 어른인 우리도 딱히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당신들도 다 겪었으면서, 이런 설문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자동응답기처럼 매번 묻는 질문이 짜증 났다. 그래서 그 질문에는 유독 날 서게 답했다. 학교 폭력에 해결 방법이 있다면 이런 설문조사 같은 건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런 게 궁금하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적혀있는 답안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익명 뒤에 숨어 세상을 비관하는 반항아1쯤으로나 생각했으려나. 그때 만약 괜찮은 개선방안을 썼다면 지금쯤 학교 폭력은 모두 근절되었을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영화는 영어 교육센터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첸니엔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was와 used to be의 차이점을 아는지. 어떤 학생이 답한다. was는 과거를 뜻한다고. 첸니엔은 학생의 답에 설명을 보탠다. was와 used to be는 모두 과거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used to be는 이에 더해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는다고.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유독 한 학생을 향한다. This is our playground, This was our playground,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그녀의 목소리로 반복되는 영어 예문 너머로 그녀와 샤오베이가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는 컷이 교차된다. 나는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지독히도 여운이 짙다. was와 used to be의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존재할까. 우리가 가진 기억은 미화된다. 아무리 힘들었던 기억도 대부분 흘러가는 세월만큼 아름답게 포장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모든 was가 used to be가 될 수 있을까. 어떤 기억은 was인 채로 기억 저편에 존재한다. 몇몇 기억은 태생적으로 used to be가 될 수 없으므로. 예를 들면, 학교 폭력의 기억, 부모로부터 버려진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잔혹 동화다. 입시라는 우선순위에 밀려 외면당하는 학교 폭력의 현주소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나서야 끝나는 학교 폭력의 비극적 결말, 한 명의 피해자에 대한 학교 폭력은 끝났을지언정 다른 피해자를 기어코 찾아내고야 마는 학교 폭력의 대물림, 아이들의 성벽 너머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끝내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는 주변 어른과 그로 인해 자신들만의 성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리는 아이들의 유대 관계. 그 어느 것 하나 잔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화이기는 했다는 것. 영화 속 첸니엔의 뒤에는 늘 샤오베이가 함께다. 하지만 잔혹 동화일지라도 결국 동화라고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첸니엔의 뒤에 샤오베이가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몇 명의 학교 폭력 피해자가 스러지고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쩌다 어른이 되었나. 보호받지 못한 채로 성장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끝내 지켜내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며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장 형사가 첸니엔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때, 다칠지도 모르는 정리되지 않은 바닥을 알면서도 다이빙하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혀끝에 씁쓸함이 맴돈다.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라고 엄마에게 전해 들은 사실을 조용히 언급하는 첸니엔을 보며, 대학에 가서 인생의 답을 찾고 싶다는 가능하다면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자꾸만 과거의 나를 돌이킨다. 한때는 학교 폭력에 대해 열변을 토했을지라도 나는 이제 학교 폭력의 현실 같은 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어른이 되었고, 한때는 대학이 정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 믿으며 입시에 매달렸지만 대학에 간다고 세상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 같은 건 이제 깨져버린 지 오래인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도 한때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무엇 앞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내가 가진 신념이 옳은 답에 가까워지도록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에 요즘은 자꾸만 헛웃음이 난다. 평생일 것만 같던 모든 것이 결국 변해간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 나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언제나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장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꼽자면 단연코 샤오베이의 마지막 대사다. 인생에 가정법은 없어. 또 하나, 우리 사이에 가정법은 싫어. 부모가 떠난 자리에 남아 혼자 자라나야 했을 샤오베이의 인생에 가정법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현실 속에서 가정법은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하거나, 어쩌면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닥쳐진 현실은 늘 냉혹했음을 나타내는 애달픈 문장에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만큼은 가정법이 존재한다는 뒤따른 문장의 전제된 조건이 인생과 우리를 별개의 범주로 해석하는 그만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인생, 즉 삶과 우리를 별개로 떨어뜨려 해석하는 것은 세상이 무너져도 결국 우리는 함께할 것이라는 하나의 고백임과 동시에, 가정법은 후회, 회한 같은 과거의 아쉬움을 전제하므로 우리 사이에 가정이 존재하더라도 이왕이면 돌이키지 않는 관계이면 좋겠다는 그의 말은 그러니 나는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결국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또 다른 고백이다. 나는 태어나 이렇게 마음 아픈 고백을 들어본 일이 없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난 그녀를 향한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당연한 영화적 설정일 수밖에 없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시간과 달리 행복의 시간은 순간이다. 서로를 마주 보고 짓던 웃음, 그의 등에 기대 느끼던 바람, 낮에도 함께 곁에서 걷고 싶다는 담백한 고백. 찰나의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흩어진다. 영화 내내 샤오베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세상은 곧 첸니엔 그 자체였음이 드러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녀가 자신과 다른 사람임을 자꾸만 인지한다. 그녀의 옆보다 뒤에서 걷는 자신의 모습에서, 정지 신호로 바뀌어버린 신호등 앞에서, 그녀의 노트에 적혀 있는 문장 앞에서. 하수구에서 살아도 별은 볼 수 있다는 문장을 읽은 샤오베이가 첸니엔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직감한다. 샤오베이는 이제 첸니엔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끝내 그녀를 위해 자신을 던질 것임을. 젊음이 빛나는 이유 중 하나는 맹목이 아닐까.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합리적인 근거 같은 건 뒷전인 채로 무엇이든 이끌어 나가는 힘. 맹목으로 지켜지는 구원 서사만큼 매력적인 판타지가 또 있을까. 너는 세상을 지켜, 나는 너를 지킬게. 태어나 단 한 번도 보호받아 본 적 없는 이가 누군가를 보호하겠다 다짐하는 것은 얼마나 절절한 고백인가.
숨 막히는 인물들의 교차 편집 장면을 넘어서 도착한 영화의 결말, 여전히 첸니엔의 뒤에 서있는 샤오베이를 볼 때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우리는 늘 상처의 영역에서만큼은 온전히 어른이지 못한 채 어른아이로 살아간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마지막 기억을 잊지 못하는 샤오베이처럼. 아픈 게 익숙하다는 말과 아프지 않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닌 탓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과거 기억에 발목 잡혀 평생 성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떠나버린 엄마의 기억을 끌어안고도 샤오베이는 첸니엔의 세상을 지켜주는 보호자로 자라났다. 다만 때때로 위로가 필요한 시간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를 위로했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함께 보호받지 못했던 첸니엔이다. 끝내 둘이 함께하는 결말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세상이 지켜내지 못한 두 아이들의 험난한 성장일기가 안쓰럽다.
영화는 수미상관 구조를 띤다. 가장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장소도 오프닝시퀀스와 마찬가지로 첸니엔이 근무하는 영어 센터다. 수업을 마치고 그녀는 자꾸만 시선을 붙잡던 학생에게 향한다. 이후 그 학생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그녀 뒤로 샤오베이가 뒤따라 걷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샤오베이는 여전히 그녀를 지킨다. 그렇다면 첸니엔은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꿈에 이르렀을까.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그녀가 세상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늘 자신이 아파보고 나서야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다. 첸니엔이 샤오베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때처럼.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와 비슷한 눈을 가진 아이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의 집까지 동행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녀의 행동이 이 넓은 세상에 고작 한 아이를 지키는 일에 불과해 보일지 몰라도, 보호받는 그 아이에게는 세상이 지켜지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꿈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는 무겁지만, 영화 내내 공익광고처럼 등장하는 자막, 내레이션, 인물들의 대사까지 전형적으로 학교 폭력에 대해 브리핑하듯 진행되어 흐름을 깬다거나, 몇몇 인물들이 다소 단면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등 그 밖에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단순히 아쉬운, 어딘가 부족한 영화라고만 평하고 싶지는 않다. 세밀한 감정 표현이 담긴, 때로는 폭발적인 배우들의 연기와 그 감정을 극대화하는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이 영화가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가정이 무수히 존재하더라도, 이 영화에는 구태여 가정법을 씌우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