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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계절, 가을에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by 개인

중학교에 다닐 때였나. 한 선생님이 수업 중에 말했다. 우리나라의 문학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한스러워,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대로 와닿기가 어렵다고. 그게 우리나라가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어린 나는 그게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타국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나라만의 역사가 만들어낸 독자적인 개념을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다는 게 남몰래 자랑스러웠다. 좀 자라고 나니 ‘한’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함을 알았다. ‘한’이라는 표현으로 소개되지 않아도, 풍파를 겪은 국가의 국민이라면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정도는 누구나 뼛속 깊이 새겨져 있으리라.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이 땅 위에서 우여곡절은 참 많기도 많아, 그로 인해 다치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난 후였다.


한강의 작품은 한 번은 펼쳐도, 두 번은 펼치기 어렵다. 그렇게 쌓여버린 작가의 책이 자그마치 내 책장에만 세 권이다. 내가 겪지 못한 고통을 책 한쪽 너머로 건네받을 때, 심장 한 켠에 쌓이는 부채감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녀의 글에서 눈을 감는다는 표현이 등장하면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주인공의 눈을 감는 행동 뒤로 이어지는 회상의 순간이 또다시 내게 부채감을 몰고 올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끝없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소재로 오늘도 글을 쓴다. 외면하는 우리의 뒤로 여전히 애도하는 그들이 있다는 것을 사력을 다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놀라움과 기쁨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와 동시에 먹먹함, 애처로움이 함께다. 누군가는 그녀의 수상을 두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며 펑펑 울었을 것임을 그녀의 글을 통해 몸소 느껴왔기 때문일 것이다. 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편협한 나의 세계를 벗어나, 나와 당신의 세계에 다리를 놓는 일. 작은 동방의 나라에서 일어난 마음 아픈 사건들이 그녀의 문장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갈 때, 부디 그들을 향한 애도도 함께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흘러가다 닿는 곳 끝에는 여전히 부딪히는 세상의 이념이, 부서지고 있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그녀의 문장이 또다시 사랑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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