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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사랑

넷플릭스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

by 개인

이영광 시인의 시 '사랑의 발명'에 대해,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무정한 신神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평했다.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히며, 자신이 생각하는 무신론자의 정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무신론자란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결국 무신론자란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는 않지만, 끝내 이 땅 위에 나의 신, 나만의 신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것이다.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그 누구라도, 왜 인간은 보장 없는 사랑을 어딘가에 한없이 쏟아부어야만 살아지는 걸까.


4주 동안 4막으로 나뉘어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는 사계절을 통해 애순의 삶을 이야기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철마다 사람이 들고 난다. 반갑지만 쓸쓸하고, 기쁘지만 슬프다. 이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을 경험하면서도 자꾸만 다음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곁에 무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갑지만 쓸쓸함이 닥쳐오는 순간에, 기쁘지만 슬픔이 너울지는 순간에, 언제나 바로 곁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남편 관식. 관식에게 애순은 곧 종교다.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다 신나고, 그녀가 울면 세상이 다 죽을 맛인 그를 보며 나는 끝내 자신의 신을 만들어내고야 만 무신론자의 사랑을 떠올린다. 지프차가 타고 싶고, 기타를 치고 싶고, 미국 여행도 가고 싶었던,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나의 신이 보여주는 웃음 한 번이 더 값졌던 그의 소박한 행복론에 나는 자꾸만 사랑에 인색해지는 세상을 등진 채로 보장 없이 쏟아붓는 사랑을 믿고 싶어 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게도 나를 종교로 두는 사람들이 있다. 반박의 여지없이 부모님이다. 신이 모든 인간의 곁에 머무를 수 없어 어머니를 보냈다는 유대인의 격언처럼 신은 아직 다 크지 못한 내 곁에 부모님을 묶어두었다. 어린 동명을 떠나보내고, 한겨울에 추울까 자식이 누운 자리를 끌어안은 애순의 심경을, 마음속에서 내내 아이를 키운 관식의 심경을, 나는 어렴풋이 넘겨만 짚는다. 지난날, 관광지에서 길이 엇갈려 그 동네 뒷산을 타버린 나를 찾으며 부모님은 심장이 백번쯤 떨어졌다고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다 큰 자식을 찾아 헤매느라 얼굴을 다 적신 눈물 앞에서, 연락도 못하게 내 핸드폰은 왜 챙겨 갔냐고 따지려던 철없는 마음은 쪽을 못 쓰고 산산이 부서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간 지나면 다 돌아올 거, 다 큰 자식을 뭐 그렇게 애타게 찾았느냐는 질문에 엄마는 나를 흘겨보며 답했다. 네가 부모 마음을 알리가 있어. 부모는 자식이 죽었다고 해도, 흉한 꼴 더 당할까, 죽어서도 아플까 몸이 먼저 튀어나가는 게 부모다. 이쯤 되면 일평생 무신론자이던 우리 부모님은 어디 가서 종교가 있다고 답해야 하지 않나 싶다.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그 누구라도, 왜 인간은 보장 없는 사랑을 어딘가에 한없이 쏟아부어야만 살아지는 걸까. 이제 보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보장 없는 사랑을 어딘가에 쏟아부어야만 인간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보장 없는 사랑을 어딘가에 한없이 쏟아붓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는 내내 그런 사랑을 꿈꾸므로. 그리고 더러 누군가는 운이 좋게도, 그 같은 사랑을 통해 그만큼 자라났으므로. 그들의 요새는 겉보기엔 듬성듬성 허름한 듯 보여도 그들의 방식으로 가장 단단한 것이었다.


따뜻한 듯 보여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봄날 속에서도, 살을 태워버릴 정도로 따가운 여름날의 태양 아래서도, 노랗고 붉게 혼신을 다해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끝내 져 버리는 쓸쓸한 가을날에도, 다가올 봄날을 꿈꾸지만 아직 따뜻한 봄날은 너무 먼 시린 겨울날에도. 처음 만나는 사계절을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지나온 그들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사를 두고, 고작 이제 봄인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응원을 받는다. 그들의 사계절을 통해 지켜진 나의 봄날을 다시 되새기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지나친 기성세대의 가족주의 낭만에 갇혔다고 해도, 과거 시대상 속의 여성을 보여주기에 급급한 작품이라고 해도, 내가 이 작품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다. 슬프지만 아주 슬프지만은 않은, 당신의 계절 속에서 자라난 나의 모든 지금을, 나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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