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헬싱키
다음 여행지를 스페인으로 정하게 된 데에는 남부 지방의 이미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 곳곳마다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 나무와 시에스타로 낮에는 나른하고 밤에는 활기찬 사람들. 그러나 남부 지방을 속속들이 여행하고 싶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이상일뿐이었고 7일 남짓한 여행기간 동안 도시 간 이동시간을 따져보니 바르셀로나 한 도시에만 여유 있게 머무르는 게 가장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탁 트인 해변이 있고 가우디가 남긴 유산이 이 곳 저곳 산재되어 있는 스페인의 큰 도시, 바르셀로나에서만 온전히 시간을 쏟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여행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단 하루 앞둔 전날. 9월 말 모든 준비가 완료될 예정이었던 프로젝트는 밀리고 밀려 업무가 몰아치는 바람에 간신히 밤 10시가 넘어 퇴근을 하는 길이었는데, 집 근처 지하철 역에서 막 도착해서 나왔을 때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태풍이 몰아치고 눈발 날리는 와중에 공항에 발이 묶인 여행객들, 뉴스에서 간간히 보도되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비행 지연은 비단 지독하게 운이 나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 시작도 전에 이런 큰 이슈를 달랑 문자 한 통으로 통보해버리다니.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검색해 보니, 공석이 있는 경우 좌석이 업그레이드될 수도 있다고 했다. 상담원도 퇴근했을 밤 11시, 어차피 이리저리 고민해봤자 내일 공항 카운터에서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으므로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 수 있다며 다독이며 일단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다음 날 공항 카운터에 사정을 말하니 해당 비행 편은 영국 현지의 날씨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으며 내일 아침 7시 경유 비행기밖에 없다고 했다. 업그레이드된 좌석을 제공하는 경우도 물론 있으나 여분의 좌석이 없었다. 예기치 못하게 영국에 떨어져 1박 숙소 비용이 더 들 수 있는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영국 여행을 해볼까 하며 혼자서 이런저런 대안을 떠올리던 중 도대체 어디까지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직원들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출발/경유 항공편을 모두 공석이 있는 핀에어로 맞춰 주겠다고 안내해 주었다. 핀에어 항공은 평소에 이용자들의 리뷰가 좋은 편에 속하는 항공사였고, 비행시간도 다행히 20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비록 화장실과 너무 가깝기는 했지만 맨 앞줄이라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착륙 시간이 되어 창 밖을 쳐다보니 침엽수림이 줄지어 늘어서있는 생소한 광경이 들어왔다. 10월의 핀란드는 벌써부터 입김이 나오는 초겨울 날씨였고, 나는 아직은 이른 서늘함을 느끼며 차분히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경유시간을 쓰기로 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 늦은 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묵기로 한 호스텔은 공항버스로는 한 번에 갈 수 없어 번거롭지만 지하철로 환승해서 가기로 했다. 호스텔까지 공항버스에서 하차 후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캐리어를 끌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지라 했던 선택이지만, 공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늦어질수록 과연 맞는 결정을 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호스텔이 있는 Diagonal 역을 가기 위해서 한 번 환승을 거쳐야 했는데, 무거운 캐리어를 끌면서 걷고 있으니 뒤에서 친절해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면서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어디에서 왔나요, 바르셀로나는 뷰티풀 한 도시죠 와 같은 말을 주고받다 갑자기 등 뒤가 꿈틀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다른 남자 세 명 정도가 뒤로 멘 백팩의 지퍼를 살살 열고 있었다. 그 상황을 알아차리자마자 남자들은 가방에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리고 도망쳐버렸다. 내가 입었던 재킷은 양쪽 가슴에 크고 깊은 주머니가 달려 있어서 그 안에 있던 휴대폰과 지갑은 안전했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죄다 떨어뜨리고 가는 바람에 다행히 분실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분들이 그들이 떨어뜨리고 간 내 여권과 안경 통, T-10 티켓 등을 주워주고 잃어버린 건 없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살갑게 말을 걸어주던 그 사람 역시 자취를 감춰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하철에 탔다. 칸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내 짐을 예의 주시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고 혹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내가 곤경에 처할 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백팩을 앞으로 메고 꼭 안은 채로 목적지까지 향했다.
11시가 거의 다 된 늦은 시간에 도착한 호스텔의 직원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직원은 이 곳 저곳을 보여주면서 조식 시간과 같은 호스텔의 룰을 알려 주었다. 내가 앞으로 여행을 할 동안 지낼 공간은 도미토리 방의 구석진 위치에 있는 1층 침대였다. 좁고 네모난 공간에 피곤한 몸을 눕히니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아찔해졌다. 그들이 뒤졌던 내 백팩에는 여권이 들어 있었는데 만일 요란한 캐릭터 케이스가 씌워져 있지 않았다면 단박에 여권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손에 쥔 채 도망갔을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의 행동을 알아차리던 말던 날 때려눕히고 물건을 싹 다 털어가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혼란스러웠지만 비관적으로만은 볼 수 없었다. 비록 경유 비행 편이 취소되어 걱정을 했지만 대신 쾌적하게 다른 비행 편을 타고 갈 수 있었으며, 강도에게 당할 뻔했지만 도둑맞은 물건 하나 없이 낯선 여행지에선 늘 모든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본격적인 여행을 앞두고 얻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운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헷갈리는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