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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May 23. 2018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이번 여행도 필름 카메라

여행을 온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는 왠지 관광객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짐으로 꽉꽉 들어찬 배낭과 먼지투성이 운동화는 숙소에 던져놓고 새로 장만한 예쁜 원피스를 입은 채 살랑살랑 산책하듯이 걷고 싶다. 두 손은 가볍고, 여유 있는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여행하고 싶은 내 작은 소망을 항상 가로막는 것이 있다. 바로 한쪽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필름 카메라다. 


나의 미놀타 카메라는 크고 둔탁해 보이는 검은색 바디를 자랑하고 있다. 여행지에 가져갈 때면 카메라의 무게는 물론, 한 롤로는 부족하기에 갈아 끼울 필름들을 주렁주렁 들고 다녀야 하며 열심히 찍고 난 필름은 스캔 업체에 직접 들고 가서 맡겨야 한다. 

휴대폰이 카메라를 완벽히 대체하는 요즘 세상에 이렇게 미련한 취미가 또 있을까. 이 애증의 필름 카메라는 여행지에서도 종종 말썽을 부리곤 했다.


#1 첫날부터 고장나버리다

타이베이의 용산사는 화려한 색채와 매캐한 향 냄새로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기도를 하거나 점괘를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사원의 모습을 담으려 했는데, 셔터가 여느 때처럼 깔끔하게 눌리지 않고 반만 눌린 채 작동을 멈춰 버렸다. 아무리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작동이 되기를 빌어 보아도 셔터는 반만 눌려진 채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카메라가 완전히 고장 났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둘째 날, 셋째 날 필름으로 미처 담지 못한 아쉬운 풍경들이 계속 눈앞에 펼쳐졌다. 안타깝지만 처음 갔던 대만 여행은 첫날의 중정기념당과 용산사의 모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중정기념당 근위병 교대식
이 컷을 끝으로 여행 첫 날 그 기능을 다하고 말았다
#2 교토 철학의 길과 고양이

그 날 철학의 길은 빛이 아주 좋았다. 중간에 고즈넉하고 멋진 은각사도 구경하고, 길게 이어진 길을 산책하며 한창 초록빛을 내뿜는 풀과 나무 사진을 찍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여러 마리 모여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광경도 빠짐없이 놓칠세라 카메라로 찍었다.


철학의 길을 절반쯤 지났을까, 한 컷을 찍고 난 뒤 항상 돌리는 레버가 평소와 달리 너무 가벼웠다.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이를 인정하고 불안해지기 싫었으므로 애써 무시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한 롤의 36컷이 넘었는데도 계속 셔터가 눌리고 있었다. 셔터가 계속 눌려 컷 수가 늘어날수록 나의 불안함도 증폭되기 시작했다. 물려놓은 필름이 카메라 안에서 빠져 계속 헛돌고 있던 것이었다.


오늘 이 길에서 뿌듯하게 찍었던 모든 것들은 '날아갔다!' 허겁지겁 새 필름으로 갈아 끼우고 다시 고양이들을 보러 간다 한들, 똑같은 장면을 담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허무해져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던 그 날이 못내 아쉬워 비슷하게라도 재현해보고자 몇 년 후 다시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찾았다. 

그 때 그 고양이는 아니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 카메라

하필이면 여행지에서 말썽을 부린 탓에 마음 졸이게 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필름 카메라를 꼭 챙기고 있다. 한 컷에도 정성을 들여 참을성 있게 한 롤을 다 채운 다음 결과물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늘 실망시키지 않는 포근하고 따뜻한 색감의 필름으로부터 항상 위안을 얻는다. 좀 무겁고 귀찮으면 어때. 예쁜 사진으로 이미 그 소임을 다 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던 필름이 최근 단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쩜,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필름 사진을 찍겠다는 것뿐인데 취미를 유지하는 게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일일까. 느리디 느린 필름을 이해해주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빨라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한 해가 갈수록 이 간격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부디 이 번거롭고 불편한 취미를 오래오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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