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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Jul 04. 2018

퇴사 후 시간은 열심히 간다

새로운 시작은 쓸고 닦으며

좋은 날 되시구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날이길 바라겠습니다.


퇴사를 알리는 마지막 메일에 회신해주신 거래처 과장님의 말을 계속 되새겨 보았다. 


새로 이직하게 된 회사는 신규 프로젝트를 막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급하게 입사를 요청했던 그들의 사정으로 동료들과 아쉬워할 새 없이 금요일 퇴사를 한 후 바로 월요일에 새로운 곳으로 출근했다. 적응하는 한 달이 정신없이 지나자마자 부서는 변경되었고 팀원은 나보다 늦게 입사한 팀장님과 나, 두 명이었다. 무궁무진한 문의 메일과 제안 요청 건이 쌓이며 점점 업무에도 미친 듯이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입체 서라운드로 혼나는 날들과 도라에몽의 서랍이 있다면 세 달 전의 내 뺨을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스쳐 지나가기를 반복, 결국 차근차근 성장하겠다는 야심 찬 꿈은 접은 채 백기를 들었다. 세 달간의 짧았던 이직 생활은 낮아진 자존감과 50장이 넘는 퇴근 택시 영수증으로 남게 되었다.


늘 마음이 급했다. 정체되고 싶지 않아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직장에 하루빨리 가고 싶어 했고, 정말 내 뜻대로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로 이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경력은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아무리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없다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다. 정말 너무하네!

이직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회사 동료 분들, 축하해 준 친구들에게 퇴사하기로 했음을 공표했다. 어리둥절해하며 놀라는 분들 반,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들어왔기 때문에 잘 했다며 위로해 주는 분들 반. 이직 축하로 여러 분들이 선물해주셨던 커피와 디저트 기프티콘은 퇴사를 하고 나서야 드디어 다 쓸 수 있었다. 

이왕 경력에 구멍이 생긴 김에 두 달 동안 쉬기로 결심했다. 하긴, 어떤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나는 쉬어야 했다. 바빠서 못했다는 핑계도 안 먹힐 누구의 방해도 없는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를 한 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에 돌입했다. 베개에 잠시 머리만 댔다 해만 뜨면 바로 출근하곤 했기 때문에 그동안 주인 없는 것처럼 방치되었던 방은 역시나 책상과 바닥에 엄청난 먼지가 쌓여 있었다. 조그마한 방에 이렇게 저렇게 잘 구겨 넣었던 조그마한 가구들을 거실에 잠깐 내어놓고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빨아들인 뒤 물티슈로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냈다. 


내친김에 가구도 재배치하기로 했다. 이미 집주인이 이미 리모델링을 마친 집이기 때문에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새하얀 붙박이 옷장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가구인 책상과 침대의 방향을 각각 다르게 배치하니, 햇빛이 비추는 창이 책상을 정면으로 바라봐 내 시야도 더 밝아진 느낌이다. 

청소를 마치고 달라진 방 책상 앞에 앉아 보았다. 회사에 다니느라 하고 싶지만 시작도 전에 포기해야 했던 게 참 많았는데. 노트를 펼쳐놓고 쉬기로 했던 두 달간 할 것들을 리스트로 만드니 마치 모두 해낼 것처럼 기분이 한 층 산뜻해졌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까? 앞으로 펼쳐진 날들도 좋은 날일 수 있을까? 퇴사 후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오늘도 열심히 제 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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