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하나도 똑같은 게 없는 현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던 시간은 비로소 끝났으니 행복한 여행으로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나의 묘안은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하기'였다. 촘촘한 계획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처럼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른 채 물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며 유유히 수영하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이상적인 휴양을 즐기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방콕의 호텔에서 묵기로 결정한 다음엔 고민할 것 없이 우선 집 앞의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두 달의 기간 동안 열심히 수영 실력을 다져놓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당장 캐리어에 짐을 싸들고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물에 뛰어들 순 없었으므로. 호텔의 수영장이 운영되는 시간을 체크하고 도착하는 날부터 돌아가는 날까지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2회씩 알차게 수영을 하리라 야심 차게 계획을 세웠다.
다음 수순은 수영복을 사는 것이다. 이미 강습 때 입는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이 있었지만 보다 화려한 색의 예쁜 비키니와 위에 걸칠 가벼운 로브를 골랐다. 이곳저곳 튀어나온 살을 감출 길이 없는 자비 없이 조그만 사이즈의 비키니를 보니 토실토실하게 찐 살을 빼야 하는 과제가 당장 눈 앞에 떨어진 것 같았다. 아침 수영을 열심히 하고 돌아와 점심에 전신운동, 저녁에 팔과 하체 스트레칭 하기. 한결 가벼워진 몸매로 비키니에 딱 맞는 몸매를 만들겠다는 목표 달성에는 딱이었다.
그러나 수영을 얼른 잘 하고 싶은 나의 조급한 마음만큼 진도는 순탄히 나가지 않았다. 팔을 쭉 펴고 다리는 열심히 첨벙거려야 하는 자세가 완전하지 않은 탓에 킥판을 든 채 발차기 연습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자유형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니 배영까지는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기대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비키니 입기 목표에 대한 진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점점 덥고 습해지는 날씨는 운동에 대한 의지를 뚝뚝 꺾었고, 여행 전 날 사 두었던 비키니를 한 번 입어보니 역시나 허벅지까지 완벽하게 덮는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밖에 의지할 길이 없었다. 점심 저녁 운동도 빈둥거리며 밥먹듯이 빼먹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건 언감생심, 게으른 나 자신을 반성하며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캐리어에는 우중충한 원피스 수영복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도착한 호텔은 역시나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넓은 수영장을 자랑하고 있었고, 울창한 나무와 싱그러운 잔디 위에 선베드가 넉넉하게 놓여 있었다. 구역별로 나뉜 수영장을 살펴보며 어느 곳이 가장 편하게 수영을 즐길만할까 곰곰이 살펴보고 아주 오픈된 장소도 아닌 데다 조용해 보이는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친구끼리 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알록달록 예쁘게 비키니를 차려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까르르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어색해져 고개를 돌리니 다른 구역에는 연인이 둘 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왠지 내 원피스 수영복이 한 층 더 칙칙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물에 들어간 지 십분 정도 지났을까, 발을 마구 첨벙 대며 혼자 시끄럽게 구는 건 왠지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도, 즐겁게 사진 찍는 무리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도 어색한 상황. 수영장에서 진지하게 수영 연습을 하겠다는 나의 태도가 오히려 격식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 때쯤 물에서 나와 수건을 덮고 선베드에 누웠다. 키가 큰 야자수와 말끔하게 구름이 걷힌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새들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때로는 선베드에 앉아 지저귀곤 했다. 책을 집어 들어 잠깐 책장을 넘기다, 몸에 달라붙은 물기 때문인지 방콕의 더위보다 선선한 바람에 살짝 기분 좋게 낮잠이 들었다.
비키니를 입어도 당당할 수 있는 몸매, 완벽한 수영실력, 수영장의 분위기 어느 것 하나 내 기대와 같은 게 없었지만,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여행이 어디 있으랴. 선베드에 누워 즐겼던 시간도 충분히 좋았으므로 이상적인 휴가의 모습은 다음 여행으로 잠시 미루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