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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Jan 18. 2024

글감이 그대를

[에.이.쓰 4] 글감과 숙성 

글감을 찾는 것은 글 쓸 결심을 하는 것이라고 저번 글에서 언했다. 오늘은 글감 찾은 이후 글을 쓰는 실제 작업까지에 이르는 과정을 나누겠다. “아니, 글은 도대체 언제 쓰는 거야?”라고 물으신다면 넓은 아량 베풀어주시길.     


여러 글감 중 하나를 선택하면, 우리의 뇌는 그 글감을 집중하고 기억한다. 글감을 선택하는 순간 글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우리는 그 글감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떤 글을 만들지 숙고하는 것이다.     

 

그 글감이 빛을 발하기 위해, 즉 온전한 글을 만들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누가 내게 어떤 얘기를 건네면, 글감과 어떻게 연결할까 고민한다. 영화나 소설을 봐도, 노래를 들어도 글감에 어떻게 버무릴까 머리를 굴린다. 약간 과장하자면 세상이 그 글감을 중심으로 도는 것만 같다.     


바로 글감이 숙성되는 과정이다. 글감을 선택했을 때 노트북을 켜고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작가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약간 느긋함을 가져야 한다. 매주 수요일 밤 10시까지 글을 써서 보내야 하는 전업 작가라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은 느긋해도 된다. 글감을 찾았다면 글의 절반은 쓴 것이다. 왜? 글감을 찾은 게 글의 시작이고, 시작은 반이니까. 나머지 절반을 잘 끝마치기 위해 숙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숙성의 방법이 따로 있을까. 세상이 글감을 향해 돌고 있는 순간을 잘 포착하면 된다. 물론 바쁜 세상에 휩쓸려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상황에서 “팔자 좋은 말 아니오?”라고 한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그래도 “잠깐이나마 생각할 시간은 있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대꾸할 수밖에.     


글감의 숙성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글을 쓰면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 완전히 숙성이 끝나지 않았어도 써도 된다. 글을 쓰면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튀어나오고, 글감이 확장되거나 다른 글감과 합쳐지기도 하는 놀라운 기적까지 경험할 것이니.     


그렇다면 얼마나 숙성해야 하는 걸까. 글감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것은 몇 시간이면 대충 글의 실타래가 풀린다. 어떤 것은 사나흘이나 일주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떤 글감은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기도 한다.      

내 경우는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안 계셨다는 것이 아킬레스건이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해 나도 아들을 낳고 철부지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글 쓸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글.      


그가 돌아가셨던 일을 묵묵히 썼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장례식의 경험도 서투르게 적었다. 절반쯤 썼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랏, 이게 무슨 일이지?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휘감았다. 슬픔도 아닌, 서러움도 아닌... 이후엔 내가 쓰는 게 아니었다. 글감이 나를 쓰도록 이끌었다.      


깨달았다. 나를 기다려왔다는 걸. 찾아왔다는 걸. 그것도 거의 삼십 년만에. 내가 부러 숙성하지 않았더라도, 이 글감은 언젠가는 글로 나올 때를 위해 잠잠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어떤 글을 쓸까 고민 깊은 사람이 있는가. 당신에겐 써야 할 글감이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 글로 수확할 수 있을 만큼 숙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 글감을 옮겨라. 그때부턴 글감이 그대를 쓰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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