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의 새로운 의미

낭만 사전 #13 절벽 / 채석강에서...

by Philip Lee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정호승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중


채석강(彩石江). 변산반도 맨 서쪽에 있는 해안 절벽과 바닷가를 일컫는다. 원래 채석강은 중국 당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곳이다. 그 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흩날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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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을 거닐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파도가 끊임없이 몰려와 해안에 부딪친다. 해안 위쪽으로는 거무스름한 절벽이 쭉 이어진다. 무려 1.5Km. 절벽은 오랜 세월 바닷물에 깎인 퇴적층으로 이루어졌다. 수천 년 시간의 속살을 부끄러움도 없이 보여준다. 절벽을 이루는 바위는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절경. 고작 ‘웅장하다, 대단하다’밖에 이곳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빈약한 언어가 아쉬웠다.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절벽(絶壁), ‘끊어진(絶) 벽(壁)’. 모든 희망이 끊어진 듯 위험한 느낌이다. 하지만, 절벽 아래쪽은 어떨까? 거센 파도와 성마른 바람을 튼튼히 방어해 준다. 내 곤한 몸을 편히 기댈 수도 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진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피난처가 되지 않나.


갑자기 절벽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더 이상 절벽이 아니었다.

그건 벽이었다! 안전한 벽.


그 벽에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놓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원망했던 이름들을 지웠다. 우쭐대며 조금이라도 더 높게 살려 했던 헛된 욕심도 두고 왔다.


또 만날 것이다. 기어이 올라가야 할 절벽을...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이리라. 힘들게 올라간 만큼, 그만큼의 기쁨과 보람도 따르겠지. 순간, 거짓말처럼 햇살 드리운다. 절벽이 벽이 된 이 순간을 하나의 표지로 삼는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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