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중일기 09화

"쓸 데 없는 것 사지 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by Philip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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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업을 4년 반째 해 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주고객인 문구점을 한다. 이제는 아이의 눈빛만 봐도 준비물을 살 건지, 놀거리를 살 건지, 아니면 먹거리를 살 건지 감이 온다. 준비물도 종류가 다양하다. 색종이만 해도 종류가 열 가지가 넘는다.


그렇기에 신학기의 아침 장사는 전쟁이다. 각종 준비물을 사러 오는 아이들로 가뜩이나 좁은 문구점은 할인판매하는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구석구석 숨이 있는 다양한 준비물의 위치를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각도기 주세요. 영어노트, 일기장, 서예붓, 고무찰흙, 줄넘기 주세요....” 아이들이 말하면 바로바로 찾아주어야 하기에 위치 파악은 기본이다. 그러고 보면, 자영업자의 기본은 아무래도 ‘민감함’임은 분명하다. 고객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고, 곧바로 채워줘야 하니까.


그런데, 겪어보니, 민감함만 있으면 안 된다. 둔감함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민감함보다 더 중요하다. 무슨 말이고 하니, 손님들의 말을 모두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서비스업을 해 오신 베테랑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 할 것이다.


고객의 말 중에 귀담아 들어선 안 되는 말이 있다. 주로 손님들의 혼잣말이다. 아니면, 같이 온 사람들과의 대화. 그 말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그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


대개는 아이와 엄마가 같이 왔을 때,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다(아빠는 이런 말을 잘 안 한다. 집에 가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장난감 등을 고를 때, 엄마는 근엄하게 말한다. “쓸 데 없는 것 사지 마!” 이 말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필요 없는 것 사지 마”, “도움 되는 걸 사”, “그건 너한테 필요 없어.”, “그걸 왜 사니?”


처음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가게에 적응되고, 손님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여유가 생길 때쯤, 그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가 잘 안 들리다가 갑자기 좋은 성능의 보청기를 낀 듯 내게 들려왔다. 그것도 너무 크게. 계속 들리니까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면 다른 데 가서 쓸 데 있는 것 사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얘기하며, 나는 표정이 굳어진다. 그렇다면 쓸 데 없는 걸 팔고 있는 나는 뭔가. 아이들에게 도움 되지 않는 것만 골라 아침부터 한보따리 사와서 잔뜩 팔고 있는 나는 뭔가.


김이 빠진다. 회의가 생긴다. 물론, 쓸 데 없는 게 있을 수 있다. 나도 처음 문구점을 시작할 때, 파는 물건을 보고 놀랐다. 이름부터 괴상한 액체괴물(지금 열풍인 슬라임의 조상?), 본드를 부는 것만 같은 ‘칼라풍선’, 겉모습만 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불량식품’, 집안의 유리란 유리는 모조리 깨부술 것 같은 ‘새총’, 왜 모으는지 모르는 각종 카드(고학년은 유희왕, 저학년은 포켓몬).... 이렇게 쓸 데 없는 것을 모조리 모아둔 곳은 문구점 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만약 문구점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이런 것 사지 말라고 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공부에 도움 되는 노트나 연필을 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분명 쓸 데 없는 건 쓸 데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어른이 보기에’. 3~40대 부모가 보기에 그것들은 너무 조악하고 이상하다. 그렇기에 쓸 데 없는 것이라 쉽게 말한다. 그렇지만, 아이들한테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은 쓸 데 없지 않다. 오히려 제일 필요한 물건 아닌가. 가끔씩 용돈을 모으고 모아 그것들을 사러 오는 애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하다.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딱 까놓고 말하자면, 우리 어릴 때를 생각해 보자. 동네 조그만 문방구에서 딱지랑 카드를 한 번이라도 사지 않았었나.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종이 인형을 산 적은 없었나. 각종 장난감, 불량식품이 모여 있던 그 곳은 쓸 데 없는 물건의 집합소가 아니었다. 보물섬이었다.


쓸 데 없는 것 사도 된다. 아이들은 ‘아 정말로 갖고 싶어 샀는데, 이렇게 쓸 데 없는 것이었다니...’ 눈물 흘리며 마상(마음의 상처)을 입지 않는다. 설사 그런 것을 샀더라도 “이거 생각보다 재미없네.” 말한 뒤, 또 다른 쓸 데 없는 것에 기웃댄다. 애들이 그렇다.


불량식품도 마찬가지. 슈퍼에서 맛볼 수 없는 싸고 맛있는 과자를 사러 아이들은 몰려온다. 아폴로 한번 먹는다고, 라면스낵 한번 먹는다고 성장기 아이들이 영양 불균형을 초래해 극단적으로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그렇다고 내가 불량식품 애찬론자는 아니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는 게 아니라, 재미를 먹는 것이다. 그저 재미있어서...


오늘의 결론은 이것이다. 어른의 재단으로 아이들의 기호와 자유를 제한하지 말 지어다(너무 도덕책인가). 어른의 (때로는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쓸 데 없다. 이렇게 말하니, 가슴이 뻥 뚫린다. 하하, 역시 잦은 스트레스에는 글쓰기가 만병통치약이다(혹시 도움 필요하신 분은 연락을). 자, 오늘도 쓸 데 없는 것 팔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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