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전이되지 않도록
“포켓몬 새 거 들어왔어?”, “이번 유희왕 좋은 게 많이 들었대.”, “새로 나온 슬라임, 촉감이 좋대.”, “(비비탄) 총이 간지 나던데.”...
철없는 초등학생의 대화가 아니다. 문구점을 하는 나와 아내, 그리고 문구 도매업을 하는 여동생과의 단톡방 대화다. 셋의 나이를 합하면 100을 쉽게 넘긴다. 전혀 3~40대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대화를 우린 매일 하고 있다. 쓸 데 없는 것 같지만, 중요한 대화이다. 우리 생계가 걸렸으니까.
단톡방에서 많이 하는 대화가 또 있다. 하루의 힘들었던 일을 말하고, 힘들게 했던 진상 손님을 말하기도 한다. 일종의 넋두리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뱉었던 누군가처럼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다.
얼마 전 일이다. 손님이 없던 한가한 때, 우리만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역시 단톡방). 그날따라 나를 짜증나게 하던 일이 많았다. 어느 때처럼 그 일들을 세세히 고자질했다. “오늘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아까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 “누가 왔다 갔는데...” 미주알고주알 그날의 일을 세세히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동생이 말한다.
“은서와 비슷한 분위기야. 요새.”
순간 ‘헉’하며 3초간 몸과 마음이 정지했다. 은서는 동생의 중1 딸이다. 요즘 심한 병을 앓고 있다. 북한군도 벌벌 떤다는 중2병. 모든 게 불만이고 짜증이다. 중2병 환자를 거의 처음 접한 나는 조카를 만날 때면 조심하게 된다. 말도 가려 한다. ‘이 말을 하면 괜찮을까’하며 최소한 두 번 시뮬레이션을 하고 말을 꺼낸다(되도록이면 안 꺼내는 게 좋다).
내가 그런 조카와 같은 분위기라니... 순간 아찔했다. 세상 모든 엄마아빠를 가슴 아프게 하는 병세가 내가 갖고 있다니... 내가 요즘 짜증을 내도 너무 많이 내고 있구나.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구나... 뒤이어 나도 답을 했다.
“화난 건 아닌데 그래보였다면 미안. 나는 42병인가 봐...”
씁쓸한 농담이었다. 40대를 지나면서 겪게 되는 병.... 내 모습을 누군가가 찍어 내게 보낸다면, 손사래 치며 멀리할 것이다. 입술은 항상 꾹 닫혀 있고, 항상 누군가를 째려보듯 날카로운 눈빛. 도무지 올라가지 않도록 누군가가 잡고 있는 듯한 입꼬리. 조그마한 것에도 쉽게 화를 내고 마음에 꾹 담아 놓는다.
아, 이런 모습을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 같다. <토이 스토리>의 정의 넘치는 인싸 ‘우디’라면 좋겠는데, 완전 아니다. <인사이드 아웃>이다. ‘까칠이’. 이름부터 까칠하다. 녹색의 새침한 캐릭터. 모든 게 자기 마음에 들어야 된다. 누군가 내게 충고를 한다면. “어쩌라고”라고 답을 할 것만 같다.
그러다가 조금씩 분노게이지가 오르면,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다. 버럭이. 항상 화나 있고, 폭발하면 불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까칠이와 버럭이를 오락가락한다. 기쁨이는 휴가를 갔는지 찾기 힘들다.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나는 원래 온유하고 ‘화’는 요일에만 붙는 단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손님을 상대하다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많이 만나고, 진상도 여럿 만나서 화가 많아진 거야.’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변명이었다. 아마 다른 일을 했어도 마찬가지로 화를 달고 살았을 것이다. 서비스업을 하며,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이런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똑같이 화내고, 똑같이 민감하고, 똑같이 까칠하고, 똑같이 독한..... 진상 손님을 멀리하고 피했지만, 어느 샌가 진상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카톡으로 돌아가서, 42병을 앓고 있다는 톡 한참 후에 답을 했다.
“릴랙스 해야지”
어쩌면, 42병을 탈출하는 길은 내가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은 그대로이고, 내가 아무리 애써도 화를 내게 하는 요인은 그대로이다. 순간 ‘욱’할 때도 있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해답은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내 마음을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 내가 잘 풀어야 된다. 역주행 중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거나, 반전이 두세 번은 나오는 미드를 보거나, 마음을 쏟아내는 글을 쓰거나, 백종원이 만든 것 같은 진미를 맛보거나, 이효리가 자주 하는 명상을 하거나, 친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혹시 중2때부터?) ‘42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아니, 완전한 치유는 아닐지라도, 더 큰 (마음의, 혹은 몸의) 병으로 전이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 다행 아닌가.
오늘은 어떤 치료법을 써야 할까. 일단, 이 글로 오늘 하루는 잘 버틸 것 같다(하루는 너무 짧은데). 그나저나 휴가 갔던 이 녀석(기쁨이)은 왜 안 돌아오는 거지? 얼른 돌아와라. 다음 휴가는 버럭이. 좀 길게 쉬고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