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대한민국, 베트남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돈 쓰는 재미'라던 동남아 여행
오랜만에 해외를 다녀왔다. 베트남 다낭. 동남아 여행은 펑펑 쓰는 재미라던데, 여행 삼일째에 그 재미에서 묘한 죄책감을 느끼고 내내 찝찝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대학시절, 직장인이 되면 긴 시간 여행할 수 없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없는 돈을 끌어다가 미국, 유럽 등 먼 나라로만 여행을 다녔다. 극악무도한 물가 때문에 마트에서 산 빵, 잼, 버터, 물을 들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맛있는 식사는 이틀에 한 번으로 정해뒀다. 트램 비용조차 비싸서 그 한 여름에 30분 거리는 당연하게 걸어 다녔다.
이런 여행만 해왔으니 직장인이 되고 떠난 동남아 여행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재밌었다. 사실 돈 쓰는 재미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돈 50,000원이면 식당에서 vip 대접을 받고, 30,000원이면 한 시간 내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단돈 5,000원에 열대과일을 잔뜩 먹을 수 있어서 양껏 먹고 남기는 게 당연했다. 이런 맛에 동남아 여행을 하는구나 싶었다.
얼마 전 논문 심사가 끝난 기념으로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도 바로 이런 걸 기대했다. '맛있는 거 잔뜩 먹어야지. 매일 마사지받아야지. 택시로만 이동해야지.'
베트남 도착 후 첫 번째로 간 식당에서 역시나 둘이서 4개의 음식을 시켰다. 당연히 1/3은 남겼다.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그날 시장에서 과일을 두 봉지 가득 샀다. 역시 과일의 절반을 남겼고 호텔 냉장고에 며칠을 방치하다 그대로 체크아웃을 했다.
베트남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따뜻하고 깨끗한 햇볕, 바다와 수영장에 신이 났다. '그래. 대학원 다니느라 고생했는데 이 정도 호사는 누려야지. 너무 좋다.'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출발 전날까지만 해도 논문 때문에 죽고 싶다던 사람이 맞나 싶게 행복해했다. 그 행복 뒤에는 소비가 있었다.
셋째 날 아침, 오늘은 호텔 조식 말고 현지식 아침을 먹자며 베트남 거리를 둘러보았다. 현지인들이 노점상 식당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한국의 아침에선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지옥철에 몸을 욱여넣고 등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꾹 참는 게 출근 시간인데, 이 시간에 여유롭게 밥을 먹다니. 베트남은 출근 시간이 다른가? 오후에 일을 하나?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수준에까지 궁금증이 도달했다.
베트남 사람의 평균 연봉은 얼마일까? 지금 내가 먹는 이 밥이(현지 기준 꽤나 비싼 음식점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내가 때때로 주던 팁이 받는 베트남 사람에겐 어느 정도의 가치로 느껴질까? 바로 구글을 켰다. 이런 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 있을까. 다낭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 중에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처음 만난 한국인이 이런 걸 물어본다면 얼마나 무례할지 알기에 우선 검색을 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30만 원? 정말로? 여러 번 검색을 했다. 영어로, 한국어로, 구글에, 네이버에. 지역별로 다르지만, 검색 결과가 보여주는 베트남 평균 연봉은 30만 원을 웃돈다. '내가 어제 하루에 이 사람들 월급의 1/3을 썼네?' 하고 친구에게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갑자기 깍듯하게 음식을 가져다준 직원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여행 내내 친구랑 나는 '우리 공주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 하고 기분 좋아했는데, 사실 그들의 친절에는 역시 나의 소비가 있었다. (그들의 친절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진심으로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이란 것을 믿는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들의 친절을 사도 되는 걸까? 단지 그 이유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친구는 우리가 이렇게 써야 이 사람들도 돈을 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를 위해 관광산업개발(Pro-poor tourism )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나의 소비가 현지 주민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었을까? 사실 진짜 이득을 보는 이들은 베트남 대형 카페, 식당, 리조트를 소유한 외국 사업자 아닌가?
물론 Pro-poor tourism이 주는 경제적 이득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로 그들의 친절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맘을 불편하게 한다. 구글 검색창에 '다낭'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다낭 황제 여행'이 뜬다. 처음엔 그게 뭔지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내가 상상한대로 '돈 펑펑 쓰는 여행'이겠거니 했더니만 성매매 관광이었다. 구글에는 동남아 성매매 광고, 후기가 넘쳐난다. 친구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탄 택시 기사님이 "남자들은 동남아 여행을 가면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온다"고 했단다. 과연 그 '너무 많이 쓴 돈'이 경제적 이득을 준다한들, 그게 국가 간 문화적 간격 해소에 도움이 된 것인가? 당연히 절대 아니다. 오히려 여행자와 현지인의 신분 위계를 공고히 할 뿐이다.
부유한 국가 국민들의 빈곤국가 여행이 그 나라에 경제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Pro-poor tourism은 개발도상국 현주민들의 감정노동을 요하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LA에서 만난 서비스직 직원은 나를 이 정도로 어려워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만난 직원은 이 정도로 내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분배 프레임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경제적 이득, 경제적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 계급 불평등과 신분 위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감각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분배와 인정을 넘어 참여 프레임을 제시했는데 과연 빈곤퇴치, 국가 간 경제적-문화적 격차 해소를 위해 이 이론이 활용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 연구 분야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부분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문제이지 않을까? 나는 관광하면서 그 나라 국민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사람이 지워진 것, 그것이야 말로 사회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