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없으면 큰일 나는 세상
2020년, 갑작스레 견주가 되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으나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반려견 놀이터에서 강아지들 구경하는 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러저러한 이유로 누군가 내게 떠맡기듯 강아지를 놓고 갔다. 갈색 푸들 꾸꾸. 내가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모습을 보고 애잔한 맘이 들어 덜컥 ‘네 남은 견생을 책임지리라’ 다짐해버렸다. 그렇게 견주가 되었다.
강아지의 “ ”되기
난생처음 견주가 되어 처음엔 미숙하고 어색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어색했던 것은 강아지에게 나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강아지에게 나를 뭐라고 해야 하지? 고민이 시작됐다.
그냥 ‘이리 와. 내가 해줄게.’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굳이 ‘언니가 해줄게’처럼 나를 3인칭화하여 말한다. 강아지에게는 인간에게 말할 때의 곱절만큼의 다정함을 넣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우선 임시로-임시라기엔 3년째 쓰지만- ‘언니’를 쓰고 있다. 그런데 종종 다른 사람들은 나를 강아지의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고 강아지가 엄마 껌딱지네~”, “엄마만 쳐다보네”, “누구 엄마는 강아지랑 둘이 살아요?” 이런 식이다.
내 대답은 늘 똑같다. “엄마 아니고 친구예요.” 강아지에게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할 때도 ‘엄마’는 후보에도 없었다. 엄마? 내가 꾸꾸의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지.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반려견의 엄마, 아빠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더라. 인스타 강아지 계정만 봐도 계정주는 스스로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강아지 키우는 비용을 설명하면서 “애미 등골이 휜다” 같은 농을 쓰기도 한다.
정상가족이데올로기와 돌봄에 대한 오해
엄마? 아빠? 이해가 안 됐다. 무슨 강아지 엄마야. 그런데 우리 사회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해가 되더라. 우리 사회는 엄마, 아빠, 아들, 딸의 4인 가족을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로 제시한다. '제시'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모든 인류는 4인 가족을 이뤄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당연히 그러한 방식은 아니다. 직접 언급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미디어가 보여주는 가족 상, 제도에서 인정하는 가족의 범위, 법적 가족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각종 혜택(가장 단적인 예로 신혼부부 주거지원 사업 등), 사람들의 언어습관 등에서 이상적인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상정되었는가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정상가족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이상적이고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가족 형태가 있으며, 그 형태를 벗어나는 가족은 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말한다. 정상가족이데올로기 때문에 반려견에게도 우리는 엄마 또는 아빠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상상해본 적이 없고,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이상적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려견을 돌보는 존재인 나에게 엄마 또는 아빠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가족 안에서 돌보는 존재는 반드시 엄마 또는 아빠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돌봄이 무엇인가? 강아지를 돌보는 존재이기 때문에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돌봄에 대한 오해를 발견할 수 있다. 엄마 아빠만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돌봄을 받고 있으며 하고 있다.
돌봄이란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행위, 더 넓게는 모든 생명체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행위이다. 숨 쉬는 모든 존재는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은 엄청 거대하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상생한다. 그 누구도 타인 없이 살 수 없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 나의 삶의 양식이 타인의 안녕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돌봄의 시작이다.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만을 돌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회복지 영역에서는 '돌봄'을 시혜적인 표현이라 여겨 '지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돌봄을 위에서 아래로만 향하는 노동이자 노약자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돌봄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듯 인간의 전생애, 나아가 생명체의 시작부터 끝까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돌봄에 대해 다시 이해해야 한다.
돌봄이 생명체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행위라면, 사실 나의 반려견 꾸꾸도 나를 돌보고 있다. 꾸꾸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나는 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려웠을 당시 꾸꾸를 만났다. 그때 매일 아침마다 하던 산책, 하루 종일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감각, 내가 꾸꾸의 삶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for real. 만약 돌보는 존재를 엄마라고 해야 하는 것이라면 꾸꾸야말로 내 엄마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반려견의 '엄마 되기'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와 돌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돌보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엄마라는 생각, 가족은 엄마, 아빠, 자녀로 구성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반려견의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돌봄을 좁게 해석하는 시각에서 비롯됐기도 하다.
꾸꾸에게 '엄마 되는 것'이 왜 이렇게 불편할까,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스스로를 엄마 아빠로 호명하는 사람들이 왜 어색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이런 긴 글까지 쓰게 됐다.
사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언니'라는 호칭도 맘에 들진 않는다. 언니? 인간의 기준으로 카운트하는 나이로 꾸꾸와 나의 서열을 정리한다는 점, 반드시 성별이 들어간 호칭을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서 별로다. 그치만 아직까지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편의상 언니라 부르고는 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꾸꾸는 친구다. 이제는 그냥 '나'라는 1인칭으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겠다. 모름지기 언어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만들고 관념을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