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각하는 standing point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지만, 나도 5월을 무척 좋아하지만 내게 조금 힘든 시기이긴 하다. 5월의 애매한 날씨 때문이다. 사실 남들한테나 애매하지 나한테는 그냥 더운 날씨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서 혼자 계절감 없는 옷을 입고 다닌다. 요즘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시에 핫팬츠 입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괜히 민망해하곤 한다.. 아무도 신경 안 쓸 텐데 쩝. 연구실에선 헐벗고 다니는 인간으로 유명하고 "샘 안 추워요?"를 거의 매일 듣는다. (이 사람아 내가 추우면 이렇게 입고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나는 더위를 안 타는 사람이었다. "보는 내가 더우니까 제발 가디건 좀 벗으라"는 말을 듣던 사람인데 이제는 혼자 바캉스 패션으로 학교를 활보하는 인간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더위를 많이 탔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2018년, 피임약을 먹기 시작한 때부터다. 처음 피임약을 먹을 때 책상 절반만 한 복용설명서를 펴놓고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었지만 그 빽빽한 글씨는 내가 겪는 부작용을 설명하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3개월 뒤면 사라져요. 참으세요."라는 말만 거스름돈을 툭 건네듯 무성의하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피임약이 더위의 원인이 됐을 거라곤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이 변할 때쯤 복용한 약이 있냐는 질문에 퍼뜩 떠올랐다. 퍽킹 피임약.
피임약의 부작용은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피임약을 먹는 이유는 배란장애 때문인데, 이 역시 원인불명이다. 7개의 산부인과와 10명 이상의 전문의를 만났지만 아무도 내 병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난 의학을 잘 모르지만서도 여성의학은 왜 이렇게 발전이 더딘가 싶다. 내가 겪었던 질병 중에서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고 진료가 힘들고 치료가 거의 안 되는 것은 산부인과 질병뿐이다.
내 주변에도 배란장애로 고생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산부인과 질병과 관련하여 논문을 쓰고 싶어 했던 사람만 세 명이다. 학자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이 얘기를 하고 싶거나 문제제기하고 싶은 사람은 한 둘이 아닐 터. 산부인과는 왜 이렇게 힘든 곳일까. 여성의 질병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산부인과는 진료 시스템도 엉망이다. 진료대기 한 시간을 돌파할 때쯤 훌쩍훌쩍 울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날도 애매한 날씨에 나 혼자 여름이었다. 다행히 그날은 나의 영원한 수영스승이자 내 소듕한 친구를 불러내 루프탑에서 상그리아를 마시며 기분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병원만 다녀오면 진이 빠지고 우울해지고 짜증이 난다. 왜 여자들이 이상이 있는데도 산부인과를 그렇게 안 가는지 십분 이해한다. 그럼에도 잔소리 폭격을 하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불만을 토로했지만 요지는 현대 의학에서 여성이 서 있는 곳은 아직도 주변이라는 점이다. Sandra Harding은 과학이 누구의 관점에서 발전했는지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주춧돌을 놓았다. 의학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입장론standing point이라는 단어 그대로 나는 더울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