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정 Jun 18. 2024

큰엄마의 달력엔 사랑이 빼곡해

 

큰엄마에 대해서 말하자면 브런치 작품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할 정도다. 우리 큰엄마는 정말이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좋은 사람이다. 물론 화도 잘 내고 까칠한 구석이 있으시지만 그 속내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이 깊은 분이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우리 큰엄마의 달력이다. 큰엄마는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서 얻어 온 달력 중 가장 적절한 달력을 고른다. 어디에 적절한 달력이냐면, 바로 가족의 생일과 행사를 기록하기에 좋은 달력이다. 큼직하고 메모칸도 넉넉한 달력을 고르면 큰엄마의 작업이 시작된다. 올해 달력을 펼쳐두고 내년에 쓸 새 달력에 가족들 생일을 하나하나 옮겨 적는다. 우리 직계가족은 물론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들의 생일까지도, 그리고 큰엄마의 가까운 지인들의 생일도 다 빠짐없이 적는다.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일도 놓칠 수 없다.


이것을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큰엄마의 달력에는 이렇게 가족에 대한 사랑이 빼곡하다.


나는 구글캘린더를 쓴 지 오래다. 한 번 적어두면 매년 알아서 일정을 업데이트해 주고 당일에 알림까지 해준다. 이런 신기술을 사용하는 나는 지인의 생일을 놓치기 일쑤인데 우리 큰엄마는 한 번도 놓치는 일이 없다.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21명이 있는 우리 가족들 단체카카오톡 방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신다. 대화방에 없는 아기들까지 더하면 매년 30번의 생일을 챙기는 셈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적어도 매년 30번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사실 생일에 주고받는 안부만 서른 번이지 우리 가족은 정말 자주 모인다. 물론 이 모임을 주최하는 것은 언제나 큰엄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누가 오는지 체크해서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시는 것도, 몸이 불편한 가족에게는 반찬을 나누는 일도 큰엄마는 마치 당연한 일인 듯 하고 계신다.


어릴 땐 가족모임이 너무 많은 것도, 유난스럽게 사이가 좋은 것도 싫었다. 다 귀찮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 좁은 집에 많은 인원이 모여 화장실 전쟁, 휴대폰 충전기 전쟁을 치르는 것도 정말 싫었다.


그런데 조금 더 크고 나니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이제야 알겠더라. 교수님의 폭언과 폭력에 무뎌져 있다가 심각한 일이란 것을 깨달은 것도 가족의 사랑 속에 들어왔을 때다. 어느 명절 평소와 다를 거 없이 가족끼리 둘러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걸 느낀 것이다. “우리 가족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우리 가족한테 나는 이렇게나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인데 나에게 그런 말과 행동을 하다니. 그런 걸 가만히 참고 있어서는 안 돼.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 걸 안다면, 우리 가족들 모두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큰 일 없이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온전히 큰엄마의 공이다. 우리 큰엄마는 내게 이런 사람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아주 나중에 우리 큰엄마가 돌아가실 때 나는 법정 휴가를 하루도 받을 수 없다는 일이다. 고용노동부 표준취업규칙 경조사 휴가에 따르면 큰엄마와 나는 직계가족도 아니고 몇 촌이나 건너는 가족이기 때문에 내가 받을 수 있는 휴가가 없다. 혈연중심 정상가족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나에게 또 아픔을 준다.


얼른 가족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변화시켜야 한다. 가족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 나는 우리 큰엄마를 무지 사랑하니까. 정책연구자는 사랑도 정책으로 한다. 풉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먹는 거 좋은 일이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