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3
겨울의 한복판, 4일째 이어지는 폭설은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바삐 움직이던 거리도 눈의 무게에 눌려 고요해졌다. 눈송이는 하늘에서 한참을 머물다 천천히 떨어지는 듯했지만, 어느새 땅을 두툼하게 덮으며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눈길 위로 첫발을 내디딜 때 느껴지는 바스락 거림. 그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 중 가장 순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쌓인 눈 위를 걷다 보면 발자국이 남고, 그 발자국은 내 존재를 눈 위에 새긴다. 잠시 후 또다시 내리는 눈이 그 자국을 지워버리겠지만, 그 흔적이 지워지는 순간마저도 일종의 위로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겠지? 내리는 장면을 볼 때만 잠깐 추억에 잠기거나 예쁘다 할 뿐, 이어지는 상황에 연결시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가져온다. 길이 막히고, 계획이 틀어지며, 여기저기에서 원망 섞인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어쩌면 폭설은 우리에게 잠시 멈추라는 자연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번잡했던 일상도, 어지럽던 마음도 눈 아래에서 잠잠해진다.
눈 내린 세상 속에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우리도 마음속 불필요한 것들을 눈처럼 덮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의 실수와 후회를 눈으로 덮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가벼워질까?
폭설은 세상을 멈추게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새 출발을 준비할 수 있다. 눈이 멈추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하얀 길 위에 다시 발자국을 새기며, 나는 또 다른 하루를 향해 걸어간다. 넘어지면 많이 불편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제 그제 운동을 쉰 이유도 있지만) 눈 쌓인 은파 둘레길로 나간 이유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