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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직

by 청천

무직(無職)


얼마 전까지만 해도 6시면 일어나 밀어내고 씻고 채운 다음 챙겨 입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고 매일, 매월, 매년을 똑같은 형태로 41년을 보냈다.(물론 처음에는 걷기로 시작하여 자전거를 장만했다가 자동차로 상승) 다른 분들과는 달리 70이 되던 해에 일을 마쳤으며 (정규학교 퇴직 후 대학교, 만학도 학교 근무) 쳇바퀴 일상에서 벗어난 지 이제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손에서 분필을 놓고 나서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으니...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베란다로 나가 주차장을 내려다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내려가 털어주고, 가로 주차가 되어 있으면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가 밀거나 차주에게 전화하여 통로 확보. 즉 나를 대신하여 집안 먹거리 확보를 위해 일흔 넘어서도 출근하는 울 싸모님 출근 차량을 위한 일과 시작 모습이다.


무직(無職), 말 그대로 직업이 없는 상태. 사회는 종종 이 단어를 불안과 결핍의 상징처럼 여긴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움찔하게 만들고, 자기소개란에 공란을 남기게 하는 단어. 하지만 무직이 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 어지간히 할 일, 해야 할 일을 대충이나마 마친 지금으로서의 나는 오히려 이 시간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다시 채워가는 시간’으로 바라보고 싶다.


우리는 흔히 ‘직업’을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다. 명함 위의 직함이 곧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직업이 없어진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에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곧, 오롯이 내 삶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진다는 의미다. 하루의 흐름이 강제되지 않을 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당장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멈춤의 시간이 없이는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 어쩌면 무직이라는 상태는 인생의 쉼표, 혹은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한 여백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다 하여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흔히 말하는, 일거리가 없는 글자 그대로의 무직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고 나름의 임무를 마치고 퇴직을 한, 그래서 일자리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긴 직장 생활,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을 한 가지 일에 쏟아부은 다음 이제 막 퇴직을 했으니 얼마 정도의 무직은 이해해 줄만 하지 않은가 말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던 습관, 각종 회의, 수업, 행사, 공문, 숨이 막힐 듯한 대입 문제 풀이, 원서 작성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온 그 길. 이제 그 길을 마치고 서게 된 새로운 문 앞.


퇴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 아닐까? 오랫동안 ‘일하는 나’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갈 시간이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 차례.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포기했던 취미, 만나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 인생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하나씩 다시 시작해 보는 재미도 갖고 싶다. 퇴직 후의 삶은 정해진 답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에게는 여전히 가능성이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교단에서 쌓아온 경험과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바 그것을 바탕으로 여유를 즐기며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출근 시간에 맞춰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채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벼운 산책, 따뜻한 차 한 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 이제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도 괜찮은 시간이 되었으니 나만의 리듬을 찾아보자. 세상은 여전히 넓고, 내 앞에는 아직도 많은 길이 열려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한 일. 그동안 시간이 많지 않다는 핑계로 책장 가득히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 가운데 누렇게 바랜 책들, 세로 편집이 되어 있는 책들, 한 번 자리 잡은 후로 거의 손길이 가지 않은 책들 4~500권, 그리고 손때 묻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때문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41권의 교무수첩을 (사진, 인적사항을 도려낸 후) 모두 박스에 담아 폐지 수거 차량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여기저기 싸이트에 미숙한 글을 보내고 있다.

이제 나를 위한 인생을 시작할 시간. 현재의 나는 수입이 있는 일거리는 없지만 하고 있는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많은 무직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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