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by 청천

표현

우리말을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는 장난꾸러기들이 숨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同音異議語(동음이의어)다. 같은 소리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단어들. 마치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우리말도 순간마다 새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언뜻 떠오르는 단어가 ‘배’이다. 강을 건너는 배(船), 달콤하게 익어가는 배(梨), 많이 먹으면 불러오는 배(腹), 그 수만큼 거듭됨을 이르는 배(倍)까지. 하나의 소리가 네 가지, 다섯 가지 모습으로 변신하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놀랍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배 타고 배를 먹었더니 배가 두 배나 부르네 그랴.”라고 말하면, 그저 문장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작은 이야기 한 편이 된다. (물론 長短을 따지면 발음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눈’ 역시 그렇다. 겨울이면 하얗게 내리는 눈, 얼굴에 달린 두 개의 눈, 풀이나 나무의 싹이 막 터져 돋아나는 자리인 눈, 저울 눈...

“눈 오는 날 눈에 눈이 들어가 눈을 깜박였더니 눈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게 눈물이야 눈물이야? 그것 땜에 저 나무 눈이 안 보여, 저울 눈도 잘 안 보이고”라는 말을 곱씹다 보면, 언어의 장난기가 불쑥 고개를 든다. 평범한 한 줄 속에도 작은 시가 숨어 있는 셈이다.

동음이의어는 우리에게 단순히 헷갈림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여백 속에서 농담을 만들고, 오해를 빚으며, 상상력을 북돋우는 놀이터가 된다.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짓궂게 주고받는 말장난도, 시인이 새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순간도, 그 뿌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자주 이 동음이의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언어가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지니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은 밋밋하지 않았을까. 같은 소리에 여러 뜻이 겹쳐지면서, 우리는 더 자주 웃고, 더 쉽게 시적인 감각을 얻는다. 동음이의어는 국어사전 속의 항목뿐 아니라, 우리 일상에 끊임없이 색깔을 덧입히는 작은 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동음이의어를 만날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말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언어는 어느새 사람 같고, 또 사람은 언어처럼 느껴진다. 우리말은 참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벗이다.


발음상 표현이 주인공으로 등장을 했으니 이번에는 동음이철어(同音異綴語: 발음은 같으나 철자가 다른 단어)로 항간에 유행을 하고 있는 造語(조어: 이미 있는 말을 짜 맞추어 새로운 뜻을 지닌 말이나 복합어를 만드는 일) 부분도 한번 언급을 해보자. 언뜻 듣기에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이해를 하게 되면 그야말로 분위기 전환을 하게 되니 이 또한 재미있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나는 가끔 맡은 바 직책, 직위의 역할과 무게, 의무, 본분을 생각한다. 국가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인 군인의 ‘귀 뚫기’라... 이런 이야기가 등장했는데 한번 볼거나?


<귀뚫아미 = 귀뚫은 army>

군대에는 별명이 많지만, 그중 ‘귀뚫아미’만큼 시대를 잘 보여주는 말도 드물다. 귀를 뚫은 군인, 멋과 개성을 포기하지 못한 청춘의 자화상.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자주 풀숲으로 달아난다는 데 있다.

풀숲으로 달아나는 것은 단순한 겁쟁이의 몸짓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키워낸 습관이다. 책임은 무겁고, 현실은 각박하고, 길은 막다른 골목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일단 숨는다. 입대 영장을 받은 청년이 귀를 뚫듯, 직장인은 명함 대신 자격증을 모으고, 정치인은 약속 대신 말꼬리를 뚫어 도망친다. 겉으로는 번쩍 빛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장식물 하나쯤 달고서 말이다.


귀뚫아미의 귀걸이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나는 다르다”라는 외침이지만, 정작 다름을 감당할 용기는 없다. 풀숲에 숨어버리면 차별도, 평가도, 책임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풀숲은 언제까지나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 그곳은 그저 현실을 미루는 대기실일 뿐이다.

오늘날 귀뚫아미는 군대에만 있지 않다. 회의실에도 있고, 국회에도 있고, 카페 한쪽 테이블에도 있다. 귀는 반짝이지만, 마음은 닫혀 있고, 발은 언제든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그러니 이 별명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귀뚫아미가 풀숲으로 달아나는 한, 우리는 늘 중요한 순간에 책임질 사람을 찾지 못할 테니까.

의무적으로 피 끓는 젊은이들을 모아놓다 보니 개중에는 용감한 군인, 충성스런 군인도 있겠지만 문제 군인, 철없는 군인, 우울증 군인, 귀뚫은 군인도 있을 것 아닌가?

오늘은 이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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