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분담의 재분배
저 육아휴직 해서 이제 시간 많아요.
주변에 육아휴직을 했다고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대답 중 하나가 있다.
휴직하면 남편이 은근히
집안일을 안 하지 않나요?
원래 잘하던 것도
은근히 넘기는 경우가 많던데요.
(호호호) 저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휴직할 때 이미 선전포고를 했어요.
나는 놀려고 휴직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던 일도 안 하려고 하지 마라!
그랬는데, 휴직을 시작한 첫 주 남편은 갑자기 주 5일 회식을 잡기 시작했다. 그로써 그가 하던 모든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었다. 심지어 둘째 주에는 3박 4일 장기 교육을 떠났다. 이로써 집안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일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회사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집안일에 에너지를 쓰더라도 좋았다. 아이들을 혼자 육아하는 것도 에너지가 충분하니 화도 덜 내었고 숙제를 봐주는 것도 힘이 덜 들었다. 하지만 휴직 3주 차가 되고 나니 남편은 주말에 조차 모든 집안일과 육아를 나에게 맡기려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에게 말했다.
"아예 애들을 돌보지 않을 생각이야?"
"육아는 나 혼자 하는 거야?"
첫 아이를 낳고 육아와 가사 분담 등으로 싸웠던 초보 부부 시절 생각이 났다. 마치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갈등이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다.
한창 육아와 가사분담이 잘 되지 않아 힘든 시절, 회사에 가서 선배 워킹맘들에게 하소연을 하면 해주셨던 말이 있다.
아이가 어릴 땐 많이 싸우고 힘들지만 '아이가 크면 다시 사이가 좋아진다'라고 하셨다. 갑자기 그 말이 실감 났다. 그 당시에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그 말이 무의미하게 들렸는데 이제와 보니 맞았다.
나와 남편이 둘이 같이 일할 땐 서로가 똑같이 힘들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물론 이 이해가 되기 까진 수많은 갈등과 대화, 싸움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내 입장을 계속 이야기했고 언젠가부터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남편은 나와 자신은 다르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둘 다 일하고 돈 버는 부부이니 공평하게 집안일과 육아를 해야 함을 인정했다. 그래서 아이 저녁을 먹여 놓으면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 매주 분리수거 처리, 주말에 요리 등은 남편이 도맡아 했었다.
예전엔 앉거나 누워있기 바빴지만 같이 움직여 주는 남편이 참 고맙고 이제야 우리 가정에 균형이 찾아왔구나 싶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기에 서로가 공평하게 분담되지 않으면 가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남편이 변했는데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나의 육아휴직으로 인해 우리 가정의 가사 분담 불균형이 다시 시작된 거다.
요즘 남편의 변화를 살펴보면, 평소보다 잔소리가 늘었다.
이게 원래 여기 있었나? 이건 왜 나와있어?
원래 자리에 두어야 하는 거 아냐?
하며 소소한 잔소리를 시작했고 그의 마지막 킥은
많이 바쁘나?
였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킥을 날리는데 나는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분명히 나는 스스로를 제2의 인생 준비를 위한 휴직이라 생각했고 그러기에 집안일을 내가 다 하지 않겠다 선언했던 거였는데 도둑이 제 발을 저리고 있던 거였다. 스스로도, '당분간 내가 수입이 없으니 어느 정도 집안일은 내가 하는 게 당연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어찌 보면 잠시겠지만 외벌이가 되었으니 집안일은 내가 하고 남편은 돈 버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제외되어 육아를 전담하는 걸 엄마가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갑자기 나의 휴직이 우리 부부의 균형 잡힌 역할분담을 과거의 성 역할로 돌아가게 한 것 같아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있었더라도 휴직을 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시점이 지금이고 이 시점에 주어진 감사한 기회의 시간을 잘 쌓아내야 남은 삶을 위한 든든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 그러려고 휴직을 한 거다. 육아도 중요하지만 1순위는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는 일이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딸아이 둘을 잘 키워내며 가족을 모두 지킬 수 있는 길일 것이라 생각한다.
갑자기 일시적 백수가 되었다고 원래 하던 일에서 따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사분담의 재분배는 분명 필요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휴직을 하고도 현재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건 그가 든든하게 월급을 벌어다 주고 있기 때문이니까. 꼭 다음에 그에게도 휴직을 하며 아이들의 모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