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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마음 빗장이 풀리다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

by 보나

휴직을 한 후 가장 좋은 점은 첫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첫째는 어릴 적부터 입도 짧았고, 바지를 입을 때도 딱 달라붙는 바지만 입어야 했다. 상의도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절대 입지 않았다. 먹는 과일도 귤, 사과, 바나나 이렇게 3개만 먹고 국물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무얼 시작할 때도 두려움이 앞서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많다. 잘 안되면 금방 짜증을 내며 울었고 징징 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랬던 첫째가 점점 커서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가고 하니 예민한 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아 이 아이도 사회화가 되긴 하나보다.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 안심했다.


그랬는데 1학년 때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예민한 만큼 자신이 왜 힘들고 금방 지치는지를 잘 모르고 있으니 짜증과 울음이 어릴 적보다 더 늘었다. 학원 뺑뺑이와 숙제에 치여 수면이 부족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퇴근하고 아이에게 쓸 에너지가 없는 엄마는 아이의 짜증을 받아줄 마음그릇이 충분치 못했다.


징징거리는 아이에게,


얼른 자! 늦게 자면 내일 아침에 학교 가서 힘들어.


라며 너무나 기계적인 말만 반복했다.


짜증이 많은 아이를 다독이고, 타이르고, 화도 내고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화만 내는 엄마가 되었고 아이의 슬픔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심리 상담센터도 다니고 학원을 줄이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은 나아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왠지 유리천장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센터에서 해준 조언대로 아이에게 했지만 마음이 없는 '방법'만 아이에게 로봇처럼 강요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게 맞나?' 하면서도 전문가가 이야기 한 방법이니 하면 나아지겠지 하고 따라 했다. 전형적인 T 인 남편은 상담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지만 역시 아이에게 적용하는 건 쉽지 않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 생각했다. 첫째가 2학년이 되고 나는 원래 계획했던 육아휴직을 감행했다. 육아휴직 후에는 회사를 다닐 때 하지 못했던, 엄마와 하교하기, 하교 후 편의점 가기, 하교 후 놀이터 가기, 분식집 가서 간식 먹기 등 그동안 못했던 로망을 실현하는 순간들을 보내고 있다. 학원 뺑뺑이가 아니라 일상의 '틈'들이 생기니 아이의 마음에도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나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오늘은 좀 슬펐어. 친한 친구랑 같은 모둠을 하고 싶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친구랑 한다고 했거든."


"엄마 모둠 수업 할 때 친구들이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장난을 쳤는데 내가 화가 나서 울었어."


이런 마음들은 내가 회사를 다닐 때는 전혀 들을 수도, 들을 시간도 없었던 마음들이다. 워낙 본인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거기에 회사를 다녀온 엄마가 숙제만 챙기고 빨리 자라고 하는데 어느 틈을 통해 9살 어린이가 나에게 깊은 속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자기 전, 그 시간이 밤 10시가 넘었을지라도, 아이가 대화를 시작하면 충분히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 마음 그릇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자기 전마다 나에게 마음속 이야기들을 풀어놓아 준다.


그런 마음이 어찌나 고마운지.



얼마 전에는 동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엄마 나는 동생이 너무 싫어. 동생이 없고 외동이면 좋겠어."

"동생은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 말도 안 듣고, 나를 사랑하는 행동을 안 하는 것 같아."


예전 같았으면, '그래도 언니인 네가 이해해야지' 하면서 빨리 무마하고 재우는 것에 집중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엄마도 동생이 있지? 엄마가 이모들이랑 사이가 어떤 거 같아?"

"사이가 좋은 것 같아."


"그렇지? 그런데 이건 비밀이지만 엄마도 어렸을 때 둘째 이모랑 무척 많이 싸웠어. 머리채도 잡고, 말도 심하게 하고 그랬단다. 그랬는데 지금은 무척 친하지? 자매란 그런 관계야. 평생 친구보다 더 진하게 소중하게 지내는 관계.."


이 말을 듣는 아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말을 해주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그 순간, 내가 선택한 용기가 아이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다리를 놓아주는 시간이란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회사를 택하고 아직도 그 길에서 스스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아이와의 이런 소중한 시간을 느낄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하나를 내려놓아야, 다른 하나를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릇이 생기니까.


'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말이 있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도 있다.


한 손에 너무 많은 걸 가지려 하면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친다.


나에게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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