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의 목은 개경 동문에 내걸렸고, 사지는 찢겨 각 도로 보내 돌렸다. 신돈과 함께 개혁 정책을 펼쳤던 여러 벼슬아치들도 머리가 베이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갔다. 신돈과 나머지 세력의 재산은 모두 적몰되고 어린아이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이렇게 신돈의 개혁은 끝났다. 이번에도 구가세족들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이것은 신돈이 몰락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고려의 마지막 개혁 정객과 그 세력이 사라진 것을 뜻했다. 신돈의 몰락으로 고려는 구가세족의 나라로 되돌아갔다.백성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해도 하소연할 곳 없는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내릴 것을 두려워하던 공민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려 왕조는 막다를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105쪽)
"공민왕은 반원친명(反元親明)이란 단일 노선을 걸었고, 구가세족들의 참소에 넘어가 신돈을 제거했다. 반원친명 노선을 추구한 결과, 친명파가 양산되고, 신돈을 제거한 구가세족들은 다시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110쪽)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武臣亂)을 계기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사회가 붕괴된 뒤 무신집권기의 새로운 정치·사회적 여건 아래서 성장하기 시작하여 원(元) 간섭기인 13세기 후반 무렵 정착하였다. 이 세력을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특별히 가리키는 용어가 없이 사료에 나오는 ‘권세지가(權勢之家)’, ‘세신대족(世臣大族)’, ‘구가세족(舊家世族)’, ‘권문(權門)’, ‘권귀(權貴)’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하다가 권문세족으로 통일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한자 표기도 초기에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된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 쓰던 것을 점차 ‘권문세족(權門世族)’으로 바꿔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