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습했던 여름날들이 추석인데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기승을 부렸다. 가을비가 하루동안 쉬지 않고 내리더니 맹렬했던 더위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2024년 여름은 지루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하늘을 보니 동해보다 더 푸르렀다. 구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벽해(碧海) 그 자체였다. 언제 더위로 괴롭혔느냐고 따지듯이 두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이 파란색을 선사한다. 마음이 상쾌하다. 얼굴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바람이 살랑살랑하니 나뭇잎이 흥에 겨워 가볍게 춤을 춘다. 모든 게 좋아 보인다. 짜증나게 만든 여름의 더위도 잊게 해준다. 깊은 산속의 피톤치드 내음이 그리워지게 만든다. 당장에라도 산으로 달려가고 싶다.
일주일 전에는 속초 바다에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바닷바람이 세찼다. 비가 내릴 듯 말 듯했으나, 비보다는 바람만이드셌다. 살갗에 부딪힐 때 느낌은 시원하지 않았다. 습하고 끈적끈적했다. 아직도 여름이었다. 동남아 나라의 아열대 기후와 다를 바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기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바뀌었는지 궁금해진다. 새생명이 돋아나고, 온갖 꽃들이 봉우리를 터뜨리는 봄도 짧게 왔다가 가버리고, 단풍 구경도 별로 못했는데 어느새 첫눈이 내리는 겨울로 변해버린다.
사람은 과거의 추억과 몸에 밴 기억으로 살아가는데, 그 패턴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릴 적 뛰어놀던 낮은 구릉, 넓은 들판 위에는 거대한 성냥갑처럼 생긴 콘크리트 건물이 죄다 차지했다. 낮게 드리워진 지붕이 보이고 골목길로 연결되던 주택가도 이미 사진 속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이른 새벽 산기슭에서 퍼지던 맑은 공기는 콘크리트 건물로 그 숨통을 끊긴 지도 꽤 됐다. 이러다 인간에게 남는 건 무엇이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