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제 자리입니다만...
오래간만에 착한 맛 순한 맛의 드라마 <나빌레라>에서는 70대의 알츠하이머를 진단받은 노인이 20대의 발레리노 채록에게 레슨을 받으며 죽기 전에 "날고 싶다"는 꿈을 키운다.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알고 그의 가족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하는 채록이에게 축구를 하는 그의 친구 세종이 말한다.
세종: 내가 오늘 골을 넣었거든.
채록: 갑자기 뭔 개소리야~
골키퍼가 골을 왜 넣어?
세종: 그니까. 말이 안 되지.
근데 네가 지금 하려는 짓이 바로 그거야.
골키퍼 주제에 골을 지켜야지.
골을 왜 네가 넣냐?
스트라이커는 할아버지야.
숨차고 태클 들어와도 다 제치고 골 넣어야 하는 건 할아버지라고.
왜 공을 네가 차고 지랄이냐.
할아버지 뒤에서 딱 지키고 기다려.
막 불안해 미칠 것 같지?
그럼 소리 질러서 응원해 줘.
막 손뼉 쳐 줘.
그럼 골 들어간다.
자기가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 그 자리에서 충실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일.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정말 물리적인 의자, 자리 그 자리를 채우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때가 있다. Facebook의 Chief Operating Officer Sheryl Sandberg의 저서 <Lean In> 에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기업 중역 회의에 가면 일단 여성이 많지도 않지만 여성들은 다른 사람이 오면 자리를 양보하거나 뒷자리로 가서 앉는다고 한다. 앞자리에 앉아도 되는 상황인데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 그 여성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친화적인 인상을 주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잃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 내가 여기 있고, 나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세. 누군가는 회의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이 아깝고 효율적이지 못하니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저 회의실 좌석에 앉는 것만으로도, 요즘처럼 화상회의에서 하나의 동동 뜨는 화면이 되더라도 그날의 할 일중 80프로는 채운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 중에 최희섭 선수가 있다. 최선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빅초이(Big Choi)로 불리며 최고의 1루수와 거포 타자로 자리 잡았던 선수다. 빅초이 이전의 한국인 출신 메이저리거는 대부분 투수가 많았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덩치가 상대적으로 미국인들보다 작지만 빠른 강속구나 훌륭한 컨트롤을 자랑하는 투수가 대부분이었는데 빅초이의 등장은 실로 신선했다. 힘과 체격은 미식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해도 놀랍지 않은 큰 체격의 한국인 빅초이는 1루수로도 맹활약을 했다. 투수와의 호흡과 경기의 흐름을 읽는 빠른 두뇌까지 겸비한 빅초이는 1루뿐만 아니라 포수가 자리를 비울 시 홈베이스까지 커버 가능한 선수였다. 그런 빅초이에게 어느 한 경기에서 홈베이스를 커버하다 슬라이딩하는 상대 선수와 부딪쳐 부상을 입었던 적이 있다. 그 부상 이후 빅초이는 한동안 꽤 긴 회복의 기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 내가 그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고민했다. 그 순간, 그렇게 열심히 홈베이스를 커버했어야 했을까. 난 1루를 커버해야 하고, 그리고 타자로서 잘 치면 되는데 홈베이스까지 커버를 하다 다치면, 내 손해이기도 하지만 결국 팀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 않을까라는 고민이었다. 결국 내가 찾은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해답은 1루를 지키자였다.
그 이후 착한(?) 직장인으로 살면서 같은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맡은 부서의 일을 하다 가끔 내 깜냥을 넘는 일을 맡게 될 경우가 있거나 또는 부탁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그 일을 도와줄 여력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정중하게 그 일을 담당해야 할 맞는 부서로 돌려주면서 난 머릿속으로 되뇐다. 난 1루 수다. 난 1루 수다.
요즘 아이들은 개근상(?)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족동반학습 신청서를 내고 해외여행을 가거나 영어 캠프를 가거나 다양한 학교 외 활동을 하는 아이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학교에 늘 출석할 수 없다. 하물며, 집에서 온라인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 중에는 팬데믹 상황에 부모와 호캉스를 가거나 캠핑을 가서 화상수업을 호텔방이나 캠핑장에서 들어오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일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환기효과가 있어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배우는 것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화려한 체험학습이나 캠프, 봉사활동 등의 포트폴리오는 없어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태도로 같은 열정으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저력 또는 그릿(Grit)의 무거움 또한 놓칠 수 없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일기에 써가면서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같을 내일을, 하루를 또 하루를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