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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Jan 09. 2017

(1분소설) 운명의 장난

#클레멘타인 1분소설





그거 알아?

우연은 우연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간절함으로 만들어지는 찰나의 기회지.




새벽 5시, 세상은 아직도 전등을 켜지 않은 꺼먼 밤이었다. 알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더듬어 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힌 녀석은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에... 귀찮아.


어쩔 수 없이 반쯤 몸을 일으켜 핸드폰 불빛을 찾아간다. 액정 불빛을 애써 멀리하며 반쯤 감은 눈으로 본다. 으. 꿈이 아니라 정말 새벽 5시.


다른 때 같으면 지금쯤 잠들었으련만.

오늘은 멀리 서울까지 면접을 보러 가는 날.

한 편으로는 긴장되고,

음, 한 편으로는 미친 듯이 가기 싫은 기분이다.


'아... 그냥 가지 말까. 어차피 떨어질 거 뻔 한데 괜히 서울까지 왔다 갔다, 새벽부터 돈 만 날리고 고생하는 거.'


나는 알람을 끄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내 마음은 여전히 가지 않아도 될 변명을 탐색해 내고 있었다.


백수가 되면 더 일하기 싫어지는 그런 기분. 통장 잔고가 텅텅 비어버려 진짜 이제 일해야 하는 데.

그래도 그냥 왠지 나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 데... 감기인가? 영 몸이 안 따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뒤척뒤척 별별 생각을 다 하다, 두 번째 알람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든다. 새벽 5시 10분.


에이. 됐다. 그냥 여행 가는 셈 치고 갔다 오지 뭐. 면접이래 봐야 10분도 안 볼 거고. 오랜만에 콧바람도 쐬고. 다음 면접 연습도 할 겸.



나는 찬 기가 맴도는 방을 빠져나와 베란다로 걸어갔다. 암막 커튼이 길게 드리워져 있어 온통 암흑 천지다. 지마켓에서 산 싸구려 암막 커튼이지만 나름 빛 차단 효과가 좋았다. 나 같은 올빼미 족에게 딱이라니까.


-촤악-


나는 커튼 젖히는 소리를 좋아한다. 힘차게 커튼을 열어젖히고 베란다 문을 살짝 열었다. 습- 후-. 세포를 깨우는 시린 겨울 냄새가 콧속을 쑥- 훑어내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 혹여나 눈이 오는 건 아닌가?


고개를 쭈욱 빼고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눈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하. 나도 참. 이렇게 일어나서도 어떤 변명거리를 찾아대고 있다니.


이른 새벽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춥긴 춥다. 겨울 너무 싫어.



어제 미리 생각해둔 옷을 꺼내 입으려 거울 앞에 섰다. 몸매가 영 섹시하지 않네. 참 재미없다. 나는 알몸으로 이리저리 몸을 살피며 축 처진 옆구리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휴. 쉬는 동안 운동도 하고 살도 빼고 책도 읽고 뭐 그럴 줄 알았건만. 그저 느는 건 잠과 주름살과 뱃살 , 식욕, 나이뿐이구나.


어디 보자...


면접이라 아무래도 정장 차림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옷장에서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정장 투피스를 꺼냈보았다. 미리 예상은 했지만 그동안 너무 입을 일이 없어서 주름이 제멋대로 펴 있었다.


끙. 좀 작네.


어느덧 옷이 작아질 정도로 몸이 통통해져 버렸다. 지난 회사를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구직 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태함에 빠져들었다.


돈이 없으니 마땅히 나갈 곳도 없었고 나가봤자 가까운 슈퍼나 도서관이 다였다. 자기 계발서를 틈틈이 읽으면서 간간히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게다가 한 동안 나라가 시끄러워 괜히 이것저것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시간이 미친 듯이 좀 먹어 들었다.


오랜만에 신는 구두에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덧 7시가 다 되어 갔다. 으 늦을 것 같다.


아. 가지 말까?




나는 집을 나오면서 또 마음 한편에 동요가 일었다.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 데만 4시간. 서울에서 회사까지 어림잡아 1시간 거리인데. 아차 하다가는 면접 시간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또 괜한 조급함으로 카카오 택시를 불러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아, 화장실 갔다가 갔어야 하는 데.


"지금 출발하는 차니까 바로 타세요."



나는 매표소 직원의 말에 계단을 마구 뛰어 내려갔다.



우당탕탕 탕.





젠장. 계단을 다 내려오고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나는 나동 그라 졌다. 정신이 번쩍 하고 엉덩이가 아려왔다. 그러나 나는 스프링이 튕겨 나가듯이 일어나 발을 절뚝거리며 문이 닫히는 버스를 잡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그런 인색한 창피함으로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헉헉...


버스에 오른 후 그제야 좌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평일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서울을 많이 올라간담? 좌석은 만석이었고 나의 자리가 하나 남아있었다. 28번. 나는 자리 번호를 두리번거리며 버스 끝까지 들어갔다. 28번 내측. 젠장. 창가 자리가 좋은 데.


창가 자리에는 이미 한 남자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아까 넘어진 다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까는 몰랐는 데 꽤 심하게 넘어진 모양이다. 스타킹은 올이 다 나가버렸고 여기저기 먼지로 뿌옇게 변해있었다.


휴. 그냥 오늘 집에 있을걸.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내가 이 난리 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다. 나는 출발부터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게 오늘 딱 면접에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에 단호하게 결정 내리지 못 한 나 자신을 책망하며 다리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아... 아프네...



왠지 발이 점점 심하게 부을 것 같다.

이유 없이 서러움이 밀려왔다.


  



"저기요. 죄송한 데 잠시만요."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스으으으읍- 음? 네?"


나는 본능적으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잠시 내리려고..."


"아 예예에..."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두 다리를 모아 복도로 몸을 돌려 앉았다. 벌써 휴게소네. 그나저나 나 면접 강의 영상 보고 있었는 데 언제 잠든 거야? 핸드폰은 이미 영상이 끝나 있었다. 아. 이제 반 정도 왔나. 나는 스타킹도 사고 화장실도 가려고 일어났다.


"아얏."


일어나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다시 제자리에 앉아 버렸다. 아. 아파라. 지금 만져 보니 오른쪽 발목이 꽤 부어있었다.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 진짜. 오늘 그냥 쉴 걸. 짜증 나.



나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잔뜩 났다. 아픈 다리도 짜증 나고 먼 서울도 짜증 나고 면접날이 하필 오늘인 것도 짜증이 났다. 집에서 제시간에 못 나온 것도 짜증 나고 택시에서 신호가 더럽게 안 풀리던 것도 짜증 났다. 아. 진짜 오늘 대박이다. 다리까지 붓고 면접까지 떨어지면 안 되는 데.


나는 다리를 천천히 절뚝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계단이 절벽 1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아.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일행 분 아직 안 왔어요?"



"예? 아.. 네."


나는 기사님의 물음에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동행 아닌데. 옆 자리 남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승객이 우두커니 앉아 옆 자리 남자를 기다렸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자리를 살피다 나까지 쳐다보았다. 전화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수근 거림이 들려왔다.


아놔. 왜 나까지 이런 소리를? 나 일행 아니거든!!!


나는 속으로 열심히 모든 인간들을 저주했다.


그나저나 이러다가 진짜 면접 늦어 버리겠는 걸. 나는 최악의 하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게 끝나는 걸까?


얼마 후 남자는 멋쩍게 들어섰고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시린 시선이었으리라. 차 안의 분위기에 나까지 목이 탈 정도였다.


남자는 모자를 더 푹 내려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자리로 돌아왔다. 들어오는 모양새를 보니 멀쩡하게 생긴 놈이 도대체 왜 기본 예의가 없냔 말이다. 나는 자리로 다가올 때뜸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다리를 복도로 옮겨 자리를 피했다. 담배냄새가 확 끼쳐왔다.


으. 진짜.


짜증이 잔뜩 나버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보란 듯이 손으로 코를 가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지 앉자마자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민망하겠지. 아. 그나저나 나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택시라도 타야 하는 걸까. 나는 네이버 지도를 켜서 택시가 빠를까? 지하철이 빠를까? 이것저것 검색해보았다. 이제는 면접을 보기라도 하는 게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정말 모든 일을 헛짓으로 돌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저기..."


"네?"


옆 자리 남자가 뜬금없이 나를 불렀다.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꽤 좋네. 순간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람. 이 쓸데없는 심장의 울림은?


"혹시. 수연이..."


"네? 어... 누구?"


"맞지? 정수연, i대 국문과."


"...? 맞는 데 누구...?"


그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누구지? 머릿속을 아무리 스캔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너 선배도 못 알아보고? 우리 수업도 같이 들었는 데. 김병현 교수님 수업."


"아... 그 수업 듣긴 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머리가 나빠서... 성함이...?"


"김동훈. 곰훈이. 우리 조별 발표도 같이 했는 데. 약간 서운해지려고 한다?"


"헙!...!!!!!! 동훈.... 선배?? 동훈 선배예요?"


대박. 나는 혼자 박수를 쳐가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는 20kg 넘게 살을 뺐다고 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항상 거친 숨을 쉬며 수업에 들어왔고 여름에는 손수건을 달고 살았다. 푸우가 그려진 후드티를 자주 입어서 우리끼리는 곰훈이라고 불렀는 데. 웬일이야. 대박.



"면접 보고 그럼 시간 돼? 이따 밥이나 먹자."


"아. 예. 그럼 이따 톡 할게요."


"너 내 번호 있어? 아니다. 너 번호 아직 안 바뀌었지?"


"네? 네."


"그럼 내가 전화할게. 늦겠다. 빨리 택시 타고 가."


"네. 그럼 저 먼저 갈게요."


"그래."


나는 뒤돌아 서자 다리를 절뚝이며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면접 시간 약 30분 전이었다. 나는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아대며 연신 속으로 기도를 했다. 특정한 신을 부르지 않아 나의 바람이 이루어 질지는 모르겠지만 간절하니까 결국 인간의 힘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제시간에 도착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계속 나는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난 면접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담당자가 마지막 순서에 넣어 준다고 하여 한 시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휴.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다리 아픈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왠지 나보다 다 잘난 사람들로 보였다. 예쁜 여자도 많았고 똑똑해 보이는 여자도 많았다. 면접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했고 나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고 오금이 저렸다. 사원증을 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아침에 얼마나 멍청한 생각들로 가득했는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나만 등신같이 집에서 누워있구나. 기다리는 내내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들 멋있다.



허무한 면접이 끝나고 나는 선배를 보고 갈까 그냥 갈까 고민이 되었다. 준비한 말도 아무것도 못 했고 질문도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정답지라도 받은 걸까? 어떻게 말이 다 그렇게 청산 유수지? 나는 여전히 발을 절뚝거리며 15분을 걸어 지하철까지 갔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 지하철 노선표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면접 잘 봤어?

:어허허허헝...몰라요오오오오...


:왜? 이상한 거 물어보디? 나쁜 놈들.

:어허허허허허허...엉....


:에이... 잘 봤을 거야. 너 발표도 잘 하고 우리 과 탑이었잖아. 널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걸.

:어허허허헝...몰라...나 집에 갈래.


:응? 나 안 보구?

:나 너무 힘들어서요. 선배 어디예요? 저 발도 아프고 그래서...


:너 어딘데? 내가 갈게.

:네? 아. 여기 역삼인데...


:그럼 거기 커피숍 아무 데나 들어가 있어. 응?

:아.... 저....


:어허. 이제 졸업했다고 선배 말도 안 듣고?

:아... 그냥 다음...


:뭐 사줄까? 뭐 먹고 싶거나 가고 싶은 데 없어? 내가 다 해줄게. 너 오늘 스트레스 싹 풀어 줄게.

:에?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기분 풀고 가서 다시 면접 준비해야지. 어때?

:아.. 어쩌지...


:나 지금 갈게. 너 거기 그대로 있어. 30분만. 기다려? 알았지?

:에? 아... 네.



나는 전화를 끊고 뭔가 조정을 당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지하철 밖으로 다시 나갔다. 아. 그냥 간다고 말할 걸 그랬나. 나는 왜 아니라는 말을 잘 못하는지 모르겠다. 으휴.



선배는 정말 30분도 안 돼서 카페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또 못 알아보다가 선배가 먼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밖에서 보니 어머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진심 살이라는 게 무섭구나. 자체 뽀샵이네. 멋있다.


"쑤- 많이 기다렸지? 가만있어봐. 너 케이크 좋아해? 발 아프니까 앉아 있어. 스트레스에는 역시 당이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나는 얼떨떨했지만 뭐. 원래 친했으니까.


선배는 외모만 변했지 자상한 건 똑같았다. 카운터 앞에서 주문하는 그를 보니 나는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선배는 항상 내 생각보다 앞서 갔었다. 시험 때만 되면 항상 커피 배달이 왔었고, 밥시간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쑤- 오늘은 뭐 먹고 싶어? 내가 다- 사줄게. 맛있는 거 먹자.'라는 말을 했다.


학기 내내 너무 붙어 다닌 탓에 CC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나는 선배의 배려가 편해서 많이 기댔고 자주 만난 건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좋은 사람들과 불편해져야 하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 당신 나는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따로 있었고, 친구들도 내가 그 애 때문에 속앓이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다. 가끔은 선배를 붙잡고 내 속 타는 마음을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인연은 따로 있다고, 나는 곰훈 선배랑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우린 가족 같은 사이라고 말해도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어장관리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내 위에 여자 선배들이 날 대놓고 싫어하기 시작했다.




곰훈 선배는 누가 봐도 착하고 매너가 좋았다. 남녀 상관없이 모두에게 다정했다. 단지 몸집이 크고 그다지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오히려 곰훈 선배를 편하게 여자 친처럼 대해서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남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내 타입은 절대 아니었고 남자로 느껴본 적도 단 한순간도 없었다. 성격이 좋은 것과 남자로 보이는 건 엄연하게 다른 건데. 남자와 여자가 친하게 만난다고 꼭 사랑의 감정을 억지로 가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곰훈 선배는 모든 사람 중에서도 날 가장 이뻐했다.


러나 주위 시선이 불편을 넘어 왕따로 이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점점 곰훈 선배를 멀리 해야만 했다. 아마 그때쯤 선배는 교환 학생으로 독일로 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니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 살 뺐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는 데. 애들 만나면 얘기해줘야겠다. 진짜 대박.




"자, 딸기주스. 맞지?"

"응. 역시. 여전히 자상하네요."

"내가? 아닌데."

"선배 옛날에도 그랬어요. 자상 대마왕. 나 그것 때문에 여자 선배들 한테 엄청 욕먹은 거 모르죠?"

"진짜? 왜?"

"그냥. 뭐. 그랬어요. 나랑 붙어 다니니까 질투하는 거지 뭐. 괜히 선배가 착해서 여지 주고 다니니까 그런 거야. 흥."

"이런. 아닌데. 왜 말 안 했어. 우리 쑤 속상했겠다. 그치?"

"에이. 다 옛날 얘기 죠모. 그리고 선배, 바로 교환학생 가서 따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고."



추억이라는 건 참 좋은 거다. 우리는 옛날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었다. 그때도 좋았지만 지나면 더 좋아지는 것들이 항상 존재한다. 좋은 사람과 있을 때 마음의 가득 참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아차차. 자 이거."


"응? 뭐예요?"

"너 발 다쳤잖아. 발목 보호대. 음. 근데 구두 신어서 너무 흉하려나?"

"오. 님짱인듯!  감사 감사. 아픈데 멋이 뭐가 중요해."


나는 억지로 스타킹 위에 보호대를 올렸다. 구두에 발이 꽉 들어찼지만 그래도 뭔가 지지되는 게 덜 아픈 것 같다.


"꺄하하하하- 이게 넘 웃긴다. 너무 이상한가? 에이. 뭐 어때. 좋은 데요? 땡큐-"

"다행이다. 이따 갈 때 택시 타고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응? 아니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지하철 타면 되요."

"너 어린애 맞거든. 발도 쪼꼬매가지고. 어휴. 속상해."



나는 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정말 최악의 거지 같은 날이었는 데...




"곰훈선배...고마워요."

"응?"

"그냥. 나 오늘 진짜. 진짜 힘든 날이었거든요. "

"짜식."


갑자기 선배가 나의 머리를 흩트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또 심장이 귀에서 뛰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지... 나는 웃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다른 곳을 바라봤다.




"나 봐봐."

"응?"


"나 보라고. 어디 봐. 너 매일 따른 데만 보더라."

"아... 미안해요. 좀 산만해서."



"기다리길 잘 했다."



"네?"


"그냥,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날 기다렸다고. 너랑 우연히 마주치는 날. 매일. 진짜 매일매일 자기 전에 생각하고 그랬어. 시크릿 알지? 상상하면 이루어지는 거. 그거.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고 너는 날 못 알아본다고 해도 나는 아무리 멀리서도 너 알아볼 수 있거든."


"아... 뭐... 하하.  그러게. 신기하긴 하죠. 그렇죠. 어떻게 딱! 같은 날에 ,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에, 그것도 옆자리에... 나 처음에 선배 휴게실에서 늦게 타서 완전 싸가지... 아.... 그게 아니라.."


"뭐... 싸가지...?"


"아, 아니 아니. 아니라. 그러니까 아... 음... 뭐... 하하 딸기 주스 맛있다. 케이크도 완전 대빵 진짜 맛있어요."


"치. 귀엽긴. 그랬쪄요? 오구오구. 많이 먹어. 아유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이쁘더라."


또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하다. 옛날부터 선배는 저런 말 잘 했는 데.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 데. 그냥 성격이구나. 원래 립서비스가 좋다. 그런 생각이었는 데. 나 너무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나는 또다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참, 우리 쑤기는  뭐 그런 놈 있을까?"

"남친? 그게 뭐예요? 아. 막 그거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그런 거?"


"음.  좋아. 그럼 너 그 딸기 주스 다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켁! 케켁. 예? 뭐야 갑툭튀 에바다.하...하하..켁"


나는 주스를 빨대로 먹다가 사래가 걸려 한 참을 기침을 했다.


"어어... 괜찮아?"

"아, 네. 하하. 이놈의 식탐. 하하하... 그나저나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은 데..."


"싫은 데."


"예?"

"나는 싫다고. 나는 계속 너랑 있고 싶은 데."



"아 선배도 참. 여전하시네요. 저도 그러고 싶죠오. 하지만 막차 시간 다 돼서. 나중에 또 보면 되죠 뭘."


"... 너도 여전하구나. 맨날 모르는 척하는 거."


"예?"


"난 진심이고, 넌 장난이고. 우린 평행선이고."

"무슨... 하하 무슨 평행 이론 이런 건가"


"아니다. 됐다.  너 또 도망갈라. 오늘은 이만 가자. 내가 터미널까지 바래다줄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그냥 갈 수 있어요."


나는 뭔가 분위기가 뒤숭숭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가방을 메고 일어나는 데 아얏. 발에 힘을 잘 못 준 건지 나는 비틀 거리고 말았다.


순간, 선배가 나를 붙잡아 나는 선배 품에 안긴 꼴을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 저... 어..."


"괜찮아? 거봐. 너 정말 큰일이다. 병원이라도 가볼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진짜 혼자 갈..."

"너 자꾸 이러면 나도 마음 불편해. 그냥 택시라도 같이 타고 가자. 너 하루 종일 나 걱정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예????? 아유. 아니에요."

"너 아까부터 아니라는 말만 백번도 넘게 한다?"

"아, 아니... 아.."


"크크. 우리 쑤는 뭐가 그렇게 맨날 나한테 아니래. 나는 여전히 아니야?"

"아... 그게 아닌데."


"또!!"

"아..."


"가자. 여기서 더 아니라고 하면 화낼 거야."


".... 네."




나는 얼떨결에 선배의 부축을 받으며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옆에서 팔을 부축해주는 선배의 따스함이 전해져서 나는 애꿎은 땅만 보고 걸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같이 팔짱도 끼고, 어부바도 하고, 헤드락도 하고, 장난도 엄청 심하게 둘이 많이 쳤는 데.


뭐지? 이런 기분?


선배와 가까워질수록 커진 심장은 눈치 없이 두근 걸렸다. 왠지 내 심장 소리가 선배의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저 이제 갈게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싫다."


"응?"


"어떻게 만났는 데. 나도 같이 갈까?"

"헐. 선배 내일 회사 안 가요?"


"월차 내면 되지?"

"어제오늘 휴가 다 썼다며. 노는 거 좋아하면 그러다 잘려요."


"그럼 이직하면 되지."

"어휴. 애처럼 왜 그래. 저 갈게요."


"치. 치사해. 그럼 주말에 뭐해?"

"에? 뭐 발도 아프고 집에 있겠죠."


"나 가면 놀아 줄 거야?"

"에? 또 내려오시게요?"



"응. 꼭 갈 거야... 너랑 놀 거야"




버스 안은 고요했다. 여기저기 핸드폰 불빛이 눈을 좀 아프게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니 하루가 참 길구나. 뭔가 집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하루가 빨리도 지나가더니... 세상은 참 부지런하게 흐르는구나. 나는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생각했다.


아 아까  그 질문에 그런 말은 하지 말걸. 좀 더 자신감 있게 대답할 걸.


나는 면접 때 못 했던 말들을 이제야 막 청산유수처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아까는 왜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했는지. 바보 바보. 왜 모든 진심들은 다 지난 후에야 마음에서 머리 위로 도착하는지. 답답한 인생이다.


괜히 하루가 참 길었다. 나는 긴장이 풀린 탓 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 선배는 잘 들어갔을까?



"... 어 여보세요... 선배."


꽤 오래 잠든 것 같다. 창밖을 보니 벌써 시내 야경이 보이는 게 거의 도착한 듯하다. 잘 들어갔냐는 선배의 전화였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기니 왠지 마음이 따뜻했다.


"집에 갈 때까지 통화하자."


"음"

"왜?"


"그냥. 생각해보니 오늘 좀... 신기하다 싶네."

"뭐가?"


"우리 만난 것도 그렇고 다 요. 오늘 사실 면접 갈까 말까 고민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나 사실 앞 시간대 버스 탔어야 해. 그리고 옆 자리는 더 대박이고. 진짜 나 로또나 살까 봐요."


"사지 마"


"왜? 되면 내가 뽀찌 좀 줄랬더만."


"너 지금 로또 맞은 만큼 운 다 쓴 거야.  이게 다 운명의 운.이라는 거거든."


"치. 뭐야. 이것 그냥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을 정도의 약한 우연일 듯? 흥. 내 로또의 행운을 뺏길 수 없어 어허허헝."


"..."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라?  선배 삐진 거임?"

"..."


"에? 진심? 설마?"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거 같은 데? 에 삐쟁이"

"그게 아닌 게 아니라 그냥 우연한 운이 아니라고."

"응?"


"난 너 만날 줄 알았지."


"헐. 어떻게요? 혹 그 사이 신내림? 헐! 대박"


"아니. 오늘이 아니라도 내일 아니 그 언제라도 너랑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간절하니까."


"?? 응? 뭐가 간절해요?"




그는 한 동안 침묵하다,




"니가. ....니가 너무.

내가 너를 간절하게 원하니까. 간절하게 바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순간,

나는 심장이 제멋대로 서 버렸다.



그거 알아?

우연은 우연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간절함으로 만들어지는 찰나의 기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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