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혁명, 현재와 미래의 틈
4차 혁명과 인간의 존재감을 바라보는 개인의 견해 입니다. 4차 혁명이 무엇이라는 정보성글이 아닙니다.
꽤 깁니다.^^;; 약 10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페이스북은 우리의 일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인이 그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아니 답을 넘어서 모든 것을 쏟아 내고 있다.
자신의 일, 생각, 행동, 감정, 음식,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가족 등 이 모든 것을 공짜로 제공하면서도 즐겁게 사용한다.
나? 역시 1일 1포스팅 (아마 그 이상)으로 핸드폰을 눈 뜨자마자 확인하고 눈 감기 전에도 확인한다.나름 재미있게 쓰는 편이랄까.
이렇게 실시간,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제공하고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혼술, 혼밥, 혼여 등 혼자만의 라이프를 즐기는 것이 2016 떠오른 트렌드이다. 그리고 1인이라는 즉, '나'는 2017년뿐아니라 앞으로도 얼마간 쭈욱 모든 생산 활동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류준열의 YOLO (사실은 외국 여성분의 ) 한 마디는 사람들에게 뭔가 몽글몽글 했던 감정에 핵심을 찔렀고, '아! 그렇지. 어차피 인생 YOLO!"라는 결론으로 멈춰있던 스위치를 탁! 킨 것 같다.
2017년에도 핵심 트렌드라고 하니, 당신이 판매 또는 생산자라면 이 트렌트를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밥 먹으러 다니고, 혼자 쇼핑하는 걸 즐겼는 데 그땐 정말 이상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이 패스트푸드 점이나 분식집에 들어가 네 명이 앉는 탁자에 혼자 한 자리 차지하고 먹는 건, 그다지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아마 혼자 밥을 먹는 다면,
"혼밥 인증, 오늘의 브런치, 꿀맛! 핵맛!"
등의 글과 감성 가득 찬 사진과 (스타벅스라면 로고와 함께??) 포스팅을 하겠지. 그렇게 몇 마디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이고, 나는 무엇을 하고, 나는 어떤 사람임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그 포스팅에서
'혼자 밥을 먹는 군.'
'자주 가는 곳은 이런 곳이군.'
'어떤 스타일이군.'
'시간을 이렇게 쓰는 군'
등 그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포스팅들이 쌓여 우리는 그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신뢰감 형성을 한다.
강릉에는 도깨비 촬영을 한 뒤로 소위 대박이 났다. 김고은과 공유가 바닷가에서 처음 연인임을 선언하는 장소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이곳에 다녀간 '인증'샷을 찍고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앞에는 친절하게도 메밀 꽃다발과 목도리 우산 등을 유료 대여해주며 좀 더 드라마틱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재미있다. 누군가는 항상 모든 일을 자본의 기회로 보는 일들 말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그 증명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자신이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길이다.
당신은 어떤 타입인가?
그저 모든 사회의 상황에 눈팅으로만 지내며 은둔 생활을 즐기고 있는가? 그런 행위 자체가 본인의 모습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원래 좀 저렇더라.'하고 판단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난 그런 거 신경 1도 안 써. 나는 자연인이야.' 하면서 TV에 나와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증명한다.;;;;
나는 존재한다.
이름 세 글자 이외에 진짜 나로 '정의되는' 인간으로 말이다.
때로 사람은 '나는 왜 이렇지?'라는 질문에 한번 맞닥뜨리게 되면 혼돈에 빠지게 된다.
나는 왜? 나만 왜?
사람은 답이 없는 질문을 아주 싫어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증명해 내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정의(인증)는 특별히 소셜이 발달해서 생긴 건 아니다. 물론 팩트 폭력이라는 단어까지 갈 정도로 무언가의 증명을 요구하는 게 더 심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는 절대 아니야'라고 화를 낼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정의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출발은 '내가 원하는 나'라는 타이틀에서 시작한다. '나는 더 성공해야 해. 나는 더 멋진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에 대한 어떤 생각들 말이다.
- 나에 대한 생각들은 왜 하는 것일까?
인간이 현세에 스스로의 능력을 늘 부족해하고 불안해하는 건, 시간의 유한함이 주는 부담 아닐까?
누구든 어차피 딱 한 번인 순간들이고, 다시 오지 않을 기회들이며, 언젠가는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주어진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으로 존재하고 싶은 그 마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 타인의 시선에 대한 걱정은 왜 하는 것일까?
손톱도, 강한 힘도, 커다란 몸도, 딱딱한 이빨도 없는 연약한 인간의 존재는 (정보를 교환하며) 무리 짓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조화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타인과의 관계가 소셜이라는 공간에서 더 빠르게 확산되며 우리는 (약간의 거짓이든 진실이든) 자신은 00한 인간이다.라는 점을 끊임없이 증명해 낸다.
고로 나는 당신과 함께 지내도 안전한 인간이야. 나는 신뢰해도 돼. 너랑 비슷해.라는 메시지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으로 듣는 비판을 두려워하고, 내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 할 때 후회한다. 더 나은 이상을 꿈꾸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앞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자아 성찰하기도 바쁜 시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좁아지고 연결의 힘은 느슨해졌다. 고로 불안감은 증폭된다. 그러므로 오프 라인에서는 고립을 자처하면서 온라인에서는 누군가와 더 소통하려고 애쓴다.
이 이중적이고(때론 다중적) 아이러니한 사회 현상을 얼마나 익숙하고 불편해하지 않느냐가 관건이다. 점점 변하는 상황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 (이해력, 적응력, 공감력, 상상력 등)은 앞으로도 쭈욱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확인에 중요한 스킬이 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란 환경에 따라 행동 양식을 꾸준히 변화시키며 적응해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행동 변화는 때로 미약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책 대신 태블릿으로 독서 수단이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도서 구매 방식이 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이메일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기술은 우리 조부모 세대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의 새로운 습관을 만들면서 우리의 일상을 극적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이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가?
증강현실, -브렛 킹 외 지음
일자리가 사라질거라고 한다. 인간에게 일이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힘있는 잣대였다. 그런데 4차혁명이 오면 나의 존재를 증명할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하니 과연 우린 어떻게 해야할까. 이미 4차 혁명은 시작된 것인가?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자동화되며, 소유는 종말 하고, 인공 지능으로 인한 특이점이 오고, 로봇과 가족이 되고,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고, 일거리도 없으며 심지어 불노장생?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지금껏 본 적 없는 시대 말이다.
눈을 뜨면 하루가 멀다 하고 미래에 대한 정보와 새로운 기술들을 쏟아낸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우리는 이미 우주 전쟁까지 다 치렀다. ^^;; 상상으로 말이다.
그런 상상들이 현실로 다가올 때,
그 상상만 했던 일들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때, 직접 체험 한 후 어떤 기분이 드는가?
나는 한때까지는 오, 역시 세상 좋아졌군.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꿨을 거야. 하면서 내심 편리에 대한 만족을 느낀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쏟아지는 기술력은 만족을 넘어 두려움을 몰고 온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도중 며칠 뒤면 거대한 폭풍우가 닥쳐올 것이니 미리 준비해라.라는 일기예보를 보고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나의 배는 너무 초라하고 파도 한 번에 뒤집혀 버릴 것 같은 불안감, 나는 무슨 준비를 하고 어떤 기술을 익혀야 나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정보기술은 매해 두 배 이상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빌딩 크기였던 기기가 이제는 주머니 속에 들어갈 만큼 작아졌고, 25년 후에는 적혈구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아질 것이다. - 레이 커즈와일, 2009년
산업화 시대의 혁명은 인간의 모든 생활 패턴을 바꾸어 놓았다. 전기를 발명 해준 일은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나 모든 변화는 편리와 이점 동시에 불행과 파괴를 가져온다. 어쩌면 그것 자체로 균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그 규칙을 모두 이해하기란 힘들다.
ATM, 휴대폰, 인터넷, 페이스북과 같은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어떤 신기술이든) 그런 건 아무도 안 쓸 거야"라고 굳게 믿는 이들도 있다. 주된 이유는 "일시적인 유행이라서"인데, 그것의 용도를 찾지 못했다거나 안전성 또는 유용성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 등에 따른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러다이트라는 이름은 산업화 반대 집단의 리더로 알려진 허구의 인물 러드 장군 (또는 러드 왕)에서 비롯되었다. 러드 (LUDD)라는 이름은 당시 판사, 식료품 상인, 공장주를 협박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러다이트들은 수백 명의 군단을 이루면서 실질적으로 군대 수준의 힘을 갖고 있었다.
사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 군과 싸우는 영국군보다 러다이트의 공격을 막는 군인이 더 많았다.
증강현실 , 브렛 킹 외
물론,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새로운 기술이든 새로운 도구가 생겨나도 사람들은 잠깐 흥미를 갖고 금세 잊어버리는 경향이 더 많다. 우리 모두가 얼리 아답터족은 아니며 늦은 적응자 또는 부적응자들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굉장히 많은 사람이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등신들이나 하는 짓이야. 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모든 변화를 거부할 수 있을까?
텔레마케터, 물류 배달 및 수령 담당자, 수예가, 은행 창구 상담원, 서점의 책 관리, 카운터 등 담당 직원, 도서관 사서, 회계 담당 직원 등 자동화와 AI의 도입으로 위협받는 직업군들이 많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자신의 직업을 치면 위험도가 얼마인지 알려주는 곳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마치 길흉화복을 점치는 예언가처럼 '너 그러다가 폭망이야!'라고 자꾸 겁을 준다. 어쩌면 그러니까 :미리미리 대비하시오. 하는 친절함? 일지도 모른다. 이 불안감이 과연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습득 능력으로 이어가게 해 줄까?오히려 거부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것이다.
대부분의 러다이트는 장인이거나 섬유 공장에서 옷감을 짜는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숙련 노동자였다. 산업화 이전, 방직 분야는 상당한 수준의 숙련 기술이 필요했고, 이는 수년간 방직 기와 방직 틀을 다뤄야만 터득할 수 있었다. 자동화 기술이 등장하자 고용주들은 숙련공들의 특화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섬유 산업은 당대 최대 규모의 산업이었기에 노동 시장의 형태와 생태에는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러다이트들은 기술에 맞선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직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맞선 것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증강현실,
과연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달하면 또 다른 러다이트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물론 지금도 인간은 각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고 시위하고 반대한다. 그 시위가 때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중에게 미움을 사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맞는 견해를 따르기 때문이다. 타인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나의 정의와 가치판단에 의해 그것은 죄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정신은 기술보다 한참 늦게 변화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변화는 것에는 시간이 즉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적응 시간이 얼마나 짧냐, 또는 얼마나 받아들이냐에 따라 미래 사화에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무조건 적응해서 옳다거나 무조건 반대해서 옳다는 건 아니다.
단지 이 미쳐버린? 기술력을 막지 못 한다면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느냐 또는 인정할 수 있느냐라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런 불안감은 최근 점점 심화되는 데
얼마 전 한 포럼에 참석했다가, (지역 이름 잊음) 스마트 시티를 위해 교수진과 연구진 전문가들이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정말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또 서울에 스타트업들의 VR AR 현장에 가보면 별천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아. 다른 사람들은 다 앞서가는 데 나만 이러고 있나? 하는 불안감마저 엄습한다.
나는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다.
웃긴건 다만 그것을 실생활에서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이해하고 습득하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나는 아직 배달앱을 써본 적도 없다. (부끄) 얼마 전에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다가 결제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 적도 있다. (다시 부끄) 헤매고 있는 거다. 이런.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 수록 오히려 매장에 가서 사 오는 일이 잦아졌고, 때론 홈쇼핑이다. 나가는 일이 귀찮아지다 보니 결제하는 일도 적어졌다. (개이득)
검색도 잘 하지 않는다. 맞춤 광고가 오는 탓도 있지만, 사고 싶은 물품이 있으면 메인에 한 번 치고 알고리즘이 밀어주는 추천 제품으로 대충 훑어본 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런 면은 어쩌면 적응을 잘 하는 걸지도)
2016년에 속초에 포켓몬 고가 나왔을 때도 차로 40분이면 가지만 해보지 않았다. 쏘카도 안 써봤고 여전히 카카오 택시가 아닌 지나가는 걸 잡는다.;;
아직은 시대적으로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며 살고 있긴 하지만, 그 기술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다. 나 역시 적응의 느림들이 주어진 기술들도 아직 다 활용하지 못 한채 지내고 있다.
이런식으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까?
이 여정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 당신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당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증강현실, 브렛킹 외
이런 선택적인 기술의 적응은 아직까지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친 기술력들은 예전처럼 시간을 주며 발달하지 않는다. 기하급수적 증가 현상으로 우리를 지금보다 더 혼란에 빠트릴 수도 있다. 인류를 뛰어넘는 특이점이 온다니 말 다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적응하는 자와 하지 못하는 자를 동시대에 놓으니 기계와 인간뿐 아니라 인간대 인간 그러니까 인류 간의 격차도 벌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ABC를 배운 세대다. 그리고 컴퓨터라는 것도 친구 집에 놀러 가면 한 대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 집에 자동 응답 전화기가 생긴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니까 기술력으로 변화하는 세상 중간쯤 태어나서 아, 그렇지 하면서 이해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이미 뱃속에서부터? 인터넷을 이해하고 태어난다. 그들은 TV를 보는 일이 거의 드물며 인터넷으로 교육을 받는다. 2018년에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태블릿으로 디지털 교과서를 보급하고 공부한다고 하니 말 다했다.
그 아이들의 경험을 현 50대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공기놀이 심지어 그 한국의 특성상 윗 세대는 전쟁을 직접 겪은 트라우마도 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그런 경험은 책 속의 이야기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컴퓨터를 하지 못 하게 하는 부모가 많다. 마치 예전에 TV가 바보상자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둘의 세대의 격차는 얼만큼일까. 누가 누구를 더 이해해 줘야 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사람 사이에 = 의 부호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니까.
강연을 마치고 나서, 걱정에 가득 찬 학부모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그는 최근 증가하는 기술에 회의적인 부류로, 기술이 언제나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미래에 대해 설명한 내용에 대해 심히 우려를 느끼고 있으며, 7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는 데 최근 일주일 동안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주말 외에는 '평범한 아이'처럼 놀며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 부모의 문제는 새로운 세대에 태어난 아이,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아이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평범함'을 강요했다는 데 있다.
만약 그의 아이가 기술을 바탕으로 또래들과 소통하거나 경쟁할 수 없다면, 아이는 부정적 결과와 그로 인한 고통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균형은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기술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통용될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증강 현실
약 2030년이 되면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혁명이 일어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자고 일어나면 주둥이가 좁은 입구에 물을 대량으로 쏟아붓듯이 밀려 올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열린 사고를 가지느냐에 따라 당신은 적응할 수도 도태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음. 너무 부정적인 글인가? 현재와 미래의 틈에 갇힌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일 뿐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이미 당도해 있다.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윌리엄 깁슨
미래 영화에는 왜 그렇게도 재난 영화가 많고 우울한 영화가 많을까?
로봇들이 우리를 괴롭혀서 지구가 멸망하거나, 온난화가 지독해 지구가 멸망하거나, 식량이 부족해 지구가 멸망하거나, 핵이 폭발해 지구가 멸망하거나. 죄 아무튼 끝을 내는 상상이 많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인간들의 도전도 많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기술과 자신을 위한 또는 타인을 위한 인류애가 우리에게 항상 어떤 나침반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비이성적이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다. 허나, 어차피 세상은 한 가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니 그것도 다 하나의 가설과 증명 또 실험과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반대 급부가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일자리가 사라지면 또 다른 일자리가 생겨나고, 기계가 발달하면 기계를 잘 다루는 능력이 생길 것이다.
다만 생활의 편리는 높아지되 소득의 재미는 없어 질지도 모른다. 평생 일이라는 어떤 타이틀로 자신을 증명해 왔던 인간들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른 재미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상태에서 멈춘 채로 지내지 않으려고 부단이 노력한다. 그러한 자아 발견들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왔고 상상한 그대로 실현시킨다.
하나의 완성된 물체는 그 무엇이든 그 단면을 잘라보면 보이지 않던 이야기와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물론 시간마저 조종할 수 있는 그 어느 날이 다가 올지도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와 부딪히며 틈을 메우고 도전으로 이야기를 쌓아 갈 것이다. 그 어떤 불안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을 멈출 수 없듯이..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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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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