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타인 세상 읽기
작년 때아닌 세금 파티로 불황에 세금은 더 걷는 현상이 일어났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물가는 높아지고, 세금은 많이 냈는데 소득은 줄고, 부채는 감당이 안된다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이제 익숙해 질만도 한데... 어떻게 된 것이 한 해가 지나도 불황 체감은 불황이 없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0.0%(2016년 6월 기준)으로 저마다 빚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계신용 약 1300조 원으로 주택 담보 대출, 자영업자 대출(700조)등이 빛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올해 경제 성장 전망률은 여전히 2%대를 예상한다.
지금 우리는 사면초가 상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동시 다발적이다. 우리나라가 어수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드 불만, 트럼플레이션과 같은 정치 리스크가 한몫한다.
계속되는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세대 갈등, 4차 산업, 베이비 부머의 은퇴, 제품 양산 속도의 변화, 개인화로 분열된 1인 소비의 속도 등 나조차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동안 속도와 성장을 강조하며 덩치를 키워온 사회의 장밋빛 전망은 막상 한계점에 다다르자 해결 방안이 없다.
허나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은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말을 증명하듯 미디어에는 연일 평범한 인간에서 갑자기 거부가 된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렇다. 위기가 가장 큰 기회인 법! 창의력과 열정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런 최악의 불황에도 거대한 부를 창조해 낸다.
오오. 역시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 일단 해보라. 유행처럼 너도 나도 창업 전선에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창조경제라는 그럴싸한 이름 아래에 약간의 돈을 쥐어 주며 과장된 희망을 품게 한다.
가족의 구성원이 분절되고 공동체의 연대의식보다 개인에 대한 삶의 강조가 강해졌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보는 가족 공동체의 축소는 한 편으로 반가운 일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걸 공유하는 단체가 되면 어떤 소득이 들어와도 가족의 의논이 필요해 지기 때문이다. 즉, 마음대로 소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생각해봐라.)
예를 들어, 집안에 누군가 보너스 100만 원을 타 왔다고 치자. 그게 누구든 그걸 타 온 사람은 가족을 위해 쓰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여윳돈이 생겼으면 아버지는 백만 원짜리 산악자전거를 사는 게 로망이었고, 어머니는 100만 원으로 건강식품을 구매하고 싶었다. 딸은 해외여행을 가기를 바라고 아들은 노트북을 바꾸고 싶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 아래에서 이 욕망은 조절되어 가까운 국내 여행으로 마무리하며 남은 돈은 저축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욕망의 절제를 원하지 않는다. 소비를 합리적으로 하는 또는 줄어드는 돈맥경화는 빚을 내서라도 갖다 써야 한다. 그리고는 돈줄을 옥죄고 조금만 삐끗해도 개인의 역량을 탓한다. 그렇게 빚을 볼모로 시민들을 농락한다.
지금은 어차피 소비 성장이 어려운 판국이니 '자아를 찾아라' '나를 표현해라' 하는 말로 취향에 맞춰 매일 새로운 상품을 쏟아내며 소비를 부추긴다. 그리고 젊은 세다들은 불안으로 억압된 욕망을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로 처지를 위로한다.
이렇듯 개인화된 시스템 아래에서는 굳이 공동을 위한 욕망을 절제하는 선택을 할 필요 없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보내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YOLO 가장 큰 이슈이고, 개인의 경험 축적이 가장 큰 화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개별적으로 소비하는 분절화된 소비자들을 환영한다. 하여 소비자들믄 경쟁하듯 소셜에 인증하며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를 즐긴다. 그러한 소비가 평평한 세상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고령화와 가족 해체 도시화등 다양한 이유로 독거노인이 늘어간다. 그들은 노인 연금과 기존의 저축 그리고 소일거리로 생활을 한다.
예전 2세대, 3세대 가족이 함께 살 때는 노인이라는 사회 약자의 부양은 가족의 책임이었지만, 이제는 시 또는 주민 센터에서 관리해주기를 바란다. 연금과 더불어 요양 시설이나 요양 보호사에 대한 지원을 받으며 가족으로서의 공동 책임을 시스템에 전가시킨다.
이러한 시스템은 한 편으로는 자유를 주었다. 긴 병 앞에 효자 없다고 하던가? 가족에게 구박받느니 어쩌면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더 마음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또는 고생을 함께 나누지 않는 가족은 서로를 위한 희생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공동을 위한 희생정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생산해내는 것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장 작은 사회 단위인 가족끼리도 무의식적으로 노력 대비 효과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이 안된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상으로는 당연하게 인간의 도리를 찾지만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씁쓸한 사회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부모도 '나'라는 존재로 한 개인의 삶을 추구하고 자식도 '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간다. 그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건 어딘가 억울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은 옳다. 하지만 개인화만 추구하다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는 우리는 결국 모두가 약자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누가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끌어당겨 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희생이 강요돼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와 저성장 시대에 과연 무한 경쟁을 통한 자유시장 논리가 여전히 통하느냐는 말이다. 돈이 돈을 버는 원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밑천 없이 과연 경쟁 사회에 뛰어들 수 있냐는 말이다. 서로 보듬지 않고 타인이 쓰러지는 걸 보고만 있을 것이냐는 거다.
하여 우리는 누군가와 손 잡지 않으면 안 되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 또는 그러한 정신이 필요하다. 타인을 위한 마음의 여유와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빛나야 할 청춘인 20대부터 빚나는 사회가 되었다. 지금의 20대 30대가 50대 60대가 되었을 때도 과연 현재 시스템에 기대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을 꾸리며 오롯이 독거노인의 삶을 버틸 수 있을까? 현재도 불안한 이들의 노후는 어떨까? 시간이 갈수록 하류 노인에 대한 불안감은 더 심화될 것이다.
미래에도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열심히 하지 않아서,노오력이 부족해서, 개인의 잘못으로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진 것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 어떤 보호 장치도 없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공유 경제가 들썩이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여 복지 시스템 또는 새로운 위험 시스템에 대한 요구와 교육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200년 넘게 유지해온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그동안 나약한 인간이 등신이라는 개인 책임식 서바이벌 사회는 결국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 불신의 사회로 번졌고, 공동체로서의 포용과 지지는 사라졌다. 이는 단기적으로 이득이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개인에게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 왔다.
경쟁의 피로도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위로하거나 구제해 줄 수 없다.
그렇다.
바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했다.
다음 편 예고, 어른 유예: 어른이 되지 못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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