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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Nov 28. 2017

(1분 소설) 공존 空存

#클레멘타인 1분소설

<4월 18일 투다리>


"뭐 준 결혼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입을 한번 쩍 다시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그게 뭐랄까. 뭐, 그래. 그 여자랑 나는 뭐 그런 사이... 였겠지."


그는 스스로도 딱히 정의할 수 없었는지 말끝이 흐렸다. 탁자 위에 남은 소주를 단숨에 탁-털어 넣고 입을 닦으며 안주를 뒤적거렸다. 마치 그 쓰디쓴 이야기를 더 쓴 소주로 헹구어 내겠다는 일종의 의식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럼, 이제는 안 만나시는 거예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머리만 위아래로 두어 번 끄덕거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나도 더는 물어볼 수 없어 괜히 눈만 한 번 크게 치켜뜨며 '아아-' 하는 표정을 짓고 동시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힘내라며 위로를 건내어야 하는 건지, 상대를 욕하며 기분에 동조해야 하는 건지, 그저 잘 되었다 다 잊어라 해야 할지 도통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모난 접시 위에 잘게 잘린 낙지를 뒤적이다 적당한 놈을 하나 집어들어 입에 넣고 그냥 질겅거렸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 서너번쯤 술을 따르고 받고를 반복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게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전부다.




<천수 선배>


그녀의 집에 처음 간 날 천수는 내심 놀랐다. 이 여자, 혹 머리가 잘 못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왠지 오싹한 기분도 들었다. 호수는 101호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녀의 집은 계단 7개를 내려가야 했다. 주차장으로 오면 1층이지만 언덕에 걸쳐 지어진 집이라 정문으로 들어오면 반층 내려가야 했다. 


끼릭-


현관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이내 습한 냄새와 퀴퀴한 곰팡내가 섞여들어 콧 속으로 훅- 끼쳐와 천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 동안 가졌던 성적 흥분과 판타지 그리고 일말의 기대심이 무너져 내렸다. 밖에서 보던 그녀와 집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느낌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분명 밝고 사근사근한 성격의 여자라 생각했는 데. '여자 혼자 사는 방'에 대한 천수의 환상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쭈뼛쭈뼛 그녀 뒤를 따라 들어간 방은 불을 켜자 더 기괴했는 데, 방에는 그 흔한 침대나 화장대, 서랍장 등 보통은 있을 법한 생활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다. 방구석에는 각 없이 대충 접힌 누런 홑이불 하나와 회색 베개 하나 그리고 커다란 빨간 여행 가방 하나가 입을 헤 벌린채 놓여 있었다. 주변으로 작은 손거울과 샘플 화장품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썰렁하지? 내가 물건 사는 걸 별로 안 좋아해. 들어와."


스스로도 내보이는 것에 당당하지 못해서 였을까. 그녀는 천수에게 미리 그런 말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천수는 방으로 들어서서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괜히 좁은 방을 서성 거렸다. 소파도 없고 침대도 없어 방바닥에 그냥 앉자니 뭔가 이상했다. 오자마자 자리에 앉는 건 왠지 실례인 것 같고 딱히 구경할 거리도 없어 창살이 달린 방 창문 곁에 가서 괜히 창문을 열었다.


"여- 여기 지나가는 사람 속 다- 보이겄네."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위 아래를 훑었다. 밑에서 보는 건물들과 전봇대가 더 커보였다.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와 창살 사이를 맴돌았다.


"뭐. 그런 취미는 없어서."


"문 열어 놓으면 밖에서도 여기 보이지 않아? 이 위치면 조금 위험한 데. 너 조심해야겠다. 요즘 워낙 또라이들이 많잖아?"


"뭐. 보시다시피 흥미를 가질만한 집은 아니잖아."


"하하하. 뭐 그런가. 야,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집이 궁금해서 들여다보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볼 테면 보라지. 나도 똑바로 봐주면 되니까."


천수는 그녀의 반응에 괜히 무안한 기분이 들어 편의점에 다녀온다 하고 나왔다. 뭔가 께름칙한데 그게 뭔지 확신이 서지 않고 그냥 기분이 찝찝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왠지 아무것도 집에 들이지 않는 여자가 자신을 들였다는 것도 너무 진지 해지는 것 같고, 나중에 괜히 골치 아파지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천수는 편의점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한참을 시간을 보냈다. 


이대로 그냥 갈까, 집까지 초대한 거면 영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인가?


2월의 새벽은 너무 추웠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손이 꽝꽝 얼었고 몸이 저절로 떨려 한 자리에 서 있지 못 하고 계속 발을 종종 거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머리도 어지러웠다. 결국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시간에 집에 갈 생각 하니 택시비도 많이 나올 것 같은 데...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정말 잠만 자면 되지. 

최대한 안 건들고 그냥 시간만 보내다 아침 버스 다니는 시간에 나오지 뭐.

시작도 안 했는 데 벌써 미래 걱정이냐. 혼자 너무 앞서 가봤자 뭐 하니.


천수는 거의 10년 만에 '여자의 방'에 가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자는 말을 했을 때 내심 설레였는데 막상 와본 집안이 썰렁하다 못해 너무 스산해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앞으로 이런 날이 또 올까 싶어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되돌아 가기로 했다. 편의점으로 냉큼 들어가 맥주 3개와 꿀땅콩 하나, 레종 하나를 집어 들고 다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4월 18일 투다리>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날 그냥 집에 갔어야 해. 택시비가 얼마가 나오든 말이야."




<미란이>


"그거 알아? 돈으로 밀어붙이는 모든 것들은 역겨워. "


술이 동이 날 때쯤 미란은 혀가 꼬이고 벌게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대형 마트 같은 건 안가. 그렇게 커다랗고 뻔지르르한 곳은 뒤가 너무 구려. 다 알면서도 돈에 무릎 꿇는 인간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곳이야. 알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망상 속에 빠진다고. 아편굴로 제 발로 들어가는 거야. 뚜벅뚜벅. 잘 생각해봐 몇 발자국만 걸으면 저 마다 집 앞에 작은 슈퍼들이 있다고. 도대체 거기까지 돈, 시간, 발품 팔아 가야 하는 이유가 뭐야?"


미란이는 열을 토하면서 술잔을 다시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을 다녀오니 미란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미란이는 잠이 들지 않았지만 잠든 척 눈을 감고 그가 하는 행동을 소리로 느끼고 있었다. 무언갈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간 미동도 없더니 이내 남은 술을 탈탈 털어 목을 적시고 자리를 정리했다. 




<4월 18일 투다리>



"글쎄. 먼저 잠들었는 데, 그냥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왠지 서글프더라고.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든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남자로 매력이 없나 생각하다가 뭐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하고 살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 이전의 삶은 무엇이었나. 뭐 그런 거."




<천수 선배>


천수는 빈 병과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편의점 봉지 하나에 다 집어넣고 현관문 앞에 두었다. 


그냥 갈까... 


그는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나직이 부르며 깨워보았으나 그녀는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 눈이 움푹 패인 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니 천수는 마음이 짠 했다. 방 한구석에 접혀 있던 홑이불을 탈탈 털어 그녀를 덮어주고 베게를 머리에 받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불을 끄고 천수는 그녀와 반대로 돌아 누워 입고 온 잠바를 덮었다. 난방을 세게 틀은 탓인지 몸이 금방 노곤해 졌다. 누군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미란이>


그날 이후 그는 매일 퇴근하면 미란의 집으로 향했고, 편의점에 들렸고, 때로는 맥주 때로는 소주를 집어 들고 적당한 안주를 고른 뒤 함께 먹었다. 


"여기 이건 뭐야?"


방 한쪽 구석에 쌓여있던 잡지책을 뒤적이다 그는 책에 빨간 펜으로 작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오타."


펼쳐 든 잡지에는 몇몇 사진만 크게 들어있고 그다지 볼 게 없었다. 내용에는 외국 사람들이 밥 먹는 사진이나 외국 모델 화보 같은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거 사서 보는 거야?"


"응. 정기 구독."


"아직도 잡지를 구독해서 보는 사람이 있었네. 나는 어릴 때 선데이 서울 같은 거 이후로 끝이야."


"킨 포크 몰라? 완전 유명한 건데."


"킹 포크? 그게 뭔데? 주방 잡지 뭐 그런 건가?"


미란은 대답 대신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잡지를 집어 들어 몇 장 펄럭거리더니 더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밤이면 상대에 대한 질문과 자신이 가진 주장이 난무했고, 서로 이해하거나 오해하면서 함께 했다. 술이 바닥이 날 때 쯤이면 미란이 지쳐 그 자리에 잠이 들었고, 그는 어김없이 방 한쪽에 구겨져 있는 홑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고, 술 자리를 정리하고, 이를 대충 닦고, 불을 끄고,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이불 속에 들어가 적당히 그녀를 껴안다 별일 없이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랬다. 

서로가 마음속 깊이 사랑이 들끓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만둘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호감이 있었고 그런 만남이 이어졌다.





<천수 선배>


동네 작은 도서관 사서였던 그녀는 월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일요일 그녀가 출근하고 난 뒤면 창문을 살짝 열어 목을 빼고 담배를 폈다. 틈을 아주 조금 열어뒀지만 이를 느낀 여학생들이 때때로 놀라거나 여자들이 흠칫 거리며 창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돌아갔다. 하지만 천수는 단지 추워서 옷을 입고 나가기 싫었을 뿐이고 이런 오해를 하는 여자들이 귀찮았다. 그래서 더 인상을 쓰게 되었다. 사람들은 피했다.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자잘한 짜증이 솟구칠 때면 담배를 멀리 튕겨서 버렸다. 바닥에는 아직 연기가 피어 오르는 담배가 홀로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자신이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이면 그녀는 인터넷에서 핫하다고 하는 개인 커피점들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갔다. 그녀가 운영하는 SNS에는 감성적인 사진들과 문구들로 그녀의 일상이 빼곡히 채워졌다. 


"인스타가 좋아."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천수의 물음에 그녀는 그곳에는 나이도 인종도 시간도 성별도 지위도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만큼만 표현하면 되었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만 표현하면 되었다. 자신과 관계하고 있는 소셜 친구들 역시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 이상의 다른 것을 물어오지 않았다. 질문 없는 세상에 서로 이해하고 사는 건,


"간단하고 편리해."




"그리고 있어 보여."




<미란이>




"나는 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미란이 그의 품 안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얼마 전 책에서 읽었는 데, 세상에 존재하는 중요한 것들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거나 벽 속으로 들어간데. PC가 점점 작아져서 스마트폰으로 사람 몸에 붙어 있고, 스피커가 귓속으로 들어가고, TV나 에어컨, 붙박이장은 벽으로 들어갔잖아. 그런 것들처럼. 어떤 물체들이 사람이나 집과 하나가 되는 거야. 


나는 물건이 내 공간을 차지하는 게 싫어. 숨이 막혀. 언젠가는 버려지고 쓸모 없어져도 그냥 그 자리에서 처치 곤란한 상태로 있는 것도 많잖아. 물건이랑 나랑 무언의 심리전 같은 걸 벌이는 거 같아. 그러다 지친 사람들은 창고라는 걸 만들어 눈 앞에서 치워버려. 물건을 단지 쌓아둘 뿐이야.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나도 한 번도 열어보지 않는 물건들이 생기지. 


그런 게 나는 토할 것 같아. 결국 가진 것도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잊히고 도태되고 버려지잖아. 그러면서 아닌 척 사는 거 말이야. 결국 진짜 유용한 것들은 벽속으로 들어갈 거야. 내 몸속으로 들어올 거야. 그런 것들을 어떻게 버리겠어. 중요한 것들은 그렇게 진화하겠지. 나는 공간만 차지하는 무쓸모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버려지고 싶지 않아. 나는 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으음... 그래. 그래."



그는 자신을 더듬는 미란의 손길에 정신이 멀어져 그녀의 말을 건성건성 들었다.



"나중에 너가 그렇게 해 줄래?"



미란의 손길은 점점 빨라졌다. 현실과 꿈 사이에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매는 기분으로 그는 대답했다. 



"어엉?"



"벽 속에 들어가는 거 말이야. 너가 해줘."



"사...람이... 어떻게 벽 속에 들어...가.."



미란은 대답 대신 입술로 막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밤들이 펼쳐졌고 미란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 위에 쏟아냈다. 그러나 천수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천수 선배>



그녀는 천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매번,



"나는 결혼 따위 안 해. 나는 비혼족이야. 그러니까 안심해. 그러니까 뭐 그런 부담감이 있다면 말이지."



천수는 그 말이 싫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정말 부담이 낮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천수는 스스로 결혼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다. 서로의 가족을 궁금해하거나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함께 하는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시간들이었다.




<4월 18일 투다리>



"그러니까. 그게 아마 미란이가 심하게 아프던, 맞아. 독감에 걸렸거든. 걔가 평소에도 좀 몸이 약하긴 한 데 그날은 몸이 너무 뜨거워서 새벽에 내가 업고 응급실에 갔을 거야. 맞아. 그랬던 거 같아."




<미란이>


응급실에 미란이를 업고 들어온 그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헉.. 헉.. 여기! 여기 의사, 어딨어요! 의사?"



접수처에 있던 남자가 탁자 너머로 고개를 빼고 물었다.



"보호자분. 접수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그는 다급하게 다가가 접수처 남자에게 되물었다.



"열이 너무 심하게 나요. 큰일 날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다치신 건가요? 언제부터 그러신가요."



"아니요. 열이 난다고요 열이! 감기인 거 같은 데, 이게 아마 어제, 밤? 낮? 아마 어제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어디로 가면 되죠?"



"아.. 감기... 그럼 보호자분 여기 성함 쓰시고 접수 도와드릴게요. 응급실에 대기하시면 됩니다."



"아 씨, 지금 사람 죽어 가는 데 뭔 대기야. 의사 어딨냐고!"



"보호자님, 욕은 하지 마시고요. 감기라면서요. 접수를 하셔야 진료를 보죠. 일단 접수하시고 계시면 됩니다. "



미란이 등에서 그에게 억지로 말했다.



"천수야. 나 괜찮아. 화내지 마."



그제야 그는 식식 거리며 미란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힘 없이 내려앉은 미란은 이내 옆으로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접수처 직원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가 써 내려가는 동안 컴퓨터만 응시했다. 그의 서류를 받자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쭉 돌아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대기하시면 이름 부를 거예요."


그는 걸을 수 있다는 미란을 부축해 서류를 간호사에게 주고 응급실 의자에 자리 잡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젊은 의사가 빠른 걸음으로 오더니 감기라고요? 하면서 입 안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고, 눈 위로 작은 플래시를 똑딱 켰다 껐다 쏘고, 청진기를 가슴 위에 이리저리 대며 숨 셔보세요. 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열이 있던 가요? 언제부터인가요? 다른 증상은 없나요? 하며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했다. 다시 미란을 보며 환자분- 다른 데 또 아픈 건 없으신가요? 하고 재차 확인하더니 휙- 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의사가 돌아간 후 무표정한 간호사가 와, 열 좀 잴게요. 하며 미란이 귀의 체온을 재고, 이쪽으로 오세요. 하고 커튼을 열어젖히며 빈 침대로 오라고 하더니 링거를 꼽았다. 동시에 바지를 약간 내려 엉덩이와 허리 사이에 주사를 놨다. 응급실은 갑자기 죽겠다고 소리지르는 사람들 때문에 소란해졌다가 다시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가 소란해지는 반복이 이어졌다. 


최미란 환자분, 좀 괜찮으세요? 하며 젊은 의사가 다시 와 딱딱하게 차트를 훑어보고 미란을 이리저리 보더니, 일단 주사 맞았으니 열이 내리는지 지켜볼게요. 하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30분이 흐른 후 미란은 좀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 호흡도 편안해지고 얼굴의 붉은 기도 가라앉았다. 그는 침대 곁에 앉아 미란의 얼굴만 내내 보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아픈 사람은 처음이었고, 응급실에 오는 것도 처음이라 모든 게 무서웠다.


"나 괜찮아."


미란이 자신보다 더 쾡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물 좀 줄까? 어디 아픈 대는 없고?"


미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째 나보다 더 환자 같어. 너도 침대 하나 받아야겠다."


미란은 그를 보며 농담을 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바보야."


"내가 왜 바보냐. 너가 바보지."


"아프지 마라."


미란은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다시 미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이마를 갖다 대며 한숨을 쉬었다.



"희망을 버린 사람과 절망을 버린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할까."


미란의 가느다란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저 그대로 천천히 깊은 사랑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4월 18일 투다리>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야, 너도 꿈같은 거 있냐? 말 못 하는 꿈같은 거 말이야. 사실은 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는 데, 주변 사람한테는 말 안 한 그런 비밀스러운 꿈같은 거."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저는 꿈같은 거 없어요. 그냥 지금 하는 일 열심히 하는 거죠. 꿈이나 희망은 어차피 현실은 아니잖아요. 먹고 살기도 바쁘고."



"그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더라. 그 여자가 그랬거든. 똑 너처럼."



그는 벨을 눌러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나는 왠지 아니라고 크게 말 하지 못 했다. 분명 무언가 가슴속에는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가 꿀 수 있는 아니라 스스로 단정하며 살았기에 더 이상 욕심 내지도 않았다. 나이는 점점 먹어갔고 삶은 변하지 않았다. 점점 하락 곡선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히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분명 가슴속에는 무언가 있었다. 

스스로 죽이고 있었다. 


"그 전날 아침에 면접을 봤나 봐. 월요일이었거든. 승무원 면접. 어디라더라? 외국 항공사랬는 데. 뭐. 나는 몰랐지.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으니까."


그는 안주를 씹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한테 그래도 되냐. 그렇게 무책임하게."




<천수 선배>


"나 다음 주부터 중국에 연수가."


천수는 술자리를 만들며 도서관에서 중국도 보내주냐고 좋겠다고 했다.


"아니. 나 사실은 말 못 한 게 있는 데, 나 승무원 합격했어. 중국 외항사. 그래서 중국에서 1년 정도 있을 거야."


천수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놨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승무원이라니? 너 도서관 사서라고 하지 않았어?"


"어. 그런데 원래 내 꿈은 승무원이었어. 면접은 계속 보러 다녔고."


"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입력이 안되네. 그럼 일은? 도서관은 그만두는 거야?"


"당연하지. 거긴 그냥 먹고살려고 했던 일이고. 아무튼 응원해줘."


천수는 축하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말 하지 않았던 미란이가, 자신을 벽에 넣어 달라고 영원히 붙박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미란이가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간다니.


"왜 말 안 했어?"


"..."


"어? 왜 말 안 했냐니까?"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데 뭘 말해. 돼서 말하는 거잖아."


"허참. 너 진짜 이기적이구나? 그게 할 소리야?"


"..."


"너 이러려고 나 만났냐?"


"아니."


"너 그럼 처음부터 승무원 준비하고 있었는 데 나한테는 그동안 한 마디도 안 한 거야?"


"굳이 말할 이유가 없잖아."


"왜 말할 이유가 없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끝내자는 거야?"


"네 생각에는 언제가 적당한 데? 너 나랑 결혼할 마음이라도 있는 거니? 끝내기 좋은 시기는 언제야?"


"그런 말이 지금 왜 나와!"


미란은 그저 묵묵히 자기 앞에 있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한참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고 모로 누웠다. 천수는 그대로 한 참을 앉아 있다 일어났다. 방을 치우지도 홑이불을 덮어주지도 않았다. 벽걸이 걸린 옷을 내려 입었다. 가방을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여전히 물건들이 없는 미란의 방 안에는 미란이와 천수가 먹다 남긴 흔적들, 홑이불, 낡은 베개, 큰 여행가방, 그리고 모로 누운 잠든 미란이만 공존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4월 28일


아나운서: 오늘 아침 신림동 한 빌라 반지하 벽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대요. 자세한 이야기 송선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오늘 아침 손이 없는 한 여성의 사체가 신림동 빌라 반지하 자신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여성은 지역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연락도 없이 장기간 출근을 하지 않아 이를 이상히 여긴 직장 동료의 신고로 집을 방문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것처럼 여성의 집은 특이하게도 가구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대요. 여기 한 쪽 벽위에 이렇게 낡은 이불 하나가 덮여 있었고 그 안쪽 벽이 깨져있어 이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주민:  아니, 일주일 전인가? 벽 공사를 하는 지 새벽에 엄청 쾅쾅 거리더라구요. 제가 그때 시험 준비하느라 엄청 예민해서 참다 못 해 내려와거든요. 좀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려고 내려왔는 데 어떤 남자가 땀에 흠뻑 젖어서 문을 여는 데 좀 이상하더라구요. 술 냄새도 나고. 미안하다고 금방 끝난다고 하더라구요. 와이프 소원이라나? 그런데 그런 줄 누가 알았겠어요? 괜히 저도 심기 건드려서 뭔 일 났으면 어쩔뻔 했냐고요. 참나 요즘 왜 이렇게 또라이들이 많은 지, 무서워서 살겠냐구요.


기자: 용의자는 30대 초반의 회사원 남성으로 이 여성이 죽기 전  연인 관계로 보이며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하며 일절 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다툼이나 폭행의 징후는 보이지 않고 목이 졸려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특히 여성의 한 쪽 손이 절단된 채 보이지 않아 더 충격을 주고 있는 데요. 경찰은 사체 유기 및 살인 혐의로 A씨를 긴급 체포해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또한 여성의 사라진 한 쪽 손의 행방을 찾기 위해 용의자 A씨를 강도 높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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