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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Dec 11. 2017

(1분 소설) 뇌관

#클레멘타인 1분소설

은주는 오른발 끝에 힘을 꽈악 주었다. 부아앙- 엔진이 과열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는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블랙아웃된 도시의 신호등은 무용지물이었고, 은주는 목적지 없이 그냥 달렸다. 여기저기서 놀란 운전자들이 경악스럽다는 듯 클락션을 울려대고 급하게 운전대를 꺾으며 검은색 아반떼를 피했다.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움켜잡은 은주의 입에서는 고장 난 카세트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이까짓 것들, 버러지 같은 것들, 될 때로 돼버려라. 될 때로 돼버려.




"집에 아이 있으시면 이게 좋아요."


초보가 키울 식물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꽃집 사장은 손가락을 펼쳐 허공을 가리켰다. 천장 끝과 끝을 철사로 이은 줄에는 화분 여러 개가 매달려 있었다. 언뜻 보면 거꾸로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나 난쟁이들의 풍성한 흰 수염 같은 식물들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저게 뭐예요?"


"틸란드시아라고 하는 데 따로 손 가는 것도 없고, 분무기로 주변에 물만 잘 뿌려주면 돼요. 햇볕 바로 쐬지 말고 밝은 데 걸어두면 되니 초보자가 키우기 좋아요. 어쨌든 애 있는 집은 무조건이라니까요. 호호호."


"... 주세요."


은주는 치렁치렁 거리는 화분 하나와 작은 선인장 하나를 골랐다. 식물을 사는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손이 덜 가는 것들로 키워야 할 것 같았다. 예전 작업실 오픈할 때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누렇게 잎이 뜨거나 바싹 말라죽었다.


죽은 화분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그냥, 유독, 식물을 죽이는 사람이 있다고 크게 신경 쓰지 말라며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은주는 유독, '무언가를 죽이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더 싫어 그 이후로 다시 식물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내왔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생기가 도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반려 동물까지는 두려웠고 그래도 식물 정도에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고민을 약 1년 간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식물 둘 자리를 이리 저리 골라보았다. 베란다에 두기엔 8월의 태양이 너무 강렬했고, 욕실은 어두웠다. 주방은 유독가스를 대신 마셔줄 것 같기도 했지만, 왠지 음식 냄새가 풍성한 풀에 가득 고일 것 같았다. 화분을 들고 집안 곳곳을 서성이다 결국 침대가 있는 안 방 벽에 걸어 두기로 했다. 안방에서도 여기저기 배치해보다 TV 옆 자리가 알맞을 것 같았다.

기존에 걸려있던 결혼 액자를 내려 놓고 화분을 걸었다. 액자는 옷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침대에 누우면 화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작은 인테리어도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니 은주는 금방 피곤해졌다. 대충 정리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남편이 새벽쯤 술 냄새를 풍기며 옆 자리에 눕는 게 느껴졌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으악, 뭐야. 저거."


주방에서 아침밥을 준비하는 데 남편이 까치머리를 하고 눈도 못 뜬 채 뒤편으로 와 손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왜 그래? 아침부터."


"저거 뭐냐고. 방에. 귀신 산발 같은 거. 깜짝 놀랐잖아."


"보면 몰라? 화분이잖아. 자기도 참."


"기왕이면 이쁜 것 좀 사지. 뭐, 저런 화분을 방에 걸어놓냐. 소름끼치게. 귀신 산발 같아. 으-."


남편은 두 팔로 온 몸을 감싸며 몸을 털었다. 은주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덩치만 커다랗고 나이만 먹었지 항상 남편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때때로 그런 모습에 질리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남편은 팬티부터 양말 옷 스타일 등 하나부터 열 까지 챙겨줘야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날은 귀찮았고, 어떤 날은 안쓰러워 내가 더 신경이 쓰였다.
 

"웬일로 화분 산다더니 저걸 산거야? 저건 이름이 뭐야?"


"틸... 뭐더라? 무슨 틸..."


"털? 그래 털이 수부룩 하긴 하더라."


"털이 아니고, 틸 뭔데 아무튼 미세 먼지 먹는 데. 자기 비염도 있잖아."


"자다가 화장실 가기도 전에 오줌싸겠는데. 꼭 방에 둬야 해? 나 가위 눌릴 것 같아."


"아저씨, 그만 찡찡거리고 숟가락 좀 챙기세요옹. 밥  다됐다.  오늘도 늦어?"


"어, 이번에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좀 그렇네. 어쩌나. 우리 은주랑 놀아주지도 못 하고."


"됐어. 자기 잘 되면 나야 좋지."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휴가 내고 유럽 가자."


남편을 배웅하고 현관 문이 삐리릭- 하고 닫혔다. 은주는 냉장고 정리를 하고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안 방에 들어가 벽에 걸린 화분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가 몸을 눕히고 화분을 바라봤다.


어제보다 큰 건가.


먼지 먹는 식물이 잘 자라는 건 집에 먼지가 많다는 증거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괜히 찜찜했다. 창문을 열자 여전히 초여름 같은 더운 열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탁탁 털어 바깥에 잠시 두고 나갈 채비를 한 다음 이불을 다시 들여놨다.


 



"어머 은주야, 야, 너 김은주 맞지? 작은 은주, 김은주!"


"어? 은주야!"


자주 가던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자, 이름이 같았던 은주를 만났다. 반에 김은주 두 명이 있어 큰 은주, 작은 은주였다. 큰 은주는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는 좀 더 우아해져 성숙함이 느껴졌다. 긴 웨이브에 햇볕을 막을 얇은 여름 카디건, 그리고 화이트 면 팬츠를 입은 은주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빛이 났다.


"나는 아직 항공사 다니지."


은주는 동창들이나 SNS에서 큰 은주 소식을 간간히 듣고 있었다. 동창들은 지금도 은주 얘기를 하면 용 됐다는 표현을 하며 쑥덕거렸다. 고등학교 때 큰 은주는 반에서 꽤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는 데,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진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머리는 약간 빗자루처럼 결이 나쁘고 푸석푸석했다. 앞머리는 항상 눈 밑까지 길게 일자로 똑 바르게 자르고 다녔는 데 아마 주근깨 때문인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손으로 앞머리를 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기도 했다.


비교적 평범한 학교 생활을 했던 (작은) 은주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세트로 많이 취급되었다. 사람들의 등 떠밀림에 둘은 종종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 데, 그렇다고 큰 은주가 작은 은주에게 큰 호감을 보이거나, 작은 은주가 큰 은주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냥 그들은 같은 반, 같은 이름을 가진 김은주였다.


"너는?"


큰 은주는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귀에서 반짝거리는 귀걸이가 앙증맞고 귀여웠다.


"나는 그냥... 놀아."


작은 은주는 대답하는 데 왠지 창피했다.


"이야, 좋겠네. 나도 결혼하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문화생활하면서 살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나는 답답하고 성격에도 안 맞더라. 내 커리어도 아깝고. 아, 그러고 보니 너는 어릴 때도 내조하면서 참한 아내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던가?"


하면서 큰 은주는 웃었다. 작은 은주도 큰 은주가 웃자 그냥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정말 웃겨서 웃은 건 아니었고, 딱히 반박할 말도 긍정할 말도 없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는 데, 나쁜 말도 아니었는 데, '너는 내조하면서 참한 아내가 꿈' 이라는 말 어딘가에 심장을 찌르르하고 찔린 것 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내조하면서 사는 게 꿈이라고? 내가 정말 그런 말 한 적이 있었던가. 어디선가 벽에 쫘악-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뭐지. 지금 이게 무슨 기분인지,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그렇게 은주와 몇 없는 옛날 기억을 더듬어 가며, 한 시간 가량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야, 연락 좀 자주해.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보자."


은주는 아우디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이야기했다.


"어, 그래. 나 여기 자주와."


둘 은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집으로 돌아가 은주는 큰 은주에게 '잘 들어갔냐'는 카톡을 보내고 큰 은주에게서 '즐거웠다, 더운 데 건강 잘 챙겨.'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 날 이후로 바빠진 탓인지, 관심사가 다른 탓인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큰 은주를 만나고 온 날 밤 은주는 꿈을 꿨다.


갑자기 벽에 걸린 식물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꾸룩, 꾸룩, 꾸룩, 살갗이 터지고 뾰족한 잔 가지가 여기저기서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은주는 옆에서 잠든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자기야! 자기야! 일어나 봐!!!! 자...기..꺄아악"


억지로 돌려 세운 남편의 눈은 꺼멓게 텅 비어 있었다. 어어- 하는 입 모양을 하고 크게 벌리고 있었는 데, 이미 길게 자란 풀들이 남편 입에서 쉴 새 없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의 배는 누군가 펌프를 누르며 바람을 집어넣기라도 하는 듯 빠른 속도로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맨질맨질 물기 가득한 회색빛 얼굴 속에는 나무줄기들이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 듯 울퉁불퉁해졌다.


"으아아악!"


은주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밧줄처럼 길어진 줄기들이 두 발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시..ㅅㅣ...싫어. 시러어어어어어어!!!"


푸왁- 남편의 부푼 배가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은주는 너무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울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뜨듯하고 미지근한 것들을 뒤집어쓴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이 소란을 듣는 사람은 오롯이 그녀뿐이었다.




남편이 중국으로 한 달간 출장을 가게 되었다. 남편은 인터넷으로 택배를 잔뜩 시켜 두었는 데 스팸과 냉동 볶음밥, 낙지볶음이나 함박 스테이크, 과일 박스 그리고 과자와 유제품, 각종 반찬들을 미리 사 두었다.


"세상에. 뭘 이렇게 많이 시킨 거야?"


"나 없을 때 혼자 장 못 보잖아. 내가 있어야 하는 데. 한 달만 참아. 알았지?"


남편은 은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냥 대충 먹으면 되는 데, 나 혼자 이거 다 못 먹어."


"그래도 이렇게 사둬야 내 맘이 편하지. 지난번 일도 그렇고."


아닌게 아니라 지난번 은주 혼자 장을 보다 돌아오는 길에 비닐이 퍽 터져버렸다. 산책 삼아 옆 동네 마트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많이 사지도 않았는 데 처음부터 비닐이 약간 부실한 편이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비닐이 예상치 않게 투둑! 하고 끊어졌고, 은주는 당연히 당황했고, 참외가 구르고, 계란이 깨졌다. 오렌지 주스는 뚜껑이 터져 옆으로 넘어진 채 바닥에 줄줄 흐르고 있었다. 신호가 당연히 빨간불로 바뀌었고, 은주는 그 사이 정리하지 못해 혼자 6차선 도로 중간에, 많은 차들의 신경질 적인 클락션을 들으며, 안절부절 한 날이 있었다. 그 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으이구, 좀 잘 하지. 그러게 왜 장을 혼자 봐. 혼자 보긴. 뭐 엄청 급한 일 있다고. "

 


"필, 뭐라고?"


"틸란드시아. 내가 키우는 식물 이름이야. 에어 플랜트라고 하는 데 미세먼지를 먹는 식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세 먼지 속에 수분과 유기물을 먹는데. 굉장하지 않아? 그리고 먼지는 다시 뱉어버리는 거지. 곰팡이 포자 같은 것도 먹는 다니까. 신기하지?"


중국에서 오랜만에 전화 온 남편에게 은주는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그러냐고. 신기하다고. 자기는 내일 클라이언트 앞에서 PT를 해야 하는 데 외국인 앞에서 하는 PT는 처음이라 떨린다고 했다. 은주는 당연히 당신은 잘 할 거라고. 그 동안 밤 샌게 얼마냐고. 잘 될 거라고 다독거렸다. 남편은 한 동안 바빠서 전화 자주 못 할 수도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걱정하지마. 자기만 잘 되면 되지 뭘. 아참, 자기네 회사에는 성폭행이나 그런 문제는 없지? 그런 사람은 없지?"


"응? 갑자기 왜?"


"아니, 오늘 TV에서 한 참 이슈길래. 한국은 지금 그게 실검 1위야."


"그래?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없어. 또 모르지. 나만 모르는 건지도. 있어도 쉬쉬하는 일이잖아."


"아무튼 조심해."


"내가 조심할 게 뭐 있냐."


"그런가. 여자 상사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러면 한 방 때려버리지 뭐. 왕년에 또 오빠가 강냉이  좀 털었잖아."


"참나. 잘 도 그러시겠다.그리고 그건 그냥 폭행이잖어."


"그게 왜 폭행이냐, 방어지. 크크크크. 아니 그런데, 그나저나 그 여자는 도대체 모텔에는 왜 따라갔데?"


은주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빨리 자라고 이야기 하고 끊었다. 전화를 끊고 은주는 혼자 생각했다. 나도 몰라. 하지만 따라갔데. 그리고 성폭행당했데.

은주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내일 중요한 PT가 있었다. 좋은 기분으로 잠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분명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었는 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자신이 대변해 줄 일인가. 하지만 은주도 마음 한편에서 그 질문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그럴 수 있지? 뭐가 그럴 수 있는 거지? 누가 누구에게 그럴 수 있다는 걸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은주는 다시 긍정을 부정했다. 그러다 마음 한편이 우울해졌다.


링 위에 올라갔다고 꼭 싸워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갑자기 싸우기 싫다는 사람 무조건 때리면 안 되잖아.



머리가 너무 아파 은주는 이불을 덮고 혼자 중얼거렸다.



... 왜 성이 폭행이 되었을까.



은주는 그 날밤 또 악몽을 꿨다. 이번에는 자기가 옆에 누워있었다. 남편과 똑같은 자리에 공허한 눈을 하고 입을 동그랗게 어어-하고 벌린 채 뻗어진 가지를 콸콸 게워냈다. 은주의 배는 자꾸만 자꾸만 커지다 뻥- 하는 소리를 내고 터져버렸다.





마음이 후련했다.  




다음 날 은주는 안방에 있던 화분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공중에 매달아 놓은 빨랫줄에 걸어 두었다. 아무래도 남편이 없는 동안 화분과 단 둘이 방안에 있는 건 께름칙했다. 또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는 그날 함께 사온 선인장이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은 선인장이라 그런지 처음 사온 날과 별 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은주는 화분을 눈높이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약간 갈색으로 변한 곳이 있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문제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서 영양제를 시켰다.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화분들도 자리를 바꾸면 몸살을 앓는다는 글들을 읽었다. 자신의 무심함이 아닌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앓는 몸살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리 잡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내일모레 10시 비행기야. 회사 잠깐 들렀다가 저녁 먹자."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올 무렵이었다. 날씨는 9월이 지나도 여전히 여름처럼 더웠다. 인디언 서머가 아니라 그냥 서머였다. 정말 계절이 4개에서 2개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덥거나 춥거나. 점점 세상이 극과 극으로 나눠지는 것 같아 은주는 무서웠다.


전국적으로 전기 소비량이 많아 연신 TV에서는 절전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지역적으로 전기 수급을 조절해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에어컨 없이 잠들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은주는 밤새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느라 깊은 잠을 못 자고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말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미쳐버린 건지 궁금했다. 이 더위로 지구 위에 약한 것들은 모두 녹여 버리려는 지구의 계획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배만 홑이불을 덮었다. 계속 뒤척이다 내일 시원한 걸 먹어야지 뭐 먹지? 하면서 인스타그램을 켰다.


#목동 맛집


여기저기 맛집 서칭을 하다 어느덧 밖이 희끗하게 밝아졌다. 창문에는 걸어둔 식물이 바람에 흔들려 벽에 비친 그림자가 어른어른거렸다. 은주는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다 꿈이 떠올랐고, 꿈이 떠오르다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이 떠오르다 남편이 중국에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행동을 할까, 내 생각은 할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갑자기 슬퍼졌다. 남편은 지금쯤 프로젝트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 일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겠지.




'나의 고민은 왜 이렇게 보잘것없고 사소해졌을까.'




옆으로 돌아누운 은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남편이 돌아오는 아침 베란다에 나간 은주는 누렇게 뜬 선인장을 발견했다. 틸란드시아는 여전히 생기 있게 자라고 있었다. 눈에 띄게 길어져 있어 약간 정리 좀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로 나누어 포기를 심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주는 죽어버린 선인장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다 바로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다. 더 이상 고민해봤자 죽은 식물이 살아날 것 같지 않았고 식물의 시체를 집에 두고 있기도 싫었다. 남편이 식물 죽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은주는 갈증이 솟구쳐 무작정 차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은주는 남편을 만나러 가기 전 조금 일찍 집을 나서 스타벅스에 들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두고 2층에 올라가 페이스북을 뒤적거렸다. 사람들은 한 창 비트 코인으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누군가는 군대를 가기 전 사둔 비트 코인이 2억이 되었다, 비트코인 때문에 용산이 난리다, 비트 코인이 미래의 돈이다 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다 오늘은 비트코인 폭락에 관한 이야기가 전반적이었다. 비트 코인은 24시간이라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인들이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덧글로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이제 한강은 물 반 시체반이라는 둥, 119가 바빠지겠다는 둥, 실시간으로 개폭락하는 걸 보고 있는 게 너무 꿀잼이라는 둥,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둥, 역시 한탕 주의자들은 망해봐야 정신 차린 다는 둥 갖가지 조롱들이 베스트 댓글로 달리고 있었다.


은주는 덧글 창에


...왜 남의 불행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나요


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 죽어도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까요.


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렇게 몇 번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동안 은주는 나의 일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 써도 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남편 돈으로 먹고 살며 아무 일도 안하는 자신에게 남을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하며 반문했다. 누구와도 싸울 자신이 없어 핸드폰을 덮었다. 그러다 자신이 시킨 음료가 생각보다 너무 늦게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주문번호 A-30 고객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나왔습니다. "


은주는 당연히 자신의 닉네임이 아니라 신경 쓰지 않았다. 픽업 자리에는 바닥이 물로 흥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은주는 더 이상 픽업 해갈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직원에게 가서 확인했고 자신이 주문한 커피라는 걸 알자 화가 났다.

자신의 닉네임인 '에밀'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닉네임을 부르지 않은 탓에 당연히 자신의 주문인지 몰라 한참을 기다렸으며 커피의 얼음은 이미 녹아버렸다. 직원은 연신 죄송하다며 다시 해주겠다고 했지만 은주는 화가 났다.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냐고, 왜 그랬냐고 소리를 지르고는 스타벅스를 무작정 나와버렸다. 9월 중순의 햇볕에 정수리가 너무 뜨거웠다. 세상 모든 것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식어야 할 계절을 건너 띄고 바로 겨울이 올 것 같았다.


은주는 신경질적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끼이이이익-


여기저기서 갑자기 클락션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호등이 깜박깜박 거리거나 꺼져 있었고 급정거하는 타이어의 마찰음이 고막을 찢었다. 블랙아웃. 서울 도심이 갑자기 끊어진 전기에 서서히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은주는 심장이 두근 거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핸들을 잡은 양 손등에는 갈색 반점이 퍼지고 있었다.  사두고 까맣게 잊었던 죽은 선인장이 보닛 위로 우루루 떨어졌다.


왜, 왜, 왜,

나는 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나는 왜 자라지 않지?

나는 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


 갑자기 아랫배가 땅기며 꾸룩꾸룩-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머릿 속에서 틸란드시아가 뇌를 먹어치우며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자신의 몸을 뚫고 밖으로 나와 세상의 모든 쓰레기와 양분을 빨아먹어치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오른발 끝에 힘을 꽈악 주었다. 부아앙- 엔진이 과열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는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블랙아웃된 도시의 신호등은 무용지물이었고, 은주는 목적지 없이 그냥 달렸다. 여기저기서 놀란 운전자들이 경악스럽다는 듯 클락션을 울려대고 급하게 운전대를 꺾으며 검은색 아반떼를 피했다.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움켜잡은 은주의 입에서는 고장 난 카세트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이까짓 것들, 버러지 같은 것들, 될 때로 돼버려라. 될 때로 돼버려.





틸란드시아 에어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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