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타인1분소설
"그러니까 그 증상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음... 글쎄요. 하. 잘 모르겠습니다."
"음. 심각하군요. 그럼 최근 기억나는 사건이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나요?"
"죄송하지만, 저는 진짜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습니다. 최근 제가 본 환자 중에 가장 심각한 정도로 보입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병이죠? 기억 상실 같은 건가요?"
의사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날 가만히 바라봤다. 의사의 눈에는 어딘가 뭔지 모를 이상한 기운이 맴돌았다. 오래 앉아 있은 탓에 혈액순환이 더딘지 보랏빛이 도는 두꺼운 입술을 천천히 벌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일명, 모르겠다 병입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의사 말에 따르면 최근 무엇을 결정하지 못해 갑자기 혼란에 빠져 일자리를 잃거나 생업을 포기하며 아노미 상태에 이르는 지경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신체에 특별한 증상은 없으며 단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해 극도로 불안해하는 증상이라고 했다.
특히, 어린 시절 말 잘 듣던 착한 아이라 칭찬받던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생기는 병이며, FM으로 생활하거나 군인, 상위 대학, 회사에서 자기주장을 잘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감염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작고 사소한 메뉴 선택에서부터 진로 결정이나 인생의 목표 같은 중요한 선택까지 모든 판단이 흐려져, 일상이 물에 불어 휘어진 나무판처럼 틀어질 수 있다고 했다.
"삶은 선택과 확인의 연속이니까요.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는 힘을 잃으면 무기력해지죠."
의사는 처방해주는 약을 잘 챙겨 먹고, 술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간혹 이 상황을 참지 못 하고 술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스스로 결정이 어렵고, 무슨 일을 하든 확신이 없는 증상?
확신? 도대체 확신이라는 게 뭐지?
돌이켜보면 내가 무엇을 해도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회사도 부모도 학교도 누구도 내가 가진 능력을 탐탁치 않게 느꼈다. 나는 늘 그들에게 부족한 인간이었고 만족시켜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잘 훈련된 세퍼트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확신하는 힘?
다 아니라고 하는 데?
그렇게 하면 어차피 안 된다고 하는 데?
나는 도저히 그게 무엇인지 몰라 의사가 처방해준 색색깔의 알약 5개를 동시에 털어 넣고 이불속에 들어갔다.
다음 날 눈을 뜨니 약 기운이 도는지 손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벌써 8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8시 45분까지 출근해야 했기에 엄청난 지각이었다. 하지만 왠지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나는 서둘러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9시 10분이 되도록 이불 속에 앉아 멀뚱 거렸다.
"김 대리, 지금 어디야?"
송 부장의 째지는 목소리가 전화선 너머로 들어왔다.
"저... 집입니다."
"뭐? 집? 출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어디 아픈 거야?"
"아... 뭐... 그건 아니고."
"뭐?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야? 김 대리 출근 안 할 거야?"
"아... 하긴 해야 하는 데."
"아우, 답답해. 나 지금 나무늘보랑 통화하니? 출근 안하냐고."
"아... 그런가요."
"워메. 김대리 한국말 돼? 여보세요. 김상! 다이조부? 이거야 원. 돌겠네. 출근 안 하냐고. 지금 이사님 회의 기다리고 있다니까? 뭐 하자는 거야. 뜨신 밥 먹고 나랑 장난해? 회의 자료는, 자료는 다 만들었지?"
"저... 전 아직 식전이라."
"썅, 개소리 말고 빨리 텨와!"
송 부장은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회사에 시간 맞춰서 가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깊은 숨을 마시고 조용히 읊조렸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니 지하철도 나름 한산하고 버스도 한산했다. 내가 왜 그동안 아침마다 지옥철에 콩나물시루 버스를 탔을까?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다 약 기운 때문인지 나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자리에 앉으셔요.
아, 자리에 앉으시라고요!
아니,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소리를 지르긴! 싸가지 없이!
아니 어르신 위험하니까 앉으시라고요!
"아얏!"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더니 옆구리에 뭔가 묵직한 게 강타하는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몸을 내 쪽에 밀착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짐으로 보이는 물건이 내 발 등 위에 놓여 있었다.
"어르신 앉으세요."
노인은 밀치듯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나른한 몸을 끌고 억지로 눈을 떠보려 애를 썼다. 하품이 절로 나왔고 주변을 둘러보니 5 정거장 정도만 가면 될 듯했다.
곧이어 사거리에 정지 신호가 잡혔다. 그때 버스 기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기사에게 쏠렸다. 나는 어리둥절 했다.
그는 내 옆에 서서 앞에 노인을 보며,
"제가 아까 소리 지른 건 미안한데, 버스 기사들은 노인들이 버스 안에서 사고 나면 기사 책임이라구요. 그래서 "
"뭐어!? 거 내가 아까"
"아니, 제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제 말을 들으시라고요! 제가 그래서 노인들 다치면 위험하니까 빨리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한 거잖아요. 여기서 사고 나면 저희도 피곤합니다. 노인들 타면 힘들어요. 기사들도, 그리고."
"아니, 말을 말이야, 언성을 높이고 어! 아주 말이야. 기사가 손님 접대를 그렇게 하고, 어!그런식으로 하면 안돼. 서비스를 말이야-"
"아니 제가 한 번 이야기하고 두 번 세 번 이야기해도 안 들으시니까, 언성이 높아지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죄송.."
"거 말이야. 똑바로 해! 어! 똑바로! 요즘 젊은것들이 말이야! 노인네들 타면 양보도 할 줄 알아야 지. 어? 지들이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게 다 누구 덕인 줄 모르고, 어? 사지 멀쩡한 것들이 죄 자는 척하고 말이야. 어? 이러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어? 죄 빨갱이 새끼들 뿐이야. 오죽허면 자기 부모뻘 되는 사람을 소리를 지르고 업신 여길라고 하고 말이야. 으이구. "
기사는 신호 때문에 자리로 돌아갔다.
노인은 나를 보며 삿대질을 하고 목청을 높였다. 나는 어리 둥절해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에게 쯔쯔쯔 혀를 찼다. 사람들의 시선이 기사에게서 노인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거지?
버스 안은 긴장감으로 곧 터질 것만 같았다. 버스 안 사람들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잘 못 한 건가. 나는 무작정 하차벨을 눌렀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회사 가는 길 같기도 한 데 어딘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대로 회사를 가지 말까? 꼭 회사를 가야하나? 가봤자 욕만 먹는 데?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이 맴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다시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대리, 김대리, 지금 어디까지 왔어?"
"어... 모르겠습니다"
"뭐라? 미친 거 아니야? 모르긴 왜 몰라. 출발 하긴 한 거야?"
"네... 그렇긴 한데."
"근데, 모르는 건 또 뭔데? 김 대리. 지금 이사님 완전 열 받았다고. 아, 진짜 왜 이래? 나 엿 먹이려고 그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좀 전에 어떤 노인이, 저 보고 자리 양보를 안 한다고 소리를 질러서... 어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약 기운이 돌아서 어... 약간 그러니까..."
"뭐? 뭔 소리야 이게. 그래서?"
"그래서.... 어... 그냥 내렸습니다."
"뭐어?... 하아... 야이- 또라이 새끼야악!. 똥으로 시를 써라. 시를 써. 아우. 증말. 야, 됐고. 너 같이 미친놈은 필요 없으니까 나오지 마. 어? 안 와도 돼. 그냥 그렇게 쭈욱 모른 체로 사세요. 네? 너 자리 뺄 거니까요 그렇게 알고 퇴사 서류는 팩스로 넣으세요."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나는 이래도 되나 싶었다. 정말 회사를 안가도 될까? 그만둬도 내 인생 별일이 없을까? 이 사람은 나한테 이렇게 욕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 이 일 하기 싫었잖아?
아니야. 내가 여기 입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 데. 웃기고 있네. 여기는 내 꿈을 완성할 곳이 못 돼. 니 꿈이 뭔데. 꿈? 어. 꿈.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그냥 뭐. 돈 많이 버는 거. 그리고 돈 벌어서 여행 다니는 거. 아닌가?
아, 모르겠다.
나는 갑자기 두통이 찾아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쭈그리고 앉아 울렁거리는 땅이 멈출 때까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봐요. 이봐요.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자,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예. 고맙습...어?"
"?"
그는 며칠 전 나의 증상을 상담해준 의사였다.
"어-어? 선생님! 김한기 선생님 맞죠?"
"어? 네. 어! 그때 그-"
"네. 저예요! 모르겠다병 말기 환자! 지금 출근하시는 거예요?"
"아..."
"어라? 그런데 병원은 이 근처가 아닌 데, 어디 가시나 봐요?"
"아..."
"?"
"모르겠습니다. 저도."
"네?"
"모르겠어요. 저도. 아마, 어. 그러니까. 그 병에 옮은 거 같아요."
"오- 저런."
그의 보랏빛 입술이 햇빛을 받아 연하게 오므러졌다가 오르쪽으로 틀어지며 오물오물 움직거렸다.
클레멘타인 1분소설
say.
최근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다행히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