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Mar 23. 2018

(1분소설) 춘분

#클레멘타인 1분소설




잘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는. 어 그러니까 너는 어,

뭐 그런 거 있잖아. 딱히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

.

.


너는 말투가... 좀 재수 없어. 너도 알지?


춘분이라는 데 눈과 비가 동시에 내리고 있었어. TV와 인터넷 뉴스 곳곳에서 이런 날씨는 기괴하다고 춘분에 눈이 온다, 비가 온다 말들이 많았지. 춘분에 눈 좀 오면 어때서. 눈이랑 비가 같이 좀 내리면 어때서. 춘분이라는 절기를 정한 사람이 정말 먼 미래에 춘분에는 봄기운이 완연해질 거라고 말한 적도 없는 데, 요란 떠는 게 쫌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렇게 평범한 일상의 에피소드도 이해가 되지 않던 날, 나는 너에게서 더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들었어.


지난밤 감정의 격분을 나름 화해하고 싶었던 나는, 잠깐 이야기 하자는 너의 연락에 반차를 내고 나갔더랬지.

우리가 매일 가던 학교 앞 카페는 오랜만이었고, 나는 늘 그랬듯 밖에서 널 기다렸고, 너는 오늘따라 다른 날 보다 잘 차려입고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더라. 또 바보같이 멀리서 오는 너를 보니 어제 전화로 싸운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지. 그때 주머니에서 손도 빼지 않고 못 본 척 종종걸음으로 오는 널 봤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 데.


눈과 비가 동시에 내렸지만 너는 우산을 쓰지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뛰어왔잖아. 나는 얼굴에 쏟아지는 비와 눈을 피하려 카페 입구에 몸을 숨기고 네가 오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봐야 했지. 그러다 며칠 전부터 네가 보고 싶다던  영화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혼자 생각하며 핸드폰을 다시 꺼내 영화 시간을 확인하기도 했어. 아직 좌석은 여유가 있었고 이따가 적당히 시간 봐서 미리 예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집으로 돌아오니 신발 안에 양말이 다 젖어 있었어. 제기랄. 신발을 신었는 데 왜 발가락 부분이 이렇게 젖는 걸까? 안전하게 안에 있는 듯한 데 사실은 어딘가 틈이 생겨있었던 걸까.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양말부터 벗었어. 질척한 양말은 정말 최악이야. 게다가 빨래통에는 며칠 전 다녀간 너의 후줄근한 팬티와 때 낀 양말이 들어있었지.


아이씨. 짜증나.


나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너의 양말과 팬티를 꺼내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어버렸어. 그리고 마치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다급하게 주위를 돌아보며 네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찾아냈지. 모가 헤진 칫솔, 손잡이에 곰팡이가 더덕더덕 붙은 1회용 면도기, 너의 이름이 새겨진 커플 머그컵, 옷장 여기저기 숨어 있던 반팔티,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 보풀이 잔뜩 일어난 회색 목도리까지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어. 너는 몸만 쏙 빠져나가면 다다 이거지? 헤어지는 마당에도 치우는 건 내 몫으로 남았네.


아니야.


진동조차 없던 방안에 내 목소리만 낯설게 울려 퍼졌어. 나는 아까 너에 면전에서 못 한 말들이 자꾸만 생각났어. 침대에 걸터앉아 아까 뱉지 못 한 말들을 머릿속으로 계속 되감기 했지.


너를 만나는 동안 진짜 재미없었다고, 내가 만난 남자 중에 제일 재미없는 사람이었다고, 매번 PC방에만 틀여 박혀서 언제 데이트다운 데이트라도 해봤냐고. 진짜 너 별로라고.



그런 말을 해줬어야 했어.

정말 그래야 했었어.


나는 갑자기 너무 분해서 침대를 손으로 쾅쾅 내리쳤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언제. 내 말투가 어때서.


너 늘 그래. 지금도 봐.


지금이야 화가 났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도대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생사람 잡고 그래? 정확하게 말해봐.


됐다.


오빠는 늘 그런 식이지.


뭐가.


나도 됐어. 나도 말하기 싫거든.


또 시작이네. 휴. 어찌 됐든 이제 그만하자.


...


우산 있어?


...


없으면 이거 써.


필요 없어.


끝까지 진짜 너 답다.


...


나 간다.


...



화가 나는 것도 잠시, 누군가 내게 매달려 온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지.


물 먹은 솜처럼 거추장스러운 옷을 몽땅 벗고 곧장 이불속으로 들어갔어. 이불속 전기장판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도 이렇게 천천히 식어야 하는 거 아니야? 딱히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하루 건만, 세상의 모든 것이 뒤틀린 것만 같았지. 겨우 5분. 세상의 중심이 뒤틀리는 시간은 5분이면 충분해.

이별하는 시간은 얼마가 적당할까.


이렇게 짧고 허무하고 유치해도 되는 걸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생각보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한 건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뭘 했던 거지? 너도 그랬을까? 너도 그저 그렇게 날 생각하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걸까?


며칠 째 전화 통화도 뜸했고 최근 들어 만나는 횟수도 줄었지. 과제와 취업 준비로 바쁘다고 말하는 너를 위해 많은 시간을 양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멍청하게도 그것이 우리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했다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미래는 이별뿐인데.


그래. 헤어질 때가 되었으니 헤어진 거지.

남녀가 만나다 헤어지는 게 엄청 큰 일도 아니잖아?

그냥 좋아하다 익숙해지고 지겨워지고 결국 서로 연락이 뜸해진 거지. 당연한 순서 아니야?


진짜 옛날 같으면 시험 기간에도 잠깐 얼굴 보려고 집 앞에 서 있던 사람인데. 연애 초반에는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괜히 PC방에서 야간 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같이 있고 싶어 안달이었잖아.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에서 기다린 건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생각해보니 처음 만날 때보다 함께 한 시간이 정말 많이 줄었건만, 나는 너의 행동을 받아들이 나름 애쓰고 있었네. 그래야만 변한 건 네가 아니라 시간일 뿐이라는 소리로 가짜 행복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 헤어져야 내가 약간은 덜 비참할 테니까. 유치하네.



 핸드폰을 더듬어 최근 통화 목록을 열어 보니 최근 통화 목록에는 엄마와 할머니, 미란이와 과 선배 그리고 스팸과 업체 직원들 등 잡다한 전화번호만 있더라.  한참을 밑으로 내린 후에야 너와 통화한 기록이 나왔어. 너보다 3년 먼저 취업한 나는, 졸업도 미루고 취업 준비로 바빠진 너와 카톡으로 더 대화를 자주 했었지. 너는 바쁘니까. 그렇게 요 몇 달은 퇴근하면 PC방에 자소서를 쓰고 있는 너를 찾아가거나, 면접이 끝나고 밤늦게 우리 집에 야식을 시켜 먹거나 하는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어.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너의 취업이 되어버린 듯했지.

생각해보니 나도 내 인생 목표가 있었는 데, 뭐더라?



둘 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자기 입에 들어갈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했던 우리는, 언제나 가난했지. 대학 시절부터 매번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싼 곳에서 먹으려고 했던 거 같아. 넌 내가 컵라면 제일 좋아한다고 내 친구한테 그랬다며? 어이가 없다. 가난을 무기 삼아 서로를 위로하는 일이 이제 진저리 난다.


우리의 연애는 내가 취업을 해도 우리의 생활수준은 나아질 게 없었지.

170만 원의 월급으로 월세와 학자금 대출, 보험, 공과금과 교통비 등 각종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빠듯했어. 빚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언제나 시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라 나도 힘들었지.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가끔 집에 손을 벌려야 했어. 물론 다달이 갚기는 했지만.


게다가 네가 서른을 앞둔 1년 전부터인가.

너는 점점 급해져 보였고 늘 초조한 표정으로 취업 준비에 올인하고 있었어. 대기업마다 요구하는 기본 스펙이 다 달라서 대외 활동, 자원봉사, 인턴 경험 등 없는 경력들을 한 줄 쌓기 위해 동분서주했지. 면접 스터디에 취업 교육에 선배 멘토 만나기 등 정말 그 정도로 어릴 때 공부했다면 넌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나보다 일찍 일어나고 나보다 늦게 잠드는 널 볼 때마다 나는 네가 분명 굉장한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던 거 같아.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 너는 나보다 훨씬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이런 날들은 그냥 웃으면서 술안주로 삼을 거라고. 그러다 이런 기대도 다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이 덮쳐오곤 했지.


나는 그 불안을 참지 못 하고 작은 일이라도 하면서 경력부터 쌓으면 안 될까 하고 물었지만, 너는 언제나 꿈이 원대했지. 그리고 나는 너의 꿈의 크기를 믿었어. 나 같은 사람하고는 다른 것 같았거든.



내 첫 월급날 기억나?


오빠도 첫 월급 타면 나 엄청 맛있는 거 사줘야 해~


...


왜 싫어? 치사하게.


오빠는 이딴 족발 같은 거 안 사지. 오빠는 너 집 사줄게.


그래~좋아 좋아. 근데 나는 족발이 좋은 데. 맨날 먹을 정도로 돈 많이 벌면 좋겠다.


오유, 그랬어요? 많이 먹어엉~



그렇게 3년이 흘렀지.


이번에는 진짜 다 됐다고 자신하던 3차 면접에서 혼자 미끄러진 날이면, 밤 새 몰래 뒤돌아 흐느끼는 너였어. 그때마다 나는 흔들리는 니 등을 쓸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그러니까 이제 와서 보니 뭐랄까.

딱히 알콩달콩한 연애라기보다는 취업을 기다리는 엄마와 아들 같은 어설픈 만남이 계속 유지되어왔던 거야.


그냥 아무 데나 취업하면 안 돼?


PC방에서 서류를 쓰다 내 목소리에 뒤돌아 본 너의 표정은 정말 날 벌레 보듯 했지.


뭐라고?


아니, 너무 대기업만 서류 넣는 거 아니냐고. 자주 사람 뽑는 것도 아니고.


너는 대꾸도 없이 의자를 홱 돌려 다시 모니터만 쳐다봤지. 나는 뭔가 잘 못 한 것 같다 싶어 뻘쭘하게 뒤에 서 있다가 너의 눈치만 보고 있었어.


배 안고파?


어. 나 지금 이거 써야 해.


나 배고픈 데 같이 저녁 먹고 하면 안 돼? 시원한 치맥 어때?


내가 지금 한가롭게 밥이 넘어가겠니. 너 배고프면 먼저 먹어.


너의 격양된 목소리에 기가 눌려 나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먼저 나간다 이야기했지. 나도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왠지 서로 감정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지. 그때 너가 마지못해 뒤 돌아보며 어, 들어가 있어.라고 하는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는 데.


나는 그 날 회사에서 진상 고객한테 몇 시간 시달리다 마음에도 없는 죄송합니다만 백 번쯤 하고 나온 날이었지. 그리고 다시 상사에게 불려 가 이런 식으로 하면 같이 일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이었어.


도대체 날 위로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거야?

왜 다들 자기가 당한 어려움과 불편함만 나한테 호소하는 거야?

지들은 내 생각 눈곱만큼도 안 하면서 말이지.

내가 외로운지, 괴로운지, 힘든지, 아픈지 궁금하기나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왔던 거 같다. 평소에 길에서 걸으면서 우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연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는 데, 아마 다들 나만큼 꽤 서러운 날이었나 보네. 그렇게 나는 씻지도 못 하고 그냥 잠들어 버렸고, 너는 심사가 뒤틀렸는지 정말 바빴는지 아무 연락도 없었지.



그렇고 그런 날들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지.




너도 외로웠을 거야.

그랬겠지.

나도 외로웠거든.

그랬었지.


우리는 서로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공간에 스스로를 보호할 덫을 놓았다가 함정을 팠다가 쫓아냈다가 그렇게 위험지대를 만들어 놨지.


누구든 밟기만 하면 터져버리는.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가 스스로가 비참해졌다가

하루는 가해자가 되었다가 피해자가 되었다가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지.


다만, 괜찮은 척했고, 달라진 척했고,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 동안

나무들이 몇 번의 옷을 갈아입었고

주름 낀 시간만 서로를 외롭게 할  뿐이었어.


무엇으로도 환경을 바꿀 수 없었으니 스스로가 달라지는 걸 선택한 걸까.

나는 여전히 170만 원을 받았고, 너는 여전히 취업 준비생이었지. 나는 시간이 지나면 너도 언젠가 어디든 그게 어디라도 일자리를 구할 것이고, 나의 빚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전혀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


너는 내게서 조금씩 용돈을 타가기 시작했고, 내가 돈을 주던 안 주던 너의 표정은 어딘가 괴로워 보였어. 나는 최대한 너가 민망하지 않게 돈을 주려고 했지만 그것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어. 돈이라는 게 원래 그러니까. 그래도 조금만 서로 사랑하며 버티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너는 나에게 위로를 받는 사람, 나는 너를 위로하는 사람으로만 구분되어져 버렸지.


나는 취업했고, 몇 푼이라도 돈을 벌고 있으니까.


너가 꼭 갖고 싶은 직장인이라는 목표를 이룬 사람이니까.

그래서 내게 위로나 힘들어하는 감정 따위는 니 눈에 사치로 보였겠지.

내가 상사 욕이라도 하려 그려면 너는 꼭 마지막에,


나는 그런 상사한테 욕이라도 먹어봤으면 좋겠다.


라는 말로 내 고민 따위는 가볍고 우스운 농담이 되어버렸지. 넌 절대 내 마음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 왜냐면 너는 너만 생각하기도 바빴을 테니까. 나도 너만 생각하느라 바빠서 그동안 내 마음 살피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서 이제와 생각하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 거 같아서 조금은 씁쓸하네.


너는 여전히 니 앞가림 생각하느라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겠지만.


만난 시간이 아무리 길고 소중했어도, 그 사이에 얼마만큼 서로 뜨겁게 사랑했어도, 마지막에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남보다 못 한 시간이었어. 너도 인정하지?


이제라도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걸 다행이라 생각해. 물론 많이 허전하고 슬프고 어딘가 외롭겠지만, 그렇다고 너와 함께라는 이유 만으로 더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네.


진짜 다행이다.

이제라도 너도 나도 '각자'라는 삶을 선택하게 된 거 말이야.

아마 네가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널 기대하면서 상처받는 길을 선택했을 거야.

왜냐면, 나도 몰라. 아마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나 보지.


춘분에 눈 하고 비가 같이 오는 것처럼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그런 감정이었지. 그게 동시에 존재하는 건 좀 이상하긴 해. 그렇게 어영부영 있다 보면 어느 한쪽이 더 힘이 세지는 거겠지.



아, 그리고,

뭐? 내 말투가 재수 없다고?

.

.

.

.


너는 그냥 하는 짓 전부가 재수 없었어, 새끼야.

 


@클레멘타인 1분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