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굉장합니다.
꼭 영화를 다 보시고 읽으세요.
감상평도 아니고 그냥 줄거리.
마을 초입에 안 읽으래야 안 읽을 수 없는 3개의 광고판이 뻘겋게 서 있다.
'죽어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여전히 체포하지 못했다'
'서장이 책임져야 한다'
딸을 처참하게 잃은 엄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잔혹한 범행 후에 범인은 오리무중이고, 시간만 흘러간다.
그녀는 갑자기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털어 마을 초입에 커다란 3개의 광고판 '쓰리 빌보드'를 세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역 방송에 내보내고 경찰들의 무능함을 고발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영화 내용에는 경찰들이 실제로 어떤 수사를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경찰 개개인의 성향이 폭력적이거나, 게으르고, 인종 차별적인 이들이라는 것을 대사에서 넌지시 알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특히 경찰 입장에서는 덕망 높은 서장을 공격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을의 서장은 인덕뿐 아니라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 특히 곧 죽음을 앞둔 사람을 몰아세우는 건 왠지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긴다.
그녀의 딸이 살해와 강간을 당한 건 엄연히 따져서 범인이 한 짓이지 경찰 서장이 한 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하고 모두 그녀가 그만 두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단호하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무능한 경찰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누군가 눈 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경각심 없이 지나간다고 꼬집는다.
그러니까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이지, 서장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간이라도 부하들이 개판으로 하는 것을 눈감아 주는 것은 법적으로 유죄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경찰 그리고 심지어 가족들과도 데면데면 해져버린 혼자만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그녀를 응원하지 않는다.
진실을 보는 건 너무 불편하고 가슴 아프니까.
차라리 잊는 게 더 쉬우니까.
이 정도로 이야기가 서로 실랑이로 끝났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시한부 인생을 앞둔 서장은 돌연 자살을 택하고 만다.
분명 자신의 남은 인생에 대한 괴로움과 어쩌면 약간의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용기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대신 남은 사람들을 위해 적당한 방법들을 편지로 남겨둔다.
아마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허물어 뜨리려는 여자에게 강제 퇴출당하거나, 천천히 죽어가며 사과를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 편으로 생각하니 약간 똑똑한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괘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 모든 걸 놓아버리다니.
결국 이 일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는 데,
그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의 상실감과 분노는 메마른 날씨에 산불같이 번지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공격하고,
경찰은 광고를 내준 광고쟁이를 마구잡이로 폭행하며 분풀이를 한다.
광고판은 활활 불타고 경찰서도 활활 불탄다.
누가누가 더 분노조절장애인지 내기라도 하듯이.
그야말로 지옥행 열차에 탑승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제야 이 영화의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분노한 사람들에게는
분풀이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노는 분노를 불러올 뿐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에 대한 더 큰 책임이 돌아올 뿐이다.
영화를 보고 생각한 건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
이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영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다고 분노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엄마는 여전히 딸을 그렇게 잃어버린 채로 있었을 테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경찰들은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았겠지. 분노는 과연 분노만 낳을까.
분노한 사람들은 기존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얼마큼 서로가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보는 내내 같이 흥분했고, 응원했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흥미진진했고,
여주인공의 진심 섞인 연기가 돋보였던 영화 쓰리 빌보드, 세 개의 광고판,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