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Jun 20. 2018

(1분 소설) 가위

#클레멘타인 1분소설

아마 그때쯤이었죠?

제가 당신에게 진짜냐고 물었고

한참을 지나 돌아온 대답이


'어. 진짜 끝'


이 네 글자였던 날이.


그날 저는 오랫동안 방기해둔 가게를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약간 들떠있는 상태였고, 동시에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어 당신에게 몇 번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분명 좋은 일이 생기고 있으니 이런저런 불안감은 키우지 않으려고 바쁜 척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꽤노력했던 거 같아요.


우습게도 결국 네 글자였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이별의 정답을 대조해보다 답을 찾지 못 한 날이면,

내가 모른 거다. 내가 눈치가 없었다.

자꾸만 이런 자책에 시달렸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분명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결론도 무딘 저의 짐작일 뿐이지만요.

그냥, 우리 사이에 무슨 이유를 찾아내지 않으면 영원히 미해결 사건처럼 제 맘 구석에 쌓여 있을 것만 같아서요.


그러니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작은 10평 가게가 내 삶의 전부였던 날이었습니다.

그곳은 화장실도 없어 겨울이면 얼어붙는 야외 화장실을 써야 했지요.

그래서일까요. 바깥의 봄이 유리 넘어 반짝이면 가게 안은 왜 그리 어둡고 추웠던지요.


저는 나갈 일이 없어 가게에 오는 손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죠.

그렇다고 그들과 어떤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어요. 그저 손님과 주인의 사이였죠.


그런데 웬일일까요.

당신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첫날부터 저는 당신에게 빠져들었습니다.

희미하지만 당신에게서 스치는 바람 냄새가 좋았어요.


그렇게 불행의 시작은 행복의 얼굴을 하고 오나 봐요.

그 무렵 저는 가게일 보다 당신과 보내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었어요. 종종 가게 문을 닫고 당신과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당신이 퇴근하면 산책하러 나가는 등 동네 데이트를 즐겼어요. 단골손님들이 어제는 왜 문을 안 열었냐고, 올 때마다 문이 닫힌 이유는 뭐냐고 물어왔지요.


저는 도저히 당신이 더 소중하다고 답할 수 없어 몸이 아팠다고 했어요.


그러면 손님들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괜찮냐고, 지금은 다 괜찮은 거냐고 되묻곤 했죠.

때로 그런 사람들의 호의적인 관심조차 버거웠어요.

저는 점점 도피하는 마음으로 당신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행복을 알게 된 사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척척 앞으로 나가는 일밖에 몰랐지요.


...... 어쩌면 당신을 사랑한 건지 아니면 제 10평짜리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아직도 헷갈리지만요.


핑크는 결국 회색이 되고 뭐든 다 그렇게 흐릿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소중했었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꽤 오랫동안 당신을 생각하면 한쪽 가슴이 아파 오른손을 말아 쥐고 탕탕 치는 일이 많았거든요.

당신이라는 빛을 잃은 후로 많은 것이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진짜 힘든 사람은 누구에게도 어떤 고민을 털어놓지 못해 자신을 고립시키거든요.

말할 수 있는 제가 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녁놀이 질 때면 밑도 끝도 없이 '인연'이라는 시간의 장난을 종종 생각합니다.

그 순간 그 장소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기적 같은 인연에 대해서, 그 기적과 같은 행운은 불행과 같이 오기도 한다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반복되는 커다란 시계 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저는, 10평의 감옥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저를 보며, 스스로 인생을 좀 먹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사람들은 사장이 되었네 뭐네 해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한 번 얻고 나면 누군가의 직원이 되는 일은 어려워진다는 잔인한 사실을 깨달아 더 괴로웠습니다.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려고 많은 시도를 한 것 같아요. 그때 당신은 일종의 탈출구였고 저는 거기서 안락을 느꼈죠.


당신 기억나요?

가게가 팔리기 한 달 전쯤부터 저는 어떤 점쟁이의 말을 믿고 가게 입구에 가위를 걸어뒀었죠.

그렇게 하면 가게가 빨리 팔린다고 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할 거예요. 제게는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날들이 있었어요.


한 번은 당신이 고기만두 12개와 순대 한 줄을 사와 내게 내밀었어요. 냄새가 굉장히 많이 나는 음식이지만, 또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지만 크게 상관없었어요. 그땐 그랬어요.

그리고 문 앞에 덩그러니 걸린 가위를 보며 '가위는 자르는 용도야.'라며 불콰한 표정을 보였죠. 어딘가 미신을 믿는 여자는 불편하다는 말도 작게 했던 거 같아요. 저는 황급히 일어나 '아, 누가 그러길래, 그냥 해 본 거야.'라고 하며 걸어둔 가위를 냉큼 집어 서랍에 던지듯 넣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당신이 돌아간 후로 서랍에서 다시 가위를 꺼내 걸어두었지만요.


역사는 과정이 아니라는 말처럼,

제 멋대로 해석되고 듬성듬성한 기억을 짜기워 사라진 우리 사이를 복원하곤 했어요. 그건 진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더는 비교해 볼 상대가 없어 그대로 방치되어 늘 생중계되었습니다.


당신과 나의 역사는 어딘가 아련한 구석이 있었지만,

왜일까요.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유배당한 사람처럼 모든 장면마다 나만 홀로 서 있었지요.


때때로 그런 외로움이 너무 싫어 생의 기억에서 당신만 조곤조곤 오려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떠나고 없는 당신을 떠나보내려 발버둥 쳤습니다.

당신의 이름 앞에 아무리 가위를 걸어둬도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은 형체도 없이 존재했었습니다.


세상에는 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현실적인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때 또는 존재하지 않는 힘을 빌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어쩌면 당신 말처럼 가위는 그런 용도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가위 본래의 힘으로 생각이나 기억도 모두 싹둑싹둑 도려낼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다 괜찮습니다.

가게는 팔렸고 저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분명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고 좋은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종종 수취인 불명이 되어 되돌아오는 편지처럼 그날로 돌아갑니다. 가끔은 이 모든 일이 악몽이라 어서 깨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압니다. 어김없지요.

비밀은 밝혀지고 약속은 깨어집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 생에서 죽고 죽음 이후에도 세상의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들만 삶의 리스트로 남아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테지요.


알면서도 모르는 일들에 지칩니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물어물 밤이 오고, 저는 다시 혼곤해집니다.



@클레멘타인





 

매거진의 이전글 (1분소설) 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