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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9. 2019

(1분소설) 일기 1

겨우 이런 얘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닌 데 미안해요.


얼굴에 비해 유난히 고운 손을 가진 그는 커피 얼룩이 진 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내 앞에 놓인 낡고 더러운 노트만 휙휙 펼쳐보았다.

                  



노트 한 페이지 크게 ‘나’와 ‘는’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었다. 뒷장에 이어질까 싶어 끝까지 넘겨봤지만 뒷장 부터는 여전히 욕설과 분노 외로운 글투성이였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무리되지 못 한 노트의 주어처럼 그의 이야기는 생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지려 다.




어젯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이런저런 구실을 삼아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색과 간을 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누가 무엇을 해도 흔들리는 내 인생을 붙잡아 줄 세상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치를 혐오하고 있었다. 깊은 혐오는 결국 무관심을 불러오기 마련, 얄팍한 내 인생에 누가 끼어들어도 언젠가 퇴장할 인물들이므로 중요한 건 그저 <술과 사람>이라는 대명사면 족했다.



형,형! 그치? 내 말이 맞지? 저번에 내가 그랬잖아. 그 정훈이 그 개새끼가 우리 뒤통수 칠 거라고. 와. 내가 그 간신배 새끼 초장에 싹수를 밟았어야 했는데, 아, 이게 다 형 때문이잖아. 아 진짜- 형은 아무나 다 받아줘서 문제라니까.



B가 소주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자 마주 앉아 있던 K가 다시 소릴 높인다.



어허. 이 새끼 말뽄새 좀 보소? 이게 왜 얘 때문이야? 그리고 어디서 형한테 큰 소리야? 와- 용용이 마아이 컸다,어? 곧 형뉘임~ 형뉘임~ 하면서 한 대 치겠어. 안 그냐, 섭아.



K는 B의 머리를 힘 있게 투욱투욱 쓰다듬는다. 얼굴색이 흡사 끓는 팥죽처럼 변한 B는 왼손을 들어 K의 손을 후려친다.



아, 하지 마요. 진짜.



어쭈? 이제 개기냐 어? 개겨? 와- 친구야, 쟤 눈깔 좀 봐. 확 그냥. 어째 동생이란 놈들이 죄 이런 놈들뿐이니. 말로만 다 형님이지. 이러니까 어? 우리나라가 어? 씨바 어? 잘 될 턱이 있냐고. 죄 이런 놈들이 어? 잘났다고 설치는데. 지가 어떤 위치인지 모르고. 목소리만 크면 장땡인 세상이여. 어? 밑에서 다 우릴 알로 보는 데, 형님은 무슨 형님. 니기미 씨빠빠다.



...진짜...거, 형님- 말 좀 예쁘게 합시다. 저도 엄연히 애 둘 딸린 아빠예요.



뭐? 참나.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야, 아빠가 됐으면 임마, 하. 야, 됐고. 너 일단 밖으로 나와봐. 잠깐 얘기 좀 하자.



우당탕-


의자가 벌렁 나가자빠지도록 K가 유난을 떨면서 나간다. 그래.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지. 주변에 있던 애들이 ‘야야, 니가 참어라. 저 형 원래 그렇잖아.’ 하면서 말려보지만, 결투에 응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는 꼴이 된다고 느끼는 B는 좀 더 크게 의자를 우당탕탕탕 뒤로 밀치며 밖으로 나간다.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싸우는 두 사람. 조금 있으면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둘을 볼 테고, 주인이 경찰을 부르고, 둘은 식식거리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하다. 서로 할 말이라곤 ‘법대로 해!’를 반복하다 서까지 간 후 두 시간쯤 욕설과 유치한 말꼬리 잡기로 서로 악을 쓰다가, 실제로는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멱살잡이로 힘 좀 쓰다가, 슬슬 잠도 쏟아지고 할 말도 떨어질 때쯤 B의 와이프가 등장해 런닝 차림인 B의 등을 몇 차례 때리면, 그때서야 못 이기는 척 서로 합의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간 후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을 거다.



시간이 좀 무르익으면 술자리에 둘을 불러내야 하는데, 물론 싸움을 말리지 않은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다. 나 아니면 어차피 불러주는 이도 없는 두 사람은 괜히 못 이기는 척 나와서 술을 다시 진탕 마시며 그날의 일을 곱씹으며 웃는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반복 재생.



놔! 놓으라고!



잠시 후, 내 짐작대로 바깥에서는 욕설이 난무하고 언뜻언뜻 웃통을 올린 채 배를 까고 있는 K가 보인다. 오늘은 어째 런닝을 챙겨 입은 건 모쏠인 K인가. 가게 손님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에 고개를 빼들어 밖을 휘적휘적 돌아본다. 사장님은 ‘아, 저 인간들 또 시작이야, 삼초온, 삼촌들~’ 하고 달려 나가며 동네 파출소로 전화를 건다. 밖으로 나서는 사장님을 따라 나도 일어설 때쯤, 그러니까 딱 때맞춰, 그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그건 정말 예상 밖의 시나리오였다.





다음 날, ‘꼭 할 말이 있다’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카페 입구로 들어섰다. 퀘퀘한 지하의 곰팡내가 풍기는 다방 스타일의 카페는 그동안 운영하면서 이것저것 사들였는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분위기로 어수선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입구에 들어서 전화를 걸어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하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다소 음침해 보이는 등에 대고 인사를 하자, 그가 돌아보며 일어서 손을 내민다. 얼떨결에 아, 예예 악수를 하며 마주 앉았다. 이 모든 상황과 맞지 않게 그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에 내심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잘 지내셨어요?



아, 예. 뭐... 저 커피라도 드셔야죠.



제가 시키고 올게요.



아니요. 아니요. 여기 제 단골 가게예요. 잠시만요. 누나~ 여기 주문 좀, 뭐 드실래요. 커피?



아, 예.



사장님! 사장님!



네네네네네. 아유, 뭘 엄마 젖 찾는 애 마냥 그렇게 애타게 불러. 뭐 줄까. 응?



누나, 우리 커피 한 잔 더 줘.



시원한 거, 따뜻한 거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늙수그레한 사장을 향해 웃으며,



따뜻한 거 주세요.



오케이. 금방 갔다 즐게.



마주 앉은 우리 사이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 역시 날 잘 모를 것이다. 잘 모르는 두 사람이 인테리어도 분위기도 감정도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흡사 어색함 대회라도 열린 것 같았다.



그는 애꿎은 탁자만 한 참 노려보다 이윽고 의자 아래 있는 종이 가방을 꺼내든다. 테이블 위로 하나씩 나오는 낡은 수첩 4권. 얼마나 시간이 지난 노트인지 모르겠지만, 죄 물에 젖어 있었고, 군데군데 라면 국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양념장이 베어져 있었다. 맥주에 찌든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게 다 뭔가요?



저... 다른 게 아니라 실은 이것 때문에 뵙자고 한 겁니다.



그는 내 앞으로 4권의 노트를 밀었다. 여기저기 곰팡이도 슬어 있어 나는 만질까 말까 고민하다가 손가락 끝으로 살짝 잡아 노트를 넘겼다.



이게 뭔데요?



어떤 장들은 앞뒤가 붙어 있어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듬성듬성 노트를 넘겼다. 2014년 7월 1일 괴롭다. 사는 일은 죽는 일보다 더 괴롭다. 라고 쓰인 문구를 본다.



이거... 혹시 일기장인가요?



네, 아, 저, 그러니까...



자, 사장님들~ 따뜻한 커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사비스-



김이 나는 커피와 함께 사과 5조각이 앙증맞게 썰려 나왔다. 나는 아직 이게 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일단 커피를 마시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렸다.



그러니까... 저희 형 일기장이에요.



아...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다른 게 아니라 그날 언뜻 글 쓰신다는 이야길 하셨던 거 같아서 ...그때 제 기억이 맞다면...아직 글 쓰시나요?



예? 아...뭐 그냥 취미 생활이죠. 하하.



아...그래서 저.... 이야기를 완성해 주십사하고...갑자기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네? 이야기요?



네... 이 일기장을 읽어보시고 이야기를 만들어주십사...그런데 제가 가진 게 없어서...뭘 드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그때 그래도 좋은 분 같아서...너무 황당하시죠?



네? 아, 아니요. 뭐... 그냥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일기장 내용을 완성하고 싶다는 건가요? 그런데 이건 형님 일기장이라면서요. 그래도 되는 거에요?



...네...그래도 되요.



그래도 본인한테 의사를 물어봐야...형님 자서전이라도 쓰시는 건가요? 아, 이번에 뭐 출마라도 하시는 건가?



...아니요...



그는 사과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나는 괜히 나왔다 싶어  커피만 마셔댔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이리저리해보지만 딱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많은지, 하나하나 다 상대하는 일도 이제 버겁다.



그럼 그냥 개인적으로 책 내려고 하는 건가요? 이 정도 분량이면 본인이 정리해도 될 텐데요. 그리고 제가 남의 사생활을 어떻게 마무리하겠습니까...자신의 이야기는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테니...직접...



죽었어요.



예?



죽었다고요. 우리 형은. 산에서. 혼자.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술이 원수지. 술김에 세상 모든 일에 관심 있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도 병이라면 병일터. 낯선 번호에 만나자는 약속이 뭐 좋다고 오케이 오케이 했던가. 지난 기억에 매달릴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그러셨군요...어쩌다...




그러게요.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인데.



그는 낮게 읊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몸도 마음도 불편했다. 죽은 사람 앞에서 귀찮은 일을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태였다. 게다가 돈도 안 되는 일거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자주 만나던 지인도 아닐뿐더러 술 집 앞에 쓰러져 있는 걸 깨워 택시 한 번 태워 보낸 게 다였던 인연이다. 젠장. 그때 내가 왜 명함을 줬던가. 이게 다 망할 놈의 술 때문이다. 숙취 때문인지 나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가 이놈의 세상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내려야지. 이 시대의 복은 돈 아닌가. 망할 놈의 세상. 돈도 안 되고 기분도 께름칙해지는 일이나 생기는 게 내 평생의 팔자라니. 왜 이런 귀찮은 일에 자꾸 휘말리게 되는 걸까. 남에게 모질지 못 한 죄가 가장 큰 죄가 되는 이 엿 같은 세상. 삶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니까.’



나는 진짜 술을 끊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백번 생각한다.



...작가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벌써 나를 작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아니요. 죄송합니다. 상황은 잘 알겠지만, 저도 근근하게 살아있는 몸이라서요.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가 글솜씨가 워낙 형편없어서 고인에게 해가 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어떤 순서로 나열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재빨리 회전시키고 있었다.



겨우 이런 얘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닌 데 미안해요.



얼굴에 비해 유난히 고운 손을 가진 그는 커피 얼룩이 진 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내 앞에 놓인 낡고 더러운 노트만 휙휙 펼쳐보았다. 내가 왜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 때문에 이렇게 쩔쩔 매야 하지? 어색함이 도를 넘으니 점점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엿보던 찰나, 한 문구가 나를 사로잡는다.





무심코 펼친 낡은 노트 양면의 한 페이지마다 나’와 ‘는’ 이라는 글자가 크고 진하게 써 있다. 뒷장에 이어질까 싶어 끝까지 넘겨봤지만, 뒷장부터는 다시 휘갈겨 쓴 욕설과 분노, 외로움이 담긴 글투성이였다.


일기장만 봐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이 갔다. 누구도 관심 없는 소외된 삶, 그런 삶에서 점점 도태되는 인간의 단순하고 뻔한 막장 스토리. 자신의 위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조연급으로 낮추고 낮추다 결국엔 하나의 배경이 되고 마니까.


나는

그렇게 자신을 크게 쓴 날은 그에게 어떤 하루였을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무리되지 못 한 노트의 주어처럼 그의 이야기는 생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지려 한다.


나는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그에게 뱉고 말았다.



...형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뿔싸. 어젯밤 술이 덜 깬 게 틀림없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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