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소설) 자리 뺏기 1

by 클레멘타인

1.

불행과 불운 중에 넌 뭘 선택할래?

병진의 혀는 이미 꼬여있었다.

만난 지 겨우 2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조까튼 선택지는 왜 내미냐. 어어. 야, 너 머리, 머리!

병진의 머리카락이 식어 빠진 500cc 맥주잔에 아슬아슬하게 담겼다가 나왔다. 맞은편에 앉은 택은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병진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좆! 좆! 좆!

병진이 고개를 쳐들고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당황한 택이 야야 너 취했어? 너 왜 그래,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진은 불콰한 얼굴로 크크큭 하고 혼자 웃었다.

안 되겠다. 그만 마셔 너. 집에 가자.

택이 반쯤 남은 병진의 술잔을 자신의 앞으로 치우며 일어났다. 맞은편으로 건너가 이리저리 휘청이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병진을 잡아 세워 일으켰다. 맥없이 비틀거리는 병진의 몸은 가늘고 가벼웠다.

계산하고 나니 택의 통장에는 10만 원도 채 안 되는 잔액이 확인됐다. 코인으로 3억의 빚이 생긴 택은 마음이 급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다 고등학교 친구의 입에서, 병진이는 잘 있냐?라는 물음에 잊고 있던 이름을 기억해 낸 것이다. 병진이 걔가 너 좋아하지 않았던가 하며 그 시절을 추억했지만, 정작 연락 없이 지낸 지 10년이 지나있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시드 머니나 조금 꿔 볼 요량으로 겸사겸사 연락을 해서 만난 게 오늘이었다.

10년 만에 만난 병진은 어딘가 많이 변해 있었다. 뭐랄까. 외모나 체형적인 변화라기보다는 풍기는 뉘앙스가 달라졌다랄까.

택이 기억하는 병진은 흰 도화지에 실금 같은 선 몇 개를 그어 놓은 듯한 아이였다. 같은 반 교실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못해 수업에 빠져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반면 택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고, 갑자기 화를 내 반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 발광하는 건 택 자신이고, 그를 말리는 건 병진이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고주망태가 되고 싶은 건 택이 자신이었는데. 돈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병진이 먼저 쓰러지니 당혹감과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안 그래도 없는 돈까지 쓰고 감정 쓰레기통 노릇까지 하고 있다 보니 괜히 연락했다 싶었다. 이래서 나이 들면 친구는 필요 없다고 하는 건가. 택은 소모된 마음이 더 우울해졌다. 삼재라더니. 후-. 단가 높은 주말에 배달도 쉬고 나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평일에 만날걸.

짜증이 밀려왔다. 어깨에 대신 짊어진 병진의 작은 핸드백이 택의 어깨에서 자꾸만 밑으로 미끄러졌다.

야, 정신 차려 봐. 집에 가야지. 너 집 어디야. 어?

자정이 넘은 바깥은 고요하고 머리가 띵하도록 시렸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이곳이 병진의 동네라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날씨도 날씨거니와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에 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 애를 모텔에 데려갔다간 또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밖으로 나온 택은 병진을 편의점 앞 의자에 앉혔다. 어깨에 맨 병진의 가방을 내려 속을 뒤졌다. 가방엔 화장품 몇 개와 카드지갑, 물티슈가 들어 있었다. 택은 병진의 카드를 꺼내 숙취 제거 음료와 물 하나를 사서 나왔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병진을 일으켜 두 가지를 억지로 쏟아부었다. 반은 흘리고 반은 들어가 얼굴이 엉망이었다. 택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병진의 얼굴을 잡고 닦았다. 입 주변을 닦아내자 화장 밑에 가려져 있던 맨 얼굴이 드러났다. 고작 500cc 반 잔에 입에선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술도 더럽게 못 마시네. 무작정 돈 얘기를 꺼내긴 뭐 해서 가볍게 치킨에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던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닦여진 병진의 얼굴은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검붉어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하얀 게 가면인지 붉은 게 가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모습을 보자 택은 픽- 웃음이 났다. 어린 시절 얼굴이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임병진. 너 지금 되게 못생겼어. 알아?
이씨!

병진은 택을 때리려 두 팔을 들었다 힘없이 뒤로 허우적거렸다. 어어어. 택이 그런 병진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병진이 택의 품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주변으로 퍼졌다. 병진 정수리에서 올라오는 향수 냄새가 콧속을 아찔하게 자극했다.

아휴. 기집애야. 오빠 힘들어 죽겠다. 너까지 왜 이러냐. 정신 좀 차려라, 어? 집에 좀 가자.

택이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일까. 택의 품에서 가쁜 숨을 쉬던 병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택아.
왜.
오늘... 함 하까?
뭐?

택은 그 말과 동시에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병진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으악. 왜 때려어. 왜!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아, 아파. 왜 때려. 왜 때리는 데. 싫음 말지. 흑흑.

아프다 아프다 하며 병진은 엉엉 울었다. 당황한 택이 서럽게 우는 병진을 보며 그러게 씨바 왜 개소릴 하고 그래, 존나 뜬금없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울음이 그치지 않는 병진을 보며 택은 너무 쎄게 때린 건가 하고 머쓱했지만 달래주고 싶진 않았다.

도대체 뭐가 널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저 순수한 의도로 만났다면, 그냥 옛 친구의 흑역사로 남을 일일 텐데.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돈을 잃지 않았다면, 그깟 치킨 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을 텐데. 아니, 코인 같은 걸 안 했다면, 아니,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니, 아니, 아니! 아 씨바!

택은 이 모든 것에 화가 나서 물통을 집어던졌다. 반쯤 차 있던 물이 허공에 흩뿌려지더니 텅텅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바탕 소란에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편의점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씨바! 택이 소리를 지르자 알바생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일을 했다. 편의점 문에는 경찰 안심 지킴이집이라는 노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택은 다리를 벌리고 하- 되는 일 좆도 없네 하며 의자에 기댄 채 허공으로 입김을 뿜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웅크린 채 정수리를 감싸고 밑도 끝도 없이 울어대는 병진이 귀찮아졌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가자, 어? 하며 물티슈를 뽑아 건넸다. 병진이 훌쩍이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문지르자 반 남았던 병진의 얼굴 전체가 빨갛게 드러났다. 인적 없이 어둠이 내린 밤, 병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온몸이 빨개지도록 서럽게 울고 있었다. 멀리서 경찰차가 다가오는 게 보이자 택은 병진의 가방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어주고 나 먼저 간다, 하며 일어났다.





2.


미안.

속은 괜찮냐는 물음에도 답장 없던 병진에게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답장 ㅈㄴ 빠르네.

택은 오토바이에 앉아 배달 요청이 취소된 햄버거를 먹으며 답장을 보냈다. 콜이 잡히면 바로 이동해야 해 밥은 거르기 일 수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다. 이 운이 그대로 하루 종일 갔으면. 몇 개만 더하면 미션 완성이라 바짝 긴장하고 있던 터에 받은 답장이었다.

택은 병진을 생각했다. 그날 밤, 눈앞에서 원숭이처럼 날뛰던 병진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웬만한 일에는 감정 동요가 없던 아이는 어쩌다 그런 천둥벌거숭이가 된 것인가.

택이 기억하는 병진은 자신 앞에 닥친 불행에 언제나 순응하던 아이였다. 반지하 집에서 자는 동안 쥐가 얼굴을 밟고 지나갔을 때도, 폭력적인 아빠를 피해 엄마랑 단둘이 야반도주해야 했을 때도, 돈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갔을 때도, 수업 중 택이 욕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나갈 때도, 혼자 일어나 택의 의자를 정리할 때에도,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강의를 듣는 대신 기숙사 식당 테이블을 닦을 때도, 돈 5만 원에 창문 있는 방 없는 방을 고민할 때도. 그 모든 불행한 상황에서 병진은 세상에 낙담하거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예전의 병진이라면, 큰돈은 아니더라도, 설령 돌려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자신에게 돈을 빌려줄 그런 물렁한 부류였는데.

그런데 왜?

병진에게 보낸 문자의 숫자 1은 없어지지 않았다. 띵동-. 미션을 완성할 콜을 잡고 택은 남은 햄버거를 입속에 마구 쑤셔 넣었다. 일회용 컵의 뚜껑을 열어 얼음과 콜라를 동시에 넣고 헬멧을 썼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바다당 소리를 내며 골목을 달리는 동안에도, 추위에 꽁꽁 언 몸이 풀려 녹초가 된 저녁에도, 코인으로 1억 만들기 유튜브를 보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병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택도 더 이상 궁금해하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성격이라면 돈을 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눈앞에 해결해야 할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웠다. 그렇게 인연이 끝난 거라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 끝났다면 두 사람에게 다행한 일이었을 거라 생각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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