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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Jul 10. 2018

똑 단발

#클레멘타인 솔직 에세이

2018. 07. 10


"너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려."


나와 처음으로 만났던 남학생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 나는 단발머리가 예쁜지 긴 머리가 예쁜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을 때 꽤나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하지만 옆 짱구에다 숱이 많은 내가 단발이 어울렸을까.

일명 붕 뜬 머리가 친구의 솔직한 표현에 의하면 '호박'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박과 잘 어울린다는 모두 나에게 적용되지만, 시선에 대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국민학교 6학년 초반까지인가? 나는 늘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내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겨줬는데 어떤 날은 엄마 기분에 따라 포니 테일 스타일로 꽁꽁 묶어주거나 어떤 날은 중간 가르마를 길게 타서 양 갈래로 땋아주었다.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눈이 찢어지게 꽉.


우리 집에서 엄마가 사라진 기간이 있었다.

당시 나는 머리를 묶지 않고 학교를 간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었고 결국 가족 중 누군가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5살 많은 언니가 하거나 생물학적 아빠가 했던 거 같다. 외할머니 댁에 살 때는 외할머니가 해주시기도 했다. 나는 매일 허리까지 오는 지렁지렁한 머리를 묶고 학교를 갔고 머리를 풀고 학교에 가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엄마가 부재하는 동안 가족 모두에게 머리를 묶어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다만 나의 협박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는데, 나는 학교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는 아이였다.

종종 배앓이를 했고, 어떤 날은 아침 만화를 끝까지 봐야 했다. 그래서 "엄마, 나 오늘 학교 안 갈래."라는 말만 하면 아무도 날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가자." 찾아온 친구에게 엄마는 "은희 오늘 아프다."라고 적당한 거짓말을 해주기도 했다. 물론 선생님에게도.


그런 자유방임주의 속에서 다행했던 건 나 스스로 학교 가는 일을 엄청 싫어하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학교를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그저 늦게 가거나 중도에 집에 오거나 하는 일이 가끔 있었을 뿐이다.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벗은 이후로 나는 긴 머리, 짧은 머리, 긴 머리, 짧은 머리, 파마머리, 생머리 등 적당한 사이클로 살고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내가 머리를 짧게 한다고 하면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 취급을 한다.


"안돼! 쓸데없이 왜! 이쁜 데 야가 시방 뭔 소리래. 머리 쫌 냅둬."


 그러면 나는 어딘가 시무룩해져서 그런가,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머리가 너무 귀찮아. 감당하기 힘들어."


"야가 뭘 모르는 소릴하네. 니 머리 짧으면 맨날 드라이해야 하고 니 어짤래?"


매일 손질해야 할 머리를 생각하면 단발에 대한 욕망은 곧바로 야들야들 풀려버린다. 나의 가장 취약점은 부지런함이고 그걸 아는 엄마는 꼭 마지막에 결정타를 날린다.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은 너무 싫다. 하지만 내 핸드폰 사진첩 속에는 여전히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이 이리저리 마구 뽐을 내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중순인지 말인지, 우리 반에 얼굴이 하얗던 친구 한 명이 단발머리를 하고 처음 등장했다. 우리는 곧 중학교에 올라갈 예정이었고 무엇이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여자 아이들 중 1등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차롬 하게 내려온 똑 단발이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고 나는 뒷자리에서 창가에 앉은 친구의 뒷덜미를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예쁘고 예뻐서 자꾸만 눈이 갔다. 왠지 국민학생 따위는 벌써 딱지를 뗀 중학생 언니가 교실에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의 스타일이 몽땅 마음에 들어서 슬슬 접근했다. 잠시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는 데, 친구를 따라 단발로 잘라버리고 친구가 자주 쓰던 모자도 비슷한 거로 샀다.


밤이 되어도 잠들지 않는 초여름이었을까.

그 친구가 딱 한번 저녁에 날 불러낸 적이 있는 데 고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하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친구들이 가진 고민을 듣고는 했다. 우리는 딱히 할 일 없이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친구가 결심한 듯 학교 정문 앞 낡은 공중전화에 들어가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했다.

나도 옆에서 결의를 다지듯 두 다리를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남학생의 집으로 전화해 고백했고 무언가 뜨뜨 미지근했던 대화와 표정에 내가 전화기를 뺏어 들어


'너 왜 내 친구를 좋아하지 않냐, 어서 좋아해라.'


 이런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댔다.


쓰라린 퇴짜에 퉁퉁 불은 친구를 그날 밤 11시가 될 때까지 위로해 주어야 했고, 무언가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의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있었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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