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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Jul 11. 2018

딸기우유

#클레멘타인 솔직 에세이

2018.07.11


오늘은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또 이렇게 끄적끄적거린다. 인간은 마음과 행동이 영 딴판일 때가 있다. 나는 좀 많다. 그래서 나도 날 잘 모르겠다.


책을 펼쳐도 한 글자도 넘어가지 않고, 영화 목록을 둘러봐도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의 원인에 대해 세세하게 다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 그 정도로 대범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저 끙끙 거리는 방법밖에 모른다.


혹여나 내가 털어놓는다고 해도 방법은 없다.

이야기를 털어놓음과 동시에 잠시 고통에서 해방되겠지만, 해방과 동시에 나는 다시 현실의 고통으로 앓아야 한다. 감정 호소가 해결책은 아니니까.

다만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이렇게 무엇이라도 쓰는 척을 해야만 했다.


슈퍼에 가서 서울우유 딸기와 서울우유 초콜릿도 하나씩 사 왔다.

200ml의 우유를 먹으려면 아주 얇은 우유 빨대가 필요하다. 슈퍼 아저씨는 늘 챙겨주지 않아서 내가 카운터에 꽂힌 빨대를 손을 뻗어 꺼낸다. 


이십 대 후반 회사원일 때 회사에는 동갑내기 J가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아이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으니 실명을 밝히지 않겠다. 나는 회사에서 종종 울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느닷없이 아무 데서나 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는 데 결재 서류를 쓰다가도, 대차표를 만들다가도, 업체 메일을 쓰면서도,

울었다.


J는 나와 약 20 발자국쯤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 데 우리 사이에는 책상이 꽤 있어서 일하는 동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는 내 기분을 알아내곤 했다.



"바구미야, 바구미야, 언냐가 딸기 우유 사주까?"


J는 3층이었던 사무실에서 지하 1층까지 척척 걸어 내려가 매점에서 사온 서울우유 딸기를 종종 내밀곤 했다. 얇은 빨대와 함께.


"맛있냐? 어이구 단순한 바구미 좋텐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좋은 척했고 그러다 보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일인지 한 번도 자세히 말 한 적 없고 말할 수 없었지만 J는 묻지 않았고 손에는 딸기 우유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 통틀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잠을 잤다고 할 수 있는 친구가 J 였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같이 일하고 저녁이면 우리 집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주말을 함께 보냈다.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친구 집에서는 딱히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뒹굴뒹굴 거리다가 잠시 시내에 나가서 아이쇼핑 좀 하다가 무얼 사 먹고 돌아오는 게 다였다.


J는 어딜 가든 생활력 강한 아이처럼 남은 물건을 챙겨 오곤 했는 데 그중에 몇 가지는 꼭 날 챙겨주었다. 나는 딱히 물건에 소유욕이 있다거나 집에 물건 쌓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J가 챙겨주는 물건들은 좋아했다. 


J는 내가 퇴사를 결심할 때쯤 나보다 먼저 회사를 나갔고,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했다. 그 사이 우리 둘은 꽤나 백수 생활을 즐겼는 데 백수가 즐거울 수 있는 건 그래도 같이 놀 수 있는 백수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딸기우유도 줄어들어있을 것이고 나의 고통도 잠시나마 잊힐 것이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나는 다시 헤맬 것이고 슬픔에 가득 차 있겠지. 어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잠기고 어떤 사람들은 가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다. 현실에서 구원이란 스스로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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