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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01. 2018

축구

2018.09.01

이것은 축구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으로 만난 목소리가 좋았던 사람은 축구에 환장했었다. 정말이다. 그는 어린 나를 자신이 사는 동네로 불러내어 자신이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나는 그 당시 (꽤 얼마 전까지도) 취향 같은 건 없어서 그냥 그러자는 대로 그렇게 했다.


그는 종종 빤딱이는 축구 바지를 입고 때론 위험스러워 보이는 축구화를 신고 축구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축구가 아니라 볼을 찼다. 왜냐면 그는 팀이 아니었고 겨우 불러낸 친구 한 명 정도가 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축구공을 이용한 단순 공차기와 달리기가 합친, 축구이고 싶은, 축구 비스무레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꽤나 촌스러웠다.


나는 5시간 걸려 찾아간 이름 모를 운동장 미끄럼틀 위에서 그걸 봤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는 둥 마는 둥 그냥 앉아 있었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기분 상태로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그의 얼굴에서 땀이 쏟아질 때쯤이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은 어쩐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아무리 날 해석해보려고 해도 왜 그런 상태로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 "왜 그런 상태로, 거기에, 그렇게 멍하니" 있는 일들은 나이를 먹어도 꽤 많았는데,

다음은 실제로 축구를 업으로 하는 남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왜 나를 만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만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연인이라면 으레 해야 할 것 같은


최신 영화 보기,

유명한 카페 가기,

기분 좋게 산책하기,

소문난 맛집 가기

따위의 행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훈련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의 무릎을 베고 있거나 나에게 스킨십을 요구하거나 어부바를 해주거나 하는 자기만족의 시간 보내기였다. 그럴 때면 나는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요구에 맞춰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고는 했다. 저녁이면 종종 동네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곤 했기에 나는 어쩐지 그곳에 앉아 있는 자체가 어딘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상태로 그렇게 앉아 있었는 나도 모른다.


그저 그걸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마음 가는 대로 그런 일들은 가능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무언갈하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채로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 하게 된다. 원숭이에게는 거울 뉴런이라는 게 있어서 상대를 따라 하려는 욕망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한 마리의 원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사랑받고 싶은 가련한 존재였거나.


아시안게임 한일 축구의 전반전이 끝난 지금 축구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나면 좋겠지만, 이십 대 후반에 만난 남자 역시 축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새벽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해외 축구를 볼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의 행위를 볼 때마다 나에게 그 정도의 애정을 쏟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 그런 적은 없었다. 그 일이 서운하다고 그의 행위를 저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는 축구를 같이 보거나, 그가 가는 축구장을 따라가거나, 그가 보는 스포츠 뉴스의 소식을 미리 알려주거나, 그가 좋아할 만한 유니폼을 생일 선물로 줬다. 맨유 선수들이 왔을 때 보러 갔고, 서울 FC를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나에게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었고, 행복하지도 않았고, (다행히) 습관으로 남지도 않았다.


지금 내게 축구는 그저 중요한 경기가 나오면


한 번 봐볼까?


하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다. 다들 보니까.


이게 내 축구에 대한 관심이고 애정이고 취향이다.

나는 축구 선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축구 경기를 관람하지도 않으며 응원하는 팀도 없고 축구 규칙도 솔직히 자세히 모른다.


치킨을 시키지도, 누구에게 함께 보자고도, 엄청 집중하지도 않은 채 축구 경기를 본다. 그것도 한일 결승전을.

축구를 보면서 김밥을 먹고 축구를 보다가 시를 읽는다. 축구를 보면서 글을 쓰고 축구를 보다가 내일을 생각한다.


아마 사는 동안 계속 그럴 것 같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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