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핍의 뿌리를 찾아
여느 때처럼 의사와 인사를 하고, 진료실에 들어와 앉았다. “말씀해보세요.” 그가 말했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왠지 이 이야기들이 비슷한 시기에 떠올랐어요.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하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아주 옛날 일이다. 그들은 유치한 커플처럼 굴었다. 아빠는 엄마의 발가락이 못생겼다고 놀리고 있었다. 아빠와 달리 엄마는 엄지 발가락보다 검지 발가락이 조금 더 길었다. 지금의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던 엄마는,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도 연인의 놀림을 받아치는 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아빠가 말했다. 이거 보라고, 오리는 자기를 닮아 발가락이 예쁘지 않냐고. 바보같은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아빠의 발가락, 엄마의 발가락, 나의 발가락을 번갈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내 발가락은 보기 좋게 엄지가 검지보다 긴 아빠의 것을 닮아 있었다.
나는 서러워졌다. 너무 어렸고, 그게 유치한 장난이란 것을 모를 나이였다. 아빠가 미웠고, 엄마가 불쌍했다. 나는 혼자 아무도 없는 방으로 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검지 발가락을 아프도록 잡아당겼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길어지지 않아 더 서럽게 울었다. 나도 엄마처럼 ‘못생긴 발가락’이 될 거야. 내 발가락을 못생기게 만들 거야. 아빠를 닮은 내 발이 싫어.
“그 감정은, 정말 기억이 나요. 옛날 일이지만.”
“엄마와 동일시하는데, 엄마의 못생긴 부분, 약점까지 동일시하는군요.”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혹시 아가멤논 아세요? 최근에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을 읽었어요.
‘트로이 전쟁’은 그래도 유명한 편이라 의사도 아가멤논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클리템네스트라는 몰랐다. 나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부인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 나갈 때,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였다. 트로이 전쟁이 그리스 측의 승리로 끝난 후, 아가멤논은 본국으로 돌아왔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의 딸을 죽인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선한 아가멤논을 죽였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후, 클리템네스트라가 개선한 아가멤논을 죽이는 것이 줄거리다.
내가 이십 대 초반일 때였다. 엄마는 직장 독서 모임에서 <아가멤논>을 읽었다고 했다. 리딩도 했던 모양으로, 엄마가 클리템네스트라를 맡았다. 엄마는 리딩 도중, 클리템네스트라의 대사에 공감해 울컥했다며, 내게 ‘남편은 남이고, 자식은 내 자식이다. 자식이 훨씬 소중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의사는 그 말을 듣고 어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아빠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엄마나 저나 말랑한 소리는 못하긴 하지만, 클리템네스트라까지는 너무 비장하지 않아요?” 하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엄마가 클리템네스트라에게 공감했던 것은, 내게 꽤 강렬한 기억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나의 감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네가 더 중요해. 남편 따위는 너에 비하면 죽일 수도 있는 존재야.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엄마의 사랑을 느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무언가가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아빠와의 최초의 기억 중 하나는 그가 던진 달력에 맞아 입술이 터졌던 일이다. 혈기 왕성한 시기의 부모님은 부부싸움 중이었다. 아픔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충격과 빨간 피, 동시에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얼굴. 서로는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있었지만, 어린 딸이 다치자 그들은 놀라 싸움을 멈췄다. 나는 울었던가, 울지 않았던가.
부부싸움이라는 말은 역시 어폐가 있다. 명백히 아빠가 강자였다. 두들겨 패지만 않았을 뿐, 아빠는 항상 화가 나면 쌍욕을 하며 물건을 때려부쉈다. 나는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굵어지며 더 그랬다. 무서웠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그들 사이에 개입해야 했다. 그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옛날에 자신이 던진 달력에 맞은 날 보고 아빠는 폭력을 멈췄으니까.
내 부모는 항상 사이가 나빴고, 나는 아빠에게 점점 더 저항했다. 내 저항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빠에게 맞서 소리를 지르고 같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빠가 내게 ‘패륜아’라고 할 때마다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나는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썼다. 필사적이었다. 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처럼, 희생당한 숭고한 처녀가 아니니까. 이피게네이아는 죽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남편을 더 이상 남편으로서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삼십 년이라는 지난한 세월을 버텨온 살아있는 인간이다. 클리템네스트라에 대한 엄마의 동일시는 내게 오히려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상기시켰다. 나는 내가 그리 화가 나지 않았을 때도 분노를 가장하며 아빠에게 대들었다. 당신의 폭력적인 행동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보여줘야 했으니까. 왜냐면 엄마가 날 이렇게 사랑하니까.
아빠가 밉고 엄마가 불쌍해서 발가락을 잡아당기던 꼬마와, 아빠가 던진 달력에 맞아 피 흘리던 꼬마 중 누가 더 나의 원형인지는 모르겠다. 다 나인 걸 어쩌겠는가. 화목한 가정과 사랑만을 듬뿍 주는 든든한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내게 준 사랑스러운 것들도 많고,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한다. 그러나 왠지 항상 결핍에 허덕이고 있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갈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