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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리 Aug 30. 2022

에필로그. 러쉬와 피크닉

내가 받은 말랑한 것들

분량 상 여기서 글이 뚝 끊기게 되었다. 치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1년여만에 성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싹 사라지고, 남성 일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게다가 운명적으로 새 사랑을 시작하는(!) 환상적인 결말이면 참 좋았겠다. 내 인생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예상한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인간만큼 추악한 동물도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의 햇빛은 아름답지만 세상은 썩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아름다운 것도 가끔 있고, 그걸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을 선사해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1.


 목욕 가운을 샀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던 ‘송월 타월’이라는 브랜드에서. 색깔은 왠지 감색이라고 부르고 싶은 남색이다. 일본식으로 곤색이라 불러도 어울리겠다. 입고 있으면 왠지 유카타를 입은 듯한 느낌이 드니까.


 가운을 산 이유는 목욕을 즐기게 됐기 때문이다. 친구 민이 내게 영국 브랜드 러쉬(LUSH)의 입욕제를 선물해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둘 다 없는 형편인데 만 얼마짜리 입욕제를 사서 한 번에 물에 흘려보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민은 싫은 게 아니라면 사줄 거라며, 얼른 고르라고 나를 채근했다. 못 이기듯 고른 건 러쉬의 드래곤스 에그. 민이 말했다. “이거 어차피 사치재야. ‘가성비’ 따지느라 반 자르지 말고 그냥 한 번에 다 넣어!”


 욕조에 따끈한 물을 가득 받고, 드래곤스 에그를 넣었다. 어떻게 녹는지 같이 보자고 엄마와 동생도 불렀다. 동생은 내 주문에 따라 동영상으로 입욕제가 녹는 모습을 찍었다. 드래곤스 에그는 비교적 늦게 녹는 입욕제였다. 주먹만 한 연노랑색 입욕제가 물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말 그대로 용의 알을 표현한 입욕제라, 젤리같이 투명한 알 무늬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노랗고 단단한 부분이 다 녹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감귤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알의 노른자처럼. 이윽고 욕조는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감귤색 물로 가득 찼다.


 끝내주는 건 향이었다. 시트러스와 베르가못의 향기가 물에 퍼지고 나니 더 깊이 있는 향이 되었다. 처음 레몬색의 드래곤스 에그를 쥐고 냄새를 맡았을 땐, ‘음, 레몬향이네. 좋다’ 정도였는데, 나는 이제 아주 맛있는 얼그레이 찻물 속에 잠겨 있었다. 온몸으로 따끈함과 향을 즐기고 싶어서 욕조에서 잠수를 했다. 덕분에 다음날까지도 머리카락에서 베르가못 향기가 났다.


 욕조를 나와선 곧바로 민에게 연락했다. 너무 좋았다고. 너무 좋았어서 같은 기쁨을 느껴보라고 선물해준 것 같은데, 고맙다고. 그리고 너무 느끼한 나머지 민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했으나 여기에 쓴다.


 민아. 우리의 우정에선 따끈한 베르가못 향이 나. 하지만 부정적인 나는 앞으로도 내가 러쉬의 입욕제를 계속 쓰는 사치를 부릴 수 있을까, 욕조가 있는 집에서 물을 펑펑 쓸 수 있을까, 사실 걱정돼.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온몸이 따뜻한 물에 감싸이는 기분은, 사랑을 받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아. 삶이 좀 부질없긴 한데… 우린 계속 사랑하며 살자꾸나. 얼른 이사 와서 나랑 산책하자.



2.


 어느 날엔 슬과 홍과 한강으로 피크닉을 갔다.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무기력한 날이었다. 단톡방에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고 말했다. 슬은 세심하게 나를 설득했다. “같이 햇빛 쬐면서 떠들고 기운 내야 하는데…. 혹시 멀리 오기가 힘든가? 우리가 언니 있는 데로 갈까? 언니 우울하다니까 더 보고 싶은데. 무리하지는 마, 집에서 쉬는 것도 좋은 선택이니까.” 날 설득해달라고 튕긴 건 절대 아니었지만, 슬의 메시지를 읽고 있자니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가겠다고 하니 잠자코 있던 홍이 “오예!” 했다.


 씻지도 않은 채 슬이 사주는 커피를 마시고, 슬이 가져온 돗자리에 널브러져, 홍이 정성껏 잘라온 과일을 먹었다. 과일은 맛있었다. 슬의 딸기와 홍의 참외, 포도, 처음 보는 수라향. 수라향이라는 이름을 듣자, “아수라 할 때 수라?” 하고 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수라상의 수라일 것 같다. 웬 아수라람.


 햇살이 좋았고, 바람도 좋았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그림자에 쫓겨 돗자리를 옮기며 햇볕을 탐했다. 그러면서 선크림은 열정적으로 덧발랐다. 너무 열정적이라 사진은 하나같이 웃기게 나왔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냥 햇살이 따사롭고, 과일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사랑을 먹은 거였다. 슬은 마지막에 헤어질 때까지, 힘들 때 언제든 자기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며, 아주 조금은 눈물을 삼켰던 것 같다.


 친구들 모두 다 같이 한강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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